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29화 (229/276)

229화

제4장. 르베이나 (49)

사방으로 피어오른 르베나의 마력이 선연한 분노가 되어 ‘보토니에’의 진영을 휘저었다.

“막아!! 모두 막아!!”

한 흑마법사의 외침을 선두로 모든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가까스로 실드를 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파벤더도 순식간에 돌변한 매서운 눈길로 르베나를 노려보았다.

“설마 그깟 마력 따위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수천 명의 흑마법사가 만들어 낸 실드 위로 파벤더가 선명한 실드를 덧씌웠다. 하지만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그대로 파벤더의 신력을 뚫듯 전진하자 파벤더의 얼굴에 얼핏 조소가 어렸다.

“방어와 치유는 세츠들의 특기라 할 수 있지. 하물며 유파시드인 나라면 어떨까?”

파벤더가 한 번 더 비웃으며 미소 짓는 순간, 르베나의 마력이 더는 가지 못하고 막혀 버렸다. 그 반동에 의해 르베나가 뒷걸음질 쳤다.

탓……! 그 걸음에 맞춰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받아내는 포근함이 등에 다가온 건 순식간이었다.

“둘이라면 조금 다르겠지.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공격과 저주에 있어 베이라를 따라올 사람은 없으니.”

르베나를 자신의 품에 받은 칸의 전신에서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엔 스치기만 해도 뺨에 생채기가 생길 정도의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그 바람이 르베나의 불꽃에 닿자 그것이 더 강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가자, 르베나.”

칸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동시에 비슷한 색을 띤 두 사람의 마력이 파벤더의 실드를 강타했다.

콰과광……!!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파벤더의 실드가 산산조각이 나 깨져 버렸다. 그 순간 파벤더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공격해!! 죽여 버리란 말이다!!”

그의 외침에 ‘보토니에’의 모든 흑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전개했다. 훈련이라도 한 것인지 동시에 쏟아지는 수천 명의 공격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번개 같았고 여기에 파벤더의 신력이 더해지자 세상이 온통 환해질 정도의 빛이 공격이라는 이름으로 디오니스의 진영을 빠르게 향했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위력의 공격에 다니아 기사단 모두가 긴장한 채 굳어 버렸다.

하지만 르베나와 칸, 루안과 유안은 흔들림 없이 모두의 앞에 섰다. 그리고 도망가지 않은 베이라들과 함께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수십 겹의 실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보토니에’의 공격 마법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난폭했다.

콰과광……!!

“무리… 입니다! 너무 강해요!”

정면으로 맞부딪힌 ‘보토니에’의 공격이 생각 외로 강한 탓에 점점 뒤로 밀리는 발에 힘을 주며 맥스가 외쳤다. 파벤더의 말대로, 유파시드를 비롯한 수천 명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베이라들의 실드는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니아를 제외한 디오니스 마법사들의 수는 고작 200여 명의 베이라와 르베나 일행 정도. 명백한 숫자의 차이가 빗어낸 공백을 메꾸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그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려 힘을 주며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요!”

그리고 자꾸만 밀리는 자신의 발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목소리를 키웠다.

“아벨디온!!!”

허공으로 르베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그곳에 수백 명의 검기가 더해졌다.

차자작!!! 마치 한 명이 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아벨디온이 뿜어 낸 색색의 검기가 디오니스의 실드에 힘을 실어 주었다. 탁. 순간 르베나의 뒤에 버티듯 선 다한과 아를의 강인한 몸이 그녀가 더는 밀리지 않도록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 줬다.

하지만 상대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유파시드라는 칭호를 얻은 파벤더.

“젠장……! 이대로면 국경이 뚫립니다!”

사정없이 밀려나며 뒤에 있는 국경을 바라본 맥스의 외침에 모두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휘이잉---! 그러나 그 순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르베나는 모두에게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는 다른 이들과 달리 조금의 조바심도, 불안도 엿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순간 사위를 감싸는 바람의 세기가 점점 강해졌다. 이에 질끈 눈을 감은 루안이 버거움을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왕녀님, 더는 무리입니다. 국경을 봉쇄해야 합니다! 가스트님께 어서 연락을……!”

초조함과 다급한이 섞인 루안의 외침. 그 목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르베나는 조용히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말투는 지금 마지막 힘을 내는 모두를 다독이듯 부드러웠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믿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저희에게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르베나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한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사상 가장 강한 유파시드의 칭호를 얻은 또 다른 세츠가.”

콰과광……!!!

광활하게 폭사하기 시작하는 금빛 물결이 모든 디오니스의 앞을 단단한 방패처럼 가로막았다. 그리고 뒤이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곧바로 자신의 황제를 따라 광활한 세츠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루시드와 룩센 공작 그리고 천 명에 가까운 성기사들의 검기와 세츠들의 실드가 금빛 물결과 함께 마치 하나의 장벽처럼 펼쳐진 것이다. 이에 ‘보토니에’ 진영에서 수많은 비명과 함께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실드가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모두 잠시 물러서라!”

그리고 분노한 파벤더의 외침과 동시에 ‘보토니에’의 모든 흑마법사와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 * *

“당분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보토니에’ 진영을 정찰하고 온 한 세츠의 말에 함께 다녀온 맥스가 말을 이었다.

“파벤더 님… 아니 그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방금의 공격으로 상대편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의 보고에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말했다.

