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32화 (232/276)

232화

제4장. 르베이나 (52)

“멍청한 쥬라 놈이 진을 치고 있던 곳도 사실은 제가 알려 줬어요. 왕궁에만 틀어박혀 있던 세나르, 그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겠어요? 그런데도 모두 뒤집어쓰고 골골거리던 꼴이란……! 아, 하지만 그 여자가 쥬라한테 의뢰한 건 맞으니까 억울하진 않을 거예요.”

거침없이 쏟아지는 루의 말에 르베나의 손이 아주 살며시 떨려왔다. 보석을 구하러 마하렌에 다녀오는 길, 쥬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갔던 길을 되돌아왔기 때문에 세나르가 알려 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 굳이 따라가겠다는 사나를 설득해 그녀 대신 함께한 것이 루라는 것을. 그 피비린내나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상처 하나 없던 사람도 루 뿐이었다는 것을.

무엇보다 쥬라는 그 광범위한 결계를 오래 유지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그들이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 알지 못했다면 더욱.

르베나의 눈이 시린 분노를 담고 루를 향하자 그녀가 조금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벌써 화를 내시면 곤란해요. 마를한으로 향하는 길에 몬스터 떼가 자주 출몰한 것도 제가 우리 위치를 알려줘서 가능했던 거든요. 그때 감히 제 손을 잡은 드록만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우리 왕녀님이 너무 착해서 실패했잖아요! 그리고 국경에서의 전투도! 왕녀님이 안 계실 때 아벨디온을 처리할 수 있도록 ‘보토니에’를 불렀는데, 다 알고도 멍청한 것들이 실패해서 어이가 없었다고요.”

루의 말에 아를과 다한의 눈에서도 새하얀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때 그들이 걸어야 했던 각오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루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여자가 시녀를 그만두게끔 유도한 것도 다 내가 당신의 측근이 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야 좀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요. 헬리오에게 파벤더 님의 힘이 담긴 인형을 사나 님의 선물이라며 전달한 것도, 크큭. 멍청한 죄책감에 세뇌가 풀리려던 헬리오에게 꾸준히 세뇌를 강화하는 약을 먹인 것도요!”

자랑이라도 늘어놓는 듯한 루의 말에 르베나가 애써 없는 차분함을 쥐어짜 흉내내며 힘겹게 물었다.

“칸 님의 서신을 조작해 아를에게 건넨 것도 너인가?”

르베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루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아무래도 아벨디온은 너무 거슬리는 존재라 전쟁 전에 수를 좀 줄일까 했는데, 아쉽게도 실패했죠. 아, 너무 그렇게 화내지는 마세요. 젠픽스에서 아한에게 르베나 님에 대한 험담을 듣게 한 거는 순전히 장난이었으니.”

순간 분노를 담은 아를의 시선이 루를 향했지만 그녀는 피식 웃고는 르베나를 보았다.

“난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르베나 님. 당신이 그만한 관심과 아량을 베푸는데도 고작 저런 아이한테 마음 하나 간수 못 하고 당신을 피곤하게 만든 저 여자가 뭐가 그렇게 좋을까?”

순간 소름 끼치도록 무기질적인 루의 시선이 고통에 미간을 구긴 사나를 향했다. 사나 또한 루의 말을 듣고 과거 헬리오의 일이 마음에 쓰였는지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을 슥 둘러본 루가 시선을 돌리며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썩 싫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현명한 방법으로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이 여자와 헬리오를 죽이는 데 딱히 망설임이 있진 않거든요.”

모두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을 끝낸 루의 얼굴은 그들이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이 알던 루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나 님을 놔! 놓으라고. 이 못된 여자야!! 이 악마 같은 여자야!! 흑……!”

그때 이제껏 사나의 목에서 흐르던 피에 눈을 떼지 못하던 헬리오가 갑자기 울며 루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루의 옆에 있던 ‘보토니에’쪽 세츠가 헬리오의 몸을 거칠게 잡아챘다.

“헬리오!! 당장 아이에게서 손 떼!”

헬리오의 작은 몸이 거칠게 다뤄지는 모습에 후벤이 불같이 화를 내자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루가 보란 듯 헬리오에게 말했다.

