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34화 (234/276)

234화

제4장. 르베이나 (54)

“이게 무슨……!”

헬리오의 전신에서 퍼져나오는 갑작스러운 섬광에 ‘보토니에’의 세츠가 놀라 외쳤다.

그 순간 엄청난 신력의 파동이 작은 아이의 몸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루 님!!”

순간 루의 몸을 감싼 세츠가 그녀와 함께 멀리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신력과 마력이 루를 보호하고 있던 파벤더의 실드를 깨고 쓰러진 두 사람의 몸을 빠르게 구속했다. 후벤과 아를은 곧바로 뛰어나가 사나와 헬리오의 몸을 안았으며. 막사에 있는 모두가 움직이지 못하는 루와 세츠의 주위를 둘러쌌다.

예상치 못한 섬광과 신력의 파동이 사라진 후. 마치 짠 것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본 루가 경악한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모두의 사이로 르베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곧은 시선.

그것이 자신을 향했을 때 루는 어떤 불길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떻게……?”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뱉어낸 루에게 르베나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닿았다. 곧 르베나가 루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군. 잡히지 않는 첩자라는 건 어쩌면 우리가 도저히 예상하지 못할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르베나의 말에 루의 시선이 한차례 떨려왔다. 그런 루를 보며 르베나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후 파벤더의 측근이 루타라 불린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너의 이름이 떠올랐다. 루타라는 허브는 편히들 루라고도 불리니까. 그러고 나니 생각하기 싫은 가정들이 떠오르더군.”

르베나의 눈이 잠시 아프게 흔들렸다.

“네가 아까 말했던 모든 순간에 함께 있던 너라는 존재에 대해. 또 수많은 의무실 중 어디에 아를이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곳에 두고 온 나의 반지를 가져다 놓은 너도. 누가 내 방에 방문하고 나면 언제나 듣고 있던 것처럼 정확한 때에 밀크티를 들고 오던 것도 너였지. 그래서 내 방에서 찾아낸 작은 도청 장치를 볼 때 확신하게 되었다. 그딴 걸 달 정도로 나보다 내 방을 더 자주 드나드는 건 너뿐이라는 걸. 그러니 다 보이기시작하더군.”

잠시 쓴웃음을 지어 보인 르베나가 떨리는 루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언젠가 가족에 관해 얘기를 하며 애써 분노를 숨기던 너의 눈빛도. 루드바하와 나를 보는 부러운 시선 속에 숨어 있던 강한 경계심도. 보이지 않던 모든 것들이 정말로 ‘믿음’이라는 한 글자를 거둬내니 한순간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 네가 파벤더의 서신을 전한 순간부터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 루가 뭔가를 망설이듯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너의 입궁 전 행적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아를의 보고를 듣고 이 모든 게 너의 범행임을 확신하면서도 고민했다. 어쩌면 너도 헬리오와 같을지 모른다고. 오랜 시간 그에게 세뇌당했던 거라면 정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러나.”

순간 르베나의 눈에서 참을 수 없는 불꽃이 피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기다린 검이 들렸다.

“그 모든 게 너의 의지로 이루어졌다면. 게다가 사나와 후벤의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게 너라면. 루,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지. 나에게 한 일은 용서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네가 저지른 짓은 용서할 수 없으니.”

르베나의 말과 동시에 그녀의 검이 루의 목을 향했다. 다가오는 검을 보며 루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충격에 굳어 있었다..

‘르베나 왕녀가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멍한 생각이 지배한 뇌리는 목숨의 위협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펑! 퍼버벙-!!

그때, 강한 굉음과 함께 막사 전체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격이다!! 적이 공격을 재개했다, 방어!!”

막사 밖에서 들려온 한 세츠의 외침이 모두의 귀에 담겼다. ‘보토니에’와 디오니스의 2차전이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멍하게 있던 루의 입가에도 다시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파벤더는 절대 그녀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디오니스의 진영을 감싼 금빛 물결위로 쉴 새 없는 ‘보토니에’의 공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루드바하의 실드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그들의 공격을 모두 거세게 받아냈다.

동시에 디오니스 수백의 베이라와 세츠들의 공격 마법이 다가오는 ‘보토니에’를 향해 강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금빛과 검은색이 섞인 파벤더의 실드가 디오니스의 공격 마법을 가볍게 받아내자 디오니스 진영에서도 당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파벤더가 흑마법을 사용할 생각인가 보구나.”

다가올 충돌에 대비해 아벨디온에게 실드를 발동하던 칸의 말에 르베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결국은 그걸 위해 모든 걸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공격이 약합니다.”

옆에 있던 다한이 쏟아지는 공격을 보며 말하자 르베나가 슬쩍 뒤를 보고는 말했다.

“정말로 사랑하나 보지. 자신의 연인을.”

그리고 진영의 뒤에서 성기사들과 아벨디온이 지키고 있는 루와 ‘보토니에’의 세츠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파벤더를 보며 웃고 있었다.

“루를 내놔라, 르베나 왕녀!!”

이성을 잃은 것만 같은 파벤더의 외침이 디오니스의 진영을 강타했다. 동시에 잠시 보이지 않던 몬스터들도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온 ‘보토니에’를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디오니스를 사수하라!”

르베나의 외침을 따라 루드바하 또한 젠에서 온 모든 이들에게 말했다.

“‘다니아’를 지켜 모두를 지켜라!”