“일단은 모두 진영을 유지하고 기다리도록 하죠. 다만 오후라 다들 지쳤을 테니 음식과 물을 충분히 공급하고 다친 기사들이나 베이라들은 후방으로 빼 치료부터 합니다. 다만 세츠와 베이라로 구성된 정찰병을 교대로 보내 상대 쪽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보이면 보고하도록 해주세요.”

르베나의 명령에 그들이 물러나자 국경 앞 가장 큰 막사에 모인 사람 중 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흑마법으로 생명을 연장해도 그의 나이가 벌써 90이 넘었습니다. 일반 유파시드들의 수명이 100년이 훌쩍 넘는다고 해도 이런 전쟁에서 그만한 힘을 받아내기란 무리였을 겁니다.”

칸의 답변에 바흐란 왕자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 예상도 없이 왔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루드바하 님과 루시드 님을 보고 조금 놀란 게 아닌지…….”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루드바하와 루시드를 향했다. 조금 전 그들이 나타나자 파벤더의 신력이 눈에 띄게 동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되는 시선에도 가볍게 웃어 보인 루시드는 옅은 미소까지 띄며 말했다.

“모두 들으셨겠지만, 저 역시 호적에만 올려주신 아버지라 그를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분 역시 가문을 버리고 ‘보토니에’를 선택했을 때부터 모든 과거를 저버렸을 겁니다.”

주위를 둘러보다 루드바하와 시선을 마주친 루시드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정말 그의 신력이 동요했다면 그것은 저희의 존재 때문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예상하지 못한 젠의 협력에 놀란 것일 테죠. 그가 유파시드일 때만 해도 신마전쟁이 한참이었으니 세츠가 디오니스를 돕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루시드의 얼굴과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편안하게 들려와 그의 진심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흐란 왕자만은 그의 말에 작은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동안 ‘보토니에’를 지휘한 그라면 저희 간의 교류도 잘 알 텐데요.”

바흐란 왕자의 말에 몇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바하가 그에 대해 답했다.

“신마전쟁이 끝나고 교류를 한 것과 타국의 전쟁에 참여하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요.

단순히 평화 위에 오고 간 교류는 서로 간 불이익이 없지만. 디오니스의 전쟁에 젠이 개입한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죠.”

잠시 르베나를 바라본 루드바하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들이 ‘다니아’를 얻게 된다면 다음 공격지가 젠으로 바뀔 테니 우리가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겠지요. 애초에 유파시드는 모든 정의에 앞서 젠과 세츠를 지키는 존재입니다. 그런 제가 그 모든 걸 놓고 수백 년간 싸워 왔던 디오니스를 지키려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사실 그게 파벤더가 가진 생각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 모두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마전쟁이 끝난 지 이제 20여 년.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를 따라잡기에 그의 생각은 너무 오래전에 머물러 있다.

그때, 르베나를 계속 주시하던 루드바하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르베나, 괜찮습니까?”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몸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시드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칸을 향해 말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텔레포트를 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지체되었습니다.”

루시드가 정말 미안한 얼굴을 하며 말하자 칸이 언제나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아주 적절한 때에 와주셨는걸요. 그리고 와주신 그것만으로도 저희 모두가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천여 명의 세츠와 성기사. 그리고 루드바하의 힘이 파벤더 진영을 순식간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저 멀리 멀어진 ‘보토니에’를 보며 디오니스도 겨우 숨돌릴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그들의 참전만으로 디오니스는 벌써 큰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다치지 않았습니까, 르베나!!”

그 순간 모두가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친 루드바하의 목소리에 칸과 아를, 바흐란이 덩달아 르베나에게 달려왔다.

“르베나, 어디가 다친 것이냐!”

순식간에 검붉은 마력으로 자신의 손을 감싼 칸이 물었다.

“어디를 다친 거야!”

가문에서 사들인 온갖 포션을 꺼내 든 아를이 물었다.

“거 봐! 앞에 나서지 말라니까!?”

쓸 줄도 모르는 신력부터 꺼내든 바흐란 왕자가 물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둘러본 르베나가 루드바하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말했다.

“생채기가 난 거야. 하-.”

동시에 네 사람의 시선이 르베나의 뺨에 난 작은 생채기로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네 사람 모두 자신이 치료하겠다며 르베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본 루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에 선 룩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저분이 내 아드님이라는 게 요즘처럼 부끄러울 때가 없습니다. …룩센 공작님?”

하지만 룩센 공작은 루시드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저도 저 아이가 제 딸이라는 게 요즘처럼 당황스러울 때가 없습니다.”

한숨을 쉬며 대답한 룩센 공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루시드의 얼굴에 순간 실소가 흘렀다. 그곳에 젠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텔레포트 한 커다란 짐가방을 헤치고 몰래 빠져나오고 있는 루안 공녀가 보였기 때문이다.

신력이 없어 절대 오면 안 된다는 공작의 당부를 무시하고 도대체 언제 몸을 숨긴 건지. 대담하다고 해야 하는지, 철이 없다고 해야 하는지. 룩센 공작은 순간 어질해진 머리를 붙잡았다.

“공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리고 조금 전 르베나를 향한 루드바하보다 더 큰 목소리가 언제나 점잖던 유안에게서 흘러나왔다.

이에 루드바하의 신력과 칸의 마력, 아를의 포션과 바흐란의 이상한 신력이 모두 닿아 있던 르베나와 네 사람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을 독차지하게 된 루안 공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모두 고생이 참 많으시네요.”

난데없이 나타난 루안 공녀의 예의 바른 인사에 어색한 적막이 사위를 감싼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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