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제4장. 르베이나 (51)
“내가 떨기는, 루도 참.”
떨리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사나가 애써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손의 떨림은 생각처럼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는 생각에서 오는 어떤 의문 때문에.
칸의 서신을 가로채 아를과 디온 기사단을 궁지로 몰아넣은 디오니스 내의 첩자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나 역시 후벤과 르베나가 이 문제로 고민하는 걸 여러 번 지켜보았다.
하지만 머리를 모아 고민을 해도 칸이 르베나의 생부라는 것, 가짜 ‘다니아’에 그가 추적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알 정도의 사람은 그녀의 최측근밖에 없었다. 그 중 르베나를 배신할 만한 사람은 없었고 르베나는 그런 가정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루는 왕녀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의심 대상에서 제외됐어. 왕녀님께서 중요한 회의에는 참석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시녀가 자신도 언제나 헷갈리는 파벤더의 이름을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르베나는 그런 정보를 회의에 참석시키지도 않은 루가 알게 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꽉 잡은 주전자의 손잡이를 다시 한번 바라본 사나가 순식간에 그것을 들어 올렸다.
치이익--!
하지만 루에게 향했어야 할 주전자 속 뜨거운 물은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자신을 향하는 뜨거운 주전자의 입구를 맨손으로 잡아 챈 루 때문이었다.
“……!”
경악할 광경에 사나가 눈을 크게 뜨자 자신의 손이 데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씨익 웃은 루가 주전자를 곧장 내팽개쳤다. 그 탓에 베이지색의 러그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주 잠깐의 적막. 사나가 곧 겁에 질린 얼굴로 루를 바라보았다. 이에 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을까?”
모든 걸 생략한 물음이었지만 사나는 루가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있었다.
“말했잖아. 파벤더인가 하는 사람의 이름의 이름은 나도 항상 헷갈린다고.”
떨리는 두 팔을 뒤에 있는 선반에 겨우 의지하는 사나에게 루의 시선이 닿았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시선이. 곧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인 루가 말했다.
“멍청한 시녀인 줄만 알았더니 괜히 후작 부인이 된 게 아니네?”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루의 신랄한 말에 사나가 너무 놀라 쉽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직도 어떤 모습이 진짜 루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밝은 기운이 가득하던 루와 지금의 루. 곧 루가 사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그녀의 말과 태도에 위협을 느낀 사나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자 루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아쉽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재워서 데려가려고 했더니. 게다가 내가 가져온 차와 쿠키는 먹지도 않고… 아!!”
순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놀란 얼굴로 사나를 바라본 루가 곧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일부러 안 먹은 거야? 그래서 헬리오도 내보내고? 응, 응?”
광기로 번들거리는 루의 눈을 마주 본 사나가 지지 않으려 애써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래. 왕녀님께서 항상 주위를 의심하라 하셨거든. 비록 그게 몇 년간 왕녀님을 모신 네가 될지는 몰랐지만.”
사나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루가 그녀에게 성큼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언제나 자신의 사람에게는 미련할 정도로 착한 왕녀님이시지, 그분은. 하지만 그분도 모르셨을 거야. 항상 밝고 착한 시녀 루가 몬스터도 재울 수 있는 약으로 후작저를 지키는 아벨디온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을 모두 재우고…….”
한 걸음 더 다가선 루의 눈에 두려움에 떠는 사나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가득 찼다. 곧 사나의 갈색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매만지며 루가 이어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시녀와 그 시녀가 아끼는 아이를 인질로 내세울 줄은 말이야.”
루의 말에 사나가 소리를 치려는 순간. 루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사나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져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듣기만 해도 한기가 돋을 정도의 목소리가 르베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도 태연하게 씩 웃은 루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나의 목에 가까이 대자 사나의 목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나……!”
사나의 피를 보고 르베나의 눈은 더 차가워졌으며 놀란 후벤은 사나를 구하기 위해 루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루가 좀 더 깊이 사나의 목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아요? 전 베이라도, 세츠도 아닌데 손가락 하나로 누구를 죽일 수 있다는 게.”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무기질적인 눈으로 웃고 있는 루의 모습이 모두에게 낯설었다. 사나 역시 그런 루를 여전히 낯설어하면서도 다가오려는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후벤, 오지 말아요! 루의 손가락이… 검처럼 날카로워요.”
“이야, 정말 잘 알고 계시죠? 똑똑한 분이에요, 사나 님은. 그럼… 사나 님께서 지금 상황을 왕녀님께 설명드려 보시겠어요?”
루의 말과 날카로운 손가락의 감촉을 느낀 사나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저택의 모든 이들과 아벨디온이 루가 가져온 약이 든 음식을 먹고 잠들어 버렸어요, 왕녀님.”
