235화
제4장. 르베이나 (55)
“아무래도 유파시드께서 흔들리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유안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흘끗 하늘을 향했다. 파벤더와 대치 중인 루드바하의 신력이 그 순간 살짝 흔들리는 걸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순간 다가온 ‘보토니에’의 흑마법사에게 여유롭게 검을 휘두른 르베나가 검에 묻은 선혈을 떨쳐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칸의 검붉은 마력이 사정없이 몰아온 바람에 흑마법사들이 날아가고, 아를과 다한, 바흐란의 검기에 그들의 사정거리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룩센 공작의 보랏빛 신력이 눈앞의 흑마법사를 강타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이들이 가루로 흩어졌고, 루시드의 은빛 신력이 광범위하게 쏘아지면 모든 흑마법사가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이 정도면 금방 정리될 겁니다.”
르베나의 시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챈 유안이 적당히 답을 하며 건성으로 파란 신력을 쏘았다. 이에 다가오는 흑마법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르베나가 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파벤더, 저 늙은이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모양이군요.”
어느새 다가온 루시드가 르베나와 유안에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본 것이다. 그의 시선 가득 잘게 흔들리는 금빛 신력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곧 그가 시선을 내려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긴 제가 가 보겠습니다, 저 녀석도 왕녀님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을 것 같아서요.”
애써 루드바하에 대한 염려를 숨기고 웃는 루시드의 얼굴. 르베나가 루드바하를 염려할까 싶어 괜한 농담을 던지는 그의 배려. 곧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광폭한 마력을 원 모양으로 터뜨리자 그들에게 다가오던 수십 명의 ‘보토니에’가 절명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세요.”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르베나의 말에 루시드의 얼굴에 완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홀연히 그들의 곁에서 사라졌다.
“파벤더 님.”
하늘을 바라본 루의 시선에 루드바하와 격돌 중인 파벤더가 가득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모두의 위에 선 오만한 자태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언제나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수려한 턱선이 돋보이는 얼굴과 서늘한 표정이 누구보다 멋진 남자. 그가 바로 그녀의 파벤더였다.
우연히 만난 그녀를 구해 주었던 그는 여전히 누구보다 순백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사랑을 누구보다 환호하며 기뻐했다.
그녀를 위해, 그녀가 바라던 복수를 위해 유파시드의 자리를 버린 남자. 누구나 선망하던 금빛 신력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버린 남자. 그 남자가 이제는 모두의 앞에서 그녀를 원한다.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루!”
허공에 그녀의 이름이 가득 울려 퍼지자. 루는 디오니스에 잡혀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흥분에 전신을 사로잡혔다. 이제 그가 내 것이라는 성취감, 소유욕, 그 밖의 규정할 수 없는 끈적한 감정들.
“파벤더 님!!”
언제나 남들의 시선을 피해 속삭이던 그의 이름을 힘껏 부르자 그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를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루는 끔찍한 흑마법의 고통을 참고 몇 번이고 다른 여자의 몸을 빌려 그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어느새 다시 루드바하와 힘을 겨루는 파벤더를 보며 루가 멀리서 싸우고 있는 르베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이야. 이 전쟁만 끝나면. 파벤더 님이 ‘다니아’만 갖게 되면.”
온 세상의 마법사들이 그들의 아래 무릎 꿇을 것이고, 루는 마력이 넘치는 르베나의 몸을 갖게 될 것이다.
고귀한 피가 흐르는 아름다운 외모. 어떤 시련에도 지지 않는 도도한 눈빛. 건강하고 탄탄한 몸.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명예와 지위.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마력.
이제 그 모든 것이 루의 것이 될 터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 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하늘이 파벤더의 검은 마법으로 가득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것마저도 거짓이었던 건가?”
루시드가 입양된 이유에 대해 말하는 파벤더에게 루드바하가 되물었다. 그러자 파벤더가 재밌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오히려 반대라네, 크크큭. 그들은 누구보다 루를 반대했지. 그녀가 일찍부터 흑마법에 관심을 가졌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차렸거든. 그래서 내가 그들을 죽이고… 크큭.”
이어지는 파벤더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심하게 동요했다. 그 시선을 즐기듯 바라보던 파벤더가 더 크게 웃어 보였다.
“그들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 호적에 올렸지. 그래야 그들의 후손도… 크크큭. 내가 사라진 후 머저리 같은 헤리테온즈에게 핍박을 당할 테니… 말이야. 크크크크!”
파벤더의 말에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분노가 흔들리는 신력을 통해 전해졌다. 파벤더를 상대하는 게 괜찮겠냐 묻는 자신에게 슬며시 숨기던 루시드의 씁쓸한 미소가 생각난 탓이었다.
하지만 파벤더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제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버린 마법을 쏘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루드바하의 마법을 꿰뚫었다.
놀란 루드바하의 시선이 웃고 있는 파벤더를 향하자 그가 이죽거렸다.
“그대가 유파시드라 하여도 그깟 신력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는 흑마법을 이기지 못하지. 크크큭.”
동시에 루드바하의 마법을 뚫은 그의 마법이 루드바하의 깊고 진한 눈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제 그만 호적정리를 좀 할까 싶군.”