“쯧. 네가 아플 때마다 간호해 준 게 누군데 그런 못된 말을 하는 거니?”

자신을 지키려는 후벤의 호통에 그를 바라본 헬리오가 루를 향해 외쳤다.

“간호해 준 게… 흑, 아니라며!! 날 다시 세뇌했다며! 네가 준 인형 때문에… 흑… 아를 님과 아한 형이 다칠 뻔했어! 죽을 뻔했다고! 난, 난 정말 사나 님이 준 건 줄 알았는데… 흑…….”

울며 소리치는 헬리오를 보며 서늘한 시선의 루가 별안간 아이의 얼굴을 난폭하게 붙잡았다.

“똑똑히 알아야 할 거야, 헬리오. 우리 같은 인생에 구원자란 없어. 처음부터 밑바닥에서 시작하면 끝도 밑바닥인 거야.”

무섭도록 다그치는 루의 말에, 분노로 가득 찬 그 시선에. 헬리오가 두려움에 가득 차 얼굴을 빼려 하자 루가 더 세게 아이의 얼굴을 잡았다. 그러자 고통에 힘들어하던 사나가 루에게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헬리오는,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사나의 외침에 루가 휙 헬리오를 놓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 아이? 아이고, 사나 님이 아무래도 충격이 크셨나 보네. 사나 님의 아이는 죽었잖아요.”

루의 말에 사나가 눈물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씨익 웃은 루가 이어 말했다.

“기억 안 나요? 왕녀님의 궁에 와서 내가 준 차를 마시고 다음 날 아이를 잃었잖아.”

루의 말에 사나가 더없이 커진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그 순간 사나의 얼굴엔 도저히 떠올리기 싫은 어떤 가정이 스치듯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 게 지금, 무슨… 상관이……?”

끔찍한 상상을 하는 사나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은 루가 달래듯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루타, 혹은 루라고 불리는 허브는 항상 복용에 주의해야 해. 특히 임산부는… 큭.”

루의 말에 사나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가 루에게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용서 못 해!!! 죽여 버릴 거야. 으흑!! 내 아이, 내 아기를……!!!”

소리치는 사나의 음성이 공간을 울리는 동안 후벤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동시에 르베나의 손에서 검붉은 마력이 그녀의 분노를 담고 쏘아졌다. 그러나 루의 몸에서 튀어나온 금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신력이 그녀를 더없이 강하게 보호하기 시작했다.

“죽어!”

하지만 분노에 찬 르베나의 강한 외침과 함께 루를 감싼 실드가 흔들렸다. 그 순간.

“윽!!!”

루의 곁에 있던 세츠가 혼절 직전인 사나와 헬리오의 몸에 공격 마법을 겨누고는 말했다.

“루 님이 다치면 나도 죽은 목숨이라서.”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르베나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붉은 마력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왕녀님.”

그녀를 부르는 후벤의 목소리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노와 슬픔, 그리고 허탈함을 담은 그 목소리에. 르베나의 모든 마력이 순식간에 정지했다. 동시에 르베나의 시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향했다.

사나만큼 분노하고, 사나만큼 괴로울 사람. 그가 바로 후벤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막다니……! 르베나의 시선을 마주한 후벤이 떨리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저 여자는 반드시 제가 죽이겠습니다. 그러니 사나를… 사나를 먼저 구해주세요. 충격이, 너무 클 겁니다.”

후벤의 음성에 담긴 좌절과 분노, 상실감과 공포가 르베나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순간 르베나는 단번에 마력을 갈무리하고, 너무 큰 충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나와 그런 사나를 보며 우는 헬리오를 바라보았다.

“날 죽여? 네깟 기사가? 푸하하! 난 파벤더 님의 보호를 받는 그의 여자야. 누구도 날 죽일 순 없다고!!!”

후벤을 보며 소리친 루가 모두를 훑어보며 다시 고함쳤다.

“그러니까 누가 임신했다고 유세를 떨래? 우린… 우린 모두의 반대로 제대로 된 사랑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그와 함께 보내기 위해 그의 아이조차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그런데……!!”

