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제4장. 르베이나 (48)
“…큭!”
순간 파벤더의 입을 통해 참을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를 신호로 르베나는 곧바로 진영으로 들어가 폭발하려는 베이라들에게 강한 실드를 걸며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 어서!”
하나둘 자폭하는 베이라들을 보며 당황하던 맥스가 르베나의 외침을 듣고 덩달아 소리쳤다.
“왕녀님의 명령대로 모두 물러나라! 누가 터질지 모르니 서로 떨어져!!”
그가 외치자 모든 베이라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서로를 경계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으악!!”
하지만 아직도 폭발은 멈추지 않았는지 몸 안에서 솟구치는 마력의 폭주로 괴로워하는 베이라들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사정없이 들려 왔다.
그들의 비명을 들은 르베나는 곧바로 다가가 그들의 마력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여러 겹의 마법을 걸고 또 걸었다. 고통에 차 울부짖는 그들의 얼굴이, 당황한 표정이, 그럼에도 살려 달라 르베나를 향해 뻗어 오는 그들의 손이, 르베나의 두 눈에 똑똑히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계속된 비명에 상황을 눈치챈 칸도 어느새 르베나와 함께 베이라들의 몸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다섯, 일곱, 열. 어느새 오십 가까이 되는 베이라들의 몸이 르베나와 칸의 금제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안에서 폭발하려는 마력과 밖에서 강제로 마력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마법 사이에서 그들이 느낄 고통은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놀란 맥스마저 다른 베이라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때 들려온 건 르베나의 대답이 아니라 신이 난 듯한 파벤더의 목소리였다.
“‘보토니에’의 꼭두각시들이여, 터져라!! 너희들의 몸을 터뜨려 디오니스를 죽이란 말이다! 크큭, 크하하!!”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베이라들이 르베나와 칸의 금제에 고통스러워하다가는 결국 그 안에서 하나, 둘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디오니스의 기사들이 황급히 몇 걸음 더 물러섰고,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에 베이라들은 고통 속에 절규했다.
“로만, 안돼!!”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료를 부르며 다가가려는 베이라를 다른 베이라들이 가까스로 붙잡았다.
“가지 마, 가면 죽는다고!!”
그런데도 그는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려고 온 힘을 다했다.
“놔!! 놓으라고!! 로만이야! 내 죽마고우라고… 흑, 놔!!!”
하지만 그도 잠시. 곧 로만이라 불린 베이라도 끔찍한 비명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흡사 아수라장이 된 전쟁의 한 가운데. 르베나의 눈이 충격과 공포,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 다.
‘이걸 막으려고. 이걸 막으려고 분명 아한에게 부탁한 건데……!’
르베나의 생각을 짐작이나 한다는 듯 허공에 떠 르베나를 바라보던 파벤더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들 자신조차 자신이 ‘보토니에’의 꼭두각시가 된 줄 모르고 죽어갔을 테니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르베나 왕녀여.”
그의 소리에 르베나가 모든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파벤더가 더 짙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모두 암시에 걸린 자들이거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심지어 자폭의 마법조차 내 신력을 어느 정도 가까이에서 느껴야 발현되게 해 놨으니 무슨 수를 써도 알아낼 수가 없었을 거란 말이다. 크크큭!!”
그의 말에 모든 베이라들의 눈에 두려움이 새겨졌다. 어쩌면 나도. 어쩌면 저 사람도. 자신도 모르는 새 ‘보토니에’의 암시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 순간 베이라들 중 몇몇이 소리를 지르며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들이 벗어나려는 바람에 잘 유지되어 있던 균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터져나가는 베이라들의 폭발에 디오니스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도.’
그게 불러오는 파장과 공포는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칸과 르베나, 유안과 다른 베이라들이 최대한의 실드를 쳤지만 그래도 다치는 이들은 나왔고, 다들 그 소동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전장의 한가운데를 가른것은. 그 마력에 아군이 닿으면 놀라 뒷걸음질 쳤고 ‘보토니에’가 닿으면 괴로움에 소리치며 몸이 타들어 갔다.
