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제4장. 르베이나 (53)
루의 사정을 알게 된 그는 곧바로 루를 부모에게서 구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지른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므로 그녀의 처분을 고민하는 동안 파벤더는 루를 제 곁에 두기로 하였다.
“네 사정은 알겠지만… 살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씻지 못할 중죄다.”
“알고 있어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루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랬기에 파벤더는 그녀에 대해 가여운 마음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내 옆에 있어라. 네 처우가 결정될 때까지.”
그렇게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의 곁에서 루는 처음으로 깨끗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잤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그것만으로 그에게 사랑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그의 처분에 따라 또다시 그녀의 삶은 변할 것이므로.
삭-! 그리고 사랑은, 아니 그 비슷한 건 넘기던 종이에 베인 손가락을 무심하게 보던 어느 날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상처에 무심했던 루는 그날도 방울져 떨어지는 피를 보며 작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겪은 매 순간의 고통에 비하면 이런 건 통증 축에서 끼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닿아온 따뜻한 금빛의 신력은 그녀가 느끼지도 못한 작은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했다.
깜짝 놀란 루의 시선이 멀리서 무심히 업무를 보는 그, 파벤더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낮은 음성이 담은 것은 태어나 그녀가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해라. 네가 얘기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처음으로 자신에게 아픔을 얘기하는 그에게 루는 말했다.
“아프지 않아요. 저는 이런 거 보다 살아 있는 게 더… 아파요.”
그 순간.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파벤더의 시린 눈이 그녀를 향했다. 아무리 먹여도 여전히 마르고 수척해 보이는 루에게. 곧 그가 말했다.
“아프지 않게 될 거다. 살아 있는 시간이, 내일이 기다려지게 될 거야. 너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파벤더의 말에 루의 눈에 죄책감 어린 눈물이 맺혔다.
“사람을… 죽였잖아요.”
루의 말을 들은 파벤더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는 말했다.
“그땐 네가 그를 왜 죽였는지 몰랐으니 죄라고 했다. 하지만.”
파벤더의 눈이 벌써 몇십 일째 그와 함께한 작은 여인을 향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살게 된 여자. 아무리 주변에 호소해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지 않은 여자. 그래서 고통에 익숙해져 버린 여자. 이불 하나에도 큰 눈을 껌뻑거리고 단 음식 하나도 아껴먹는 여자. 그리고 이제는 아주 잠시만 안 보여도 궁금해지는 여자.
순간 아주 작은 분노가 처음으로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내가 죽였을 테니 문제는 없다, 루.”
처음으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비탈리라는 본명이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그녀의 이름을. 그리고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아주 작은 크기로 피어올랐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서로를 제외한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태울 만큼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 * *
오랜 기억에서 깨어난 루가 떨리는 몸에 힘을 주며 외쳤다.
“날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해 준 건 그 사람이야!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사이를 방해한 게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이고! 원하지도 않았던 내 과거 때문에!”
순간 루의 눈에 서러움과 고통이 서린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날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들에게 영원히 사라지기 위해 난 내 몸을 버릴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손을 댄 흑마법 때문에 몸을 바꿔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지.”
곧 르베나를 보며 씨익 웃은 루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제 나에겐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어. 그와 내 사랑을 지켜나갈 방법. 내가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니 이제 선택을 하세요, 왕녀님. 나에겐 더 양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가 않거든요. 사나와 헬리오를 구할지, 아니면 이 둘을.”
루의 시선이 세츠가 마법을 겨누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모두 죽게 하고 ‘다니아’도 빼앗길 건가요?”
순간 루의 눈에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묵힌 진득한 분노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이를 놓치지 않은 아를이 잠시의 틈을 파고들며 물었다.
“이미 너희 둘 사이를 방해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이지 않았나?”
아를의 말에 잠시 멈칫한 루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눈빛처럼 광기로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맞아. 모두 죽였어. 나를 돈 몇 푼 받고 머저리한테 팔아버린 내 가족이란 것들도, 그들의 다른 아이들도. 그 마을도 전부. 그리고 내가 파벤더 님에게 가지 못하게 막은 성기사들과 서기관도……!!”
루가 곧 과거를 그리듯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몬스터의 먹이로 줘 버렸지! 크큭. 하지만 아직도! 아직도 난 꿈을 꿔. 원하지 않는 그 머저리들의 장난감이 됐던 수많은 날들. 고통에 몸부림치며 도와달라 절규했지만 날 외면했던 인간들. 그 꿈에서 난 영원히 깨어날 수가 없어.”
고통에 잠긴 루의 눈에 얼핏 눈물이 고여가다가는 순식간에 깊은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두 죽여 버릴 거야. 모두를 파벤더 님과 내 발 밑에 무릎 꿇리고 내가 경험한 지옥을 돌려줄 거야. 그리고 누구의 반대도 없이 그분의 곁에서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와 나의 아이를 낳고 그렇게. 그러니까 ‘다니아’를 줘. 정말 모든 산 것을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루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얼핏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쓰러진 사나와 헬리오의 모습을 르베나는 놓치지 않았다.
“너에게 일어난 불행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한다. 하지만 그게 네가 다른 이들을 죽이고 궁지에 몰 수 있는 명분이 될 순 없어, 루.”