쾅……!! 그와 동시에 두 진영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차 공세와 사뭇 다른 기세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공격에 수천의 다니아 기사들이 검을 뽑고 그들을 베어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아벨디온과 세츠들이 방어했고 베이라들이 공격으로 대응했다.

어느새 맞닿은 루드바하와 ‘보토니에’의 실드가 팽팽한 대결을 벌였고, 르베나의 앞에는 수백명의 ‘보토니에’ 흑마법사들이 자리했다.

“왕녀님 하나로 우리 모두를 이길 수 있을까요?”

한 여자 흑마법사가 르베나를 훑어보고는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오른손에 늘씬한 은빛의 검을, 왼손에 검붉은 마력을, 어깨에 팅을 올린 르베나가 그녀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네 눈엔 내가 혼자로 보이나?”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토니에’ 마법사들 주위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칸, 아를, 바흐란, 다한, 유안, 룩센 공작과 루시드가 르베나의 주위를 감싸왔다.

* * *

쾅……!!! 콰광!!!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발음이 여기저기를 지속해서 강타했다. 허공에서 디오니스를 향하는 파벤더의 공격과 이를 막아내는 루드바하의 신력이 빚어낸 진동은 하늘을 울렸고, 수백 명의 흑마법사와 대적하는 르베나와 그녀의 일행들이 내는 굉음은 땅을 울렸다.

비명과 고성이 난무한 전쟁터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다니아 기사들이 검을 내리치는 소리는 묵직했고, 디오니스의 베이라들과 젠의 세츠들이 단 하나의 적을 향해 힘을 합치는 마법의 빛은 다채로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장엄하고 멋진 어느 장면.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에겐 짙은 피비린내와 굉음만이 존재할 뿐인 혼돈.

그 모든 것이 지금 디오니스의 남쪽 국경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파벤더 님!!”

순간 디오니스 진영의 한 가운데 포박되어 있던 루가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연인을 불렀다. 그러자 루를 바라본 파벤더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루를 내놔!!!”

얼핏 고통스럽게까지 들리는 파벤더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흑마법이 더 강하게 크기를 키워 루드바하의 실드로 향했다. 이에 루드바하가 지상에서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는 르베나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그곳에 피해가 가지 않게 강대한 신력을 끌어내 거센 공격 마법을 발현했다.

쾅……! 순간 주위의 모든 공기가 사라져버린 듯한 폭음과 함께 루드바하와 파벤더의 공격 마법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향했다.

“루드바하 님!”

그때 지상에서 커다란 실드를 만들어내던 유안이 허공을 보고 외쳤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들리지 않는 듯 코앞까지 다가온 파벤더의 힘을 보며 얼굴을 차게 굳혔다.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얻은 것이 고작 이 힘인가?”

루드바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루에게만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루드바하를 향했다.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그가 말했다.

“나에게 가문은 족쇄였고 유파시드란 자리는 허울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정의라는 헛된 명분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와 그녀뿐이었으니!”

파벤더의 시선이 곧 루드바하를 지나 지상에서 엄청난 신력을 뿜어내는 루시드를 잠시 향했다. 그러고는 루드바하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군. 세츠는 직계를 향해 힘을 드러내기가 힘들 텐데… 어째서 너는, 그리고 루시드는 나를 대항할 수 있는 거지?”

파벤더의 말에 순간 루드바하의 눈에서 불같은 분노가 일었고 그의 신력이 감정을 대변하듯 크기를 더했다.

“가족? 기껏 입양한 어린아이를 홀로 버려두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간 당신이 감히 나와 아버님의 가족이라고?”

펑……! 순간 루드바하의 신력에 파벤더가 크게 뒤로 밀려났다. 조금 놀란 그의 시선이 루드바하를 향했다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걸 말하는 건가? 감히 방계의 자식 따위가 유파시드에게 입양됐다는 이유 하나로 신력이 발현되기까지, 그 시간 동안 루시드가 모든 헤리테온즈 가문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며 자란 일? 그 아이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이유도 모른 채? 크큭.”

파벤더의 말을 들은 순간 루드바하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그걸 본 파벤더가 아주 짙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런! 루시드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지 못한 모양이군. 멀리서 지켜본 나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입양하고 버림으로써 너의 아버지 루시드가 얼마나 눈치를 보고 핍박받으며 자랐는지 말이다. 그 아이가 신력을 꽃피운 그때까지.”

파벤더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너한테 그런 거짓은 듣고 싶지 않다. 하물며 가족이라고? 흑마법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살생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해 또다시 피를 보려는 네가 말인가?”

루드바하의 말을 들은 파벤더가 다시 지상에서 싸우는 루시드를 흘끗 보고는 말했다.

“루와 나의 관계를 멸시하고 반대하던 모든 가문 사람 중,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루시드의 부모였지. 그들은 머지않아 신마전쟁에서 죽었지만 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그들의 어린 자식을 내 아들로 입양했다.”

이번에 헤리테온즈에 있으면서 익히 들었던 루시드의 입양 이야기였기에 루드바하에게는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파벤더는 다시 자신의 힘을 한층 더 끌어올리며 재밌다는 듯 히죽거렸다.

“그래, 아마도 이렇게 들었겠지?”

곧 크기를 키운 흑마법을 모은 파벤더가 지상에 있는 루시드를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동시에 루드바하의 시선은 불안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다시 한번 세차게 흔들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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