르베나에게 후작저의 상황을 차분하게 잘 전달한 사나가 곧 옆에서 떨고 있는 헬리오를 한번 살피고는 눈을 또렷하게 뜨며 말했다.
“저희는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아시겠지만 그 첩자가… 루입니다.”
“큭큭… 뭐가 괜찮다는 거죠?”
사나의 말이 너무 우습다는 듯 웃어젖힌 루가 사나의 목에 더욱 깊이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사나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헬리오의 놀란 눈이 사나의 목에서 흐르는 더 많은 양의 피를 향했다.
“사나!!!”
그 모습에 절규하는 후벤의 목소리가 막사 가득 퍼져 올랐다. 하지만 그 많은 세츠도, 르베나도, 심지어 루드바하도 함부로 루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건 파벤더의 실드인가?”
루의 몸 주위로 단단한 실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루의 주변을 보며 르베나가 서늘한 어조로 묻자 여느 때처럼 밝은 목소리의 루가 답했다.
“맞아요! 우리 파벤더 님의 실드예요. 이미 아시겠지만 이걸 건드리는 순간 이 여자와 헬리오의 목은 저—리로 날아갈 거예요!”
루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루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에. 흑마법을 빌린 파베던의 실드는 가늘고 빽빽한 가시처럼 루의 주변을 둘러싸며 사나와 헬리오의 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한번 건드려 보라는 듯.
실드와 자신을 보며 당황에 젖어있는 모두를 둘러보며 루가 생긋 미소 지었다.
“하… 모두 좋아했는데. 사실 저도 제가 이렇게 왕녀님의 곁에 오래 있을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정이라도 들어 버렸나? 크큭.”
시종일관 재밌다는 듯한 루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 말은 처음부터 네가… ‘보토니에’의 사람이었다는 건가?”
르베나의 물음에 행복하다는 듯 웃어 보인 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왕녀님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저는 이미 파벤더 님의 사람이었어요. 거지 같은 드록 왕자에게 손이 잡혀 있던 순간에도요.”
들려온 루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한차례 흔들렸다. 애초에 루를 자신의 옆에 두게 된 계기가 그때의 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계산된 거였다니.
르베나의 시선이 더 어둡게 가라앉는 걸 바라보던 루가 말했다.
“왕녀님께서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란 걸 익히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멍청한 놈을 이용하면 가장 빨리 왕녀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조금만 알짱대니까 바로 손목을 낚아채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그때부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아세요?”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루가 소중한 추억이라도 되새기듯 하는 말은 모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루가 도착했다고?”
손에 묻은 선혈을 채 닦지도 않은 파벤더가 묻자 그 옆에 긴장한 채 고개를 떨군 세츠가 답했다.
“네, 방금 정찰을 돌고 온 베이라가 보았답니다. 루 님께서 시녀와 아이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진입하는 걸 보았다고요.”
그의 말에 파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츠가 젖은 수건을 내밀며 조심스레 말했다.
“손에 피가 묻으… 셨습니다.”
그가 내민 수건을 한 번 본 파벤더가 피식 웃자 그 모습을 본 세츠가 공포에 떨리는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파벤더의 옆, 보고를 올리러 왔다가 그에게 마력이나 신력이 빨린 무수한 이들의 시신으로.
“너도 저렇게 될까 무서운가?”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하도록 들려온 파벤더의 음성. 세츠가 곧 파벤더를 마주 보며 말했다.
“모든 세츠들을 어긋난 정의에서 풀어주실 분이 아닙니까. 영광… 으로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뭔가를 각오하듯 눈을 감았다. 파벤더의 시선이 꼭 감은 그의 눈과는 달리 자잘하게 떨리는 그의 손에 닿은 순간이었다.
“푸하하하하! 됐다, 이미 충분히 취했으니 너까지 저리 만들 필요는 없지. 그것보다, 일의 진척은 어디까지 됐느냐?”
시원하게 웃어젖히는 파벤더의 모습이 더 두려운지 잠시 머뭇거리던 세츠가 떨리는 입을 겨우 열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답변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파벤더가 그제야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가 보아라.”
이제 막사를 떠나도 된다는 파벤더의 명령에 내 긴장하고 있던 세츠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빠르게 발을 재촉하며 떠나는 세츠의 뒷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파벤더가 곧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선명한 금빛으로 피어오르던 신력이 곧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해골처럼 늘어져 있는 시신들에 향해 가더니 그것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이윽고 차분한 얼굴로 멀리 디오니스의 남쪽 국경을 바라본 파벤더가 중얼거렸다.
“순수한 유파시드의 힘만으로는 밀린다니… 크크… 재밌네, 재밌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웃었냐는 듯 그의 눈이 시린 분노로 활활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힘은, 그리고 나의 루타는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크큭, 크크크크크.”
작게 시작된 그의 웃음소리가 막사를 벗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