르베나의 말에 어딘지 흐리게 미소지은 루가 말했다.
“그 말은 이들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죠?”
아주 조금 허탈하게 웃은 루의 손가락이 이내 사나의 목을 향하고 세츠의 마법은 작은 헬리오의 몸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까지 루와 사나, 헬리오 모두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르베나가 말했다.
“아니, 모두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리야.”
르베나의 말에 루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그녀를 향했다. 동시에 르베나가 헬리오를 보며 크게 외쳤다.
“지금이야, 헬리오!!”
순간 눈부신 섬광이 헬리오의 전신에서 퍼져나갔다.
* * *
“왕녀님,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거예요?”
헬리오가 저지른 그동안의 일이 모두 파벤더의 세뇌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헬리오는 여전히 디오니스의 사람들을 어려워했고 특히 르베나 보기를 더욱 힘들어했다. 그건 사태의 원흉이 된 자신을 거둬 준 르베나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 르베나가 자신을 따로 부르자 헬리오가 사뭇 긴장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불어 그 옆에 서 있는 루드바하와 아를, 다한의 존재 또한 헬리오의 긴장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사나가 없는 상황이 불안한 듯 연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헬리오의 앞에 르베나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건 그때였다.
“헬리오, 아마도 이 디오니스 안에,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보토니에’의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의 시선이 서서히 공포에 물들어 갔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잠식했던 힘. 고마운 이들의 물건을 훔치고도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들었던 그들. 내쫓기기 싫은 마음에 더욱 뻔뻔해졌던 자신.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들. 그 모든 사건의 뒤에 있던 단체, ‘보토니에’.
생각을 이어가는 헬리오의 시선이 초점을 잃고 두려움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꽉 맞잡은 작은 손은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에 떨리고 있었다.
“‘보토… 니에’… 그들이, 근처에……!”
작은 입을 열어 공포를 토하던 헬리오의 몸이 순식간에 다가온 검붉은 마력에 휩싸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따뜻함이, 위로가 아이의 몸을 포근히 감싼 것이다. 그리고 르베나가 전해준 그 온기에 헬리오가 놀라 바라보자 그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꼭 널 지켜 줄 거야.”
그 말은 어떤 미사여구를 담지도, 사나처럼 강한 사랑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르베나의 그 한 마디로. 헬리오를 지배하던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한순간에 녹아 버렸다.
곧 아이가 진정되는 걸 확인한 르베나가 조금의 망설임 끝에 이어 말했다.
“하지만 헬리오.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가 모두 바쁠 때, 그 나쁜 사람이 어디선가 나타나 사나나 널 노릴 수도 있어.”
이어진 그녀의 말에 순간 헬리오가 화난 사람처럼 외쳤다.
“안 돼요! 사나 님은… 절대로 괴롭힘당하면 안 돼요! 그건 너무 아프고 괴로운 일이란 말이에요. 사나 님은 너무 약하고 착하셔서… 흑… 안 돼요!”
훌쩍이며 외치는 아이를 본 르베나가 헬리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으며 말했다.
“그래, 알아. 사나가 아니라 헬리오 너도. 그 누구도 그런 일은 당하면 안 되지.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난 오늘부터라도 네가 마법을 배웠으면 좋겠단다.”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가 놀란 눈을 뜨며 말했다.
“마법이요? 하지만 전 마법 학교도 못 들어갔는데…….”
헬리오의 말에 르베나가 옆에 선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상관없어. 왜냐하면 네 스승이 무려 유파시드거든. 너만 좋다면 유파시드께서 너에게 공격 마법 하나를 알려주실 거야. 아주 만약의 상황에서 너와 사나를 지킬 수 있는 마법 딱 하나만. 배워 볼래?”
르베나의 제안을 들은 헬리오의 시선이 루드바하와 아를, 다한을 차례로 향했다. 아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헬리오가 곧바로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 순간 르베나가 헬리오를 마주 보며 당부했다.
“그리고 이건 사나에게도, 후벤에게도 비밀이야. 왜냐하면 비밀 무기라는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효과적이거든.”
르베나와 눈을 마주친 헬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아주 환한 미소였다.
그로부터 열흘. 아를과 다한이 헬리오에게 ‘보토니에’의 정보를 조금 더 얻는다는 명분으로 헬리오는 외궁의 작은 방을 매일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드바하에게 단 한 가지의 공격 마법을 배웠다. 어린 시전자에게 부담이 없으면서도 효과적인.
그리고 열흘째. 헬리오의 몸에서 눈부신 섬광과 신력이 터져 나왔다. 휘익--!!! 그 여파로 멀찍이 밀려난 아한과 다한을 본 헬리오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눈으로 르베나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어 보인 르베나가 헬리오와 눈을 맞추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기억해, 헬리오. 절대 내 허락 없이는 쓰면 안 돼.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라도. 그래야 꼭 우리가 너와 사나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어. 약속할 수 있겠니?”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가 처음과는 다른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요, 왕녀님. 저, 사나 님께 왕녀님 말씀 무조건 잘 듣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어느새 아이의 눈에는 흔들리지 않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