곧 루의 눈이 끔찍한 고통과 심장을 옥죄는 통증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내 앞에서 왜… 유세를 떨어.”

* * *

“비탈리, 이번에 네 신랑이 되실 분이다.”

새는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 그곳에서 몇 날 며칠을 굶은 채 갇혀 있던 앙상한 여자의 눈이 허무를 담고 열린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곧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부모에게 돈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며칠 후 주도록 하지.”

그의 말에 그녀의 부모는 히죽 웃으며 그녀를 냅다 노인에게 던져 버렸다. 그리고 반항 한번 없이 그의 집으로 끌려간 그녀는 매일 밤 지독한 죽음을 갈망하게 되었다.

“헉… 헉! 비… 탈리! 비탈리!!!”

제 몸 위에서 늙고 비대한 몸을 비벼 대며 이름을 불러 대는 노인의 목소리가 역겨웠다. 값비싼 시가렛에 찌든 그의 냄새도. 아니, 그런 사람의 밑에 뭉개져야 하는 자신이 그녀는 가장 역겨웠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노름 빛으로, 어머니의 치장 값으로 벌써 동네의 남자들에게 팔려 다닌 게 수년. 그들은 모두 싼 값에 그녀라는 신부를 맞아들였다.

하지만 온종일 그녀에게 거친 일을 시키고 밤마다 탐욕스럽게 그녀의 몸을 탐하던 남자도,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그녀를 또다시 술집에 팔아넘긴 남자도, 그녀를 욕하고 때리던 남자도 모두 사라졌건만. 그녀는 또다시 집으로 끌려왔고 몇 번째일지 모를 남편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동네에서 도망치려는 그녀를 잡으면 그녀의 부모에게 푼 돈이라도 받을 수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어도 끝나지 않을 고통.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더 끔찍할 고통 위에 그녀는 하루하루 죽어갔다.

끼익-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흔들리는 낡은 침대와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역겨운 짓을 해 대는 노인.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멍하니 창밖의 달을 보며 생각했다.

‘난 비탈리가 아니야. 저 늙은이가 부르는 건 내가 아니야. 난, 난…….’

순간 그녀의 눈에 달빛 아래 흐드러진채 만발한 꽃밭이 보였다. 허브임에도 향이 좋지 않아서, 효용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 그래서 더 만발하며 수를 늘려가는 그것.

“…루, 내 이름은 루야.”

작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노인이 더 거칠게 자신의 몸을 밀어붙이며 물었다.

“뭐라고? 학… 좋구나. 좋아, 헉헉……!”

순간 그녀, 루가 노인을 보고 다시 말했다.

“루라고, 내 이름. 어차피 넌 이제 기억 못 하겠지만.”

콱!! 순간 루가 침대 옆에 놓여 있던 과도로 노인을 찔렀다. 몇 번이고. 그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만큼. 역겨운 몸을 가져다 댄 만큼. 딱 그만큼. 그리고 루는 그의 피를 뒤집어쓴 채 집을 벗어났다.

맨발로 터덜터덜 허브 루가 잔뜩 피어 있는 곳으로 걸어간 그녀가 이내 그곳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이 두려웠는지 떨리는 손과 가뿐 숨소리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웠다. 태어나 처음 느껴본 자유.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의 탐욕스러운 부모라는 것들은 이 사실 또한 푼돈으로 숨긴 채 그녀를 또 잡아 어딘가에 팔 테니. 그러니 그녀의 끝은 스스로만 낼 수 있었다.

“내 차례인가.”

흐드러지게 핀 루 밭에서. 강하고 독한 허브의 향 아래. 루는 그를 찔렀던 과도를 허공에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을 바라본 후 자신의 가슴을 향해 망설임 없이 칼을 꽂아 넣었다.

콰직.

곧 그녀의 가슴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번져나갔다.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들려온 이질적인 목소리에 놀란 루의 시선이 가슴에 닿기 직전의 칼을 맨손으로 잡아챈 사람에게로 향했다.

뒤로 떠오른 달빛을 닮은 남자, 지독한 루의 냄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 흰색의 성복을 입은 그. 그는 젠의 유파시드, 파벤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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