파벤더의 마법이 루드하바를 꿰뚫듯 다가왔지만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 루시드가 말하지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이 그려지는 듯해서. 힘도 없고 방계의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유파시드의 아이로 입양된 것에 대한 질투, 그 유파시드가 영웅이 되어 죽고 난 후 그 모든 영광을 대신 짊어질 아이에 대한 시기,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받았을 어린 루시드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져서. 그리고 이제껏 그걸 몰랐던 자신이 한심해서.
‘실드를 쳐야 해.’
당장 공격 마법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음에도 그의 손과 발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였다.
“루드!”
그의 앞에 옅은 은빛의 신력이 광활하게 펼쳐진 것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냐!”
걱정이 잔뜩 어린 그, 루시드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루드바하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순간 정제되지 못한 혼란을 담은 루드바하의 시선이 여과 없이 루시드를 향하자 힐끗 파벤더를 본 그가 말했다.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무시하거라, 루드.”
근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기라도 한 걸까. 어머니만 부르던 그의 애칭을 입에 담은 루시드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다 지난 일이다. 이제 내게는 아드리안과 네가 있어. 그걸로 됐다.”
루시드의 말에 루드바하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지자 그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루드, 그 모든 게 아드리안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네가 내 아들이 되는 과정이었고, 모든 세츠와 베이라가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울 이 날을 위해서였다고 하면 난 괜찮다. 몇 번이고 다시 그 시절을 겪어 낼 수 있어. 그러니.”
순간 또렷하게 빛나는 루시드의 시선이 루드바하의 마음 속을 파고든 깊은 어둠을 몰아냈다.
“헤리테온즈에, 파벤더에, 무분별한 분노를 담지 말아라. 지금은 네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켜라. 저자가 너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 또한 널 흔들기 위해서이니. 속지 말아라. 나와 아드리안은 널 이렇게 약한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다.”
루시드의 흔들림 없는 말에, 시선에 루드바하의 시선 속 강한 빛이 다시 힘을 내어 반짝였다. 그걸 확인한 루시드가 아들에게 한번 부드럽게 웃어 주고는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파벤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번도 기억에 남지 않는 호적뿐인 아버지.
“그래도 아비인 내게 ‘저자’라니. 내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함께 계실 때도 딱히 제 교육에 관심을 두셨던 기억은 없군요.”
자신의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입양했다는 남자. 순간 파벤더와 루시드가 아주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을 다섯 번쯤 깜빡일 아주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 서로에게 시선을 떼었다. 곧 홀가분한 표정의 루시드가 루드바하에게 말했다.
“이곳은 내가 맡으마. 넌 르베나 왕녀님과 아래를 정리하거라.”
루시드가 손에 은빛의 신력을 모으며 말했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아닙니다.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아버님은 르베나와 아래로 내려가 계십시오.”
루드바하가 환한 금빛의 신력을 모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루시드가 다시 아들을 만류했다.
“‘다이나’를 지키는 게 우선 아니냐. 어서 내려가거라.”
하지만 루드바하도 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그곳으로 못 가게 막아야 하니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두 부자는 한동안 그렇게 티격태격 서로가 이곳을 맡겠다 아웅다웅했다. 그 모습을 보던 파벤더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루시드의 옆모습을 잠시 눈에 담고는 다시 검은색의 마력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웅— 우웅---!
곧 그의 손에 몸채만 한 흑마법이 구의 모형으로 만들어졌다. 그와 함께 여전히 누가 이곳에 남을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부자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안 내려가면 되겠군.”
서늘한 파벤더의 소리와 함께 검은 마법이 그들에게로 향한 것이다.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던 그대로 각자의 손에서 환한 은빛과 금빛의 신력을 쏘아냈다. 다가오는 거대한 흑마법에 대항하는 그 두 빛의 신력은 더 이상 어떠한 흔들림과 염려도 담고 있지 않았다.
“위는 정리가 좀 된 거 같군요.”
얼핏 허공을 올려다본 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안이 앞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저희도 이제 정리를 좀 해 볼까요.”
잠깐 새 수가 반으로 줄어든 ‘보토니에’ 흑마법사들의 얼굴이 곤혹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작 몇 안 되는 인원에게 순식간에 밀렸다는 것에 놀란 것이리라.
곧 유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칸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터져 나왔고 이에 질세라 룩센 공작과 유안의 몸에서도 각기 엄청난 양의 신력이 터져 나왔다.
“모두 조심해!”
이를 본 흑마법사 한 명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소리침과 동시에 몰려온 마법에 흑마법사 대부분의 몸이 찢기기 시작했고, 후퇴하려던 ‘보토니에’의 마법사들 앞조차 그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후퇴는 불가합니다.”
진한 갈색의 검기를 내뿜는 검을 치켜든 다한이 말했다.
“우리랑도 붙어봐야지.”
진한 금빛의 검기를 휘두르며 아를이 제 뺨에 튄 누군가의 피를 닦아냈다.
“나랑도 놀자!”
마지막 녹색의 검기가 흐르는 구부러진 칼날을 허공에 그어 낸 바흐란이 말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남은 흑마법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전쟁이 어느새 오후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