뜨거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검붉은 마력.
“…르베나!!”
“르베나.”
놀란 칸과 아를의 부름마저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마력이 지나갈 때마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수천 명의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분노로 가득 찬 온몸의 떨림을 참으며 르베나가 파벤더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이유도 모른 채. 고통과 두려움 속에 죽어 나간 베이라들. 이전 생의 전쟁에서도, 이번에도 그들은 베이라라는 이유만으로, 르베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적당히 이용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 죽었다.
“네놈을 찢어 죽이고야 말 거야.”
르베나의 눈이 동료들의 폭발에 울분을 토하는 베이라들을 향했다. 동시에 온몸에서 스멀스멀 마력이 한번 더 피어올랐다.
“네놈을 똑같이 만들고야 말 거야.”
르베나의 시선이 이번에는 폭발한 베이라들의 주위에 흩어진 다치고 죽어버린 디오니스의 기사들을 향했다.
분노는 선연한 차가움이 되어 주위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이런 짓을 한 너를. 두 번이나 나에게 이런 끔찍한 감정을 느끼게 한 너를.”
르베나의 두 눈이 어둡게 빛났다.
“죽여 버리겠어.”
사방으로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폭풍처럼 날아올랐다.
* * *
“이건 못 보던 디저트들이네?”
루가 가져온 디저트들을 집사가 차와 함께 내오자 이를 본 사나가 물었다. 개중에는 처음 본 모양의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루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길어지면 중간에 휴전 비슷한 시간이 생긴데요! 그럴 때 빠르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게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루의 말에 한번 고개를 끄덕인 사나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오는 길이 위험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국경 안은 아직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야. 전쟁은 어떻게 되고 있니?”
사나의 물음에 루가 걱정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렸다.
“잘은 모르겠어요. 새벽부터 시작되긴 했는데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가니까요. 그 ‘보토니에’인가 거기 대장의 목소리와 르베나 왕녀님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나서는 온통 고함뿐이거든요.”
루의 말에 사나가 포크로 작은 마들렌 하나를 찍으며 물었다.
“파렌더? 그 흑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어?”
사나의 말에 마구 고개를 끄덕인 루가 말했다.
“네! 그 파벤더 님이요! 유파시드라고 하시는! 막 공격하라고 그랬나? 아무튼, 마법으로 목소리를 키운 것인지 왕궁에까지 들리더라니까요!!”
루의 말을 듣고 삽시간에 얼굴이 어두워진 사나가 포크를 놓았다. 그리고 옆에서 우유를 홀짝이는 헬리오를 보며 말했다.
“헬리오, 어린 네가 듣기엔 다소 험한 내용이니 집사를 따라 다른 방에 가서 놀고 있을래?”
사나가 묻자 잠시 눈치를 보던 헬리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사나를 보고 루가 작은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며 말했다.
“헬리오, 이거 가져가!”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을 헬리오에게 내밀며 루가 다정하게 말했다.
“주방장님께 내가 따로 부탁했어. 너를 위해 만들어 달라고. 헤헤, 집사님이랑 함께 먹으면서 놀아!”
루가 건넨 것을 보고 환하게 웃은 헬리오가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사나가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으며 집사를 불렀다.
“킬리언!”
자신의 부름에 금방 모습을 드러낸 집사에게 사나가 헬리오를 보내며 말했다.
“헬리오와 별관의 놀이방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 줘. 거기에 새로 온 나무 목마가 있거든. 아이가 좋아할 거야. 그리고 헬리오.”
어느새 집사의 손을 잡은 헬리오에게 사나가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은 이따 저녁에 먹자. 요즘 단것을 너무 많이 먹었으니.”
조금은 엄격한 사나의 말에 아쉬운 눈빛을 하던 헬리오가 선뜻 다가와 초콜릿을 티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다시 집사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사나가 웃으며 아이를 칭찬했다.
“장하구나. 대신 이따 저녁을 먹고 나서 꼭 먹자. 알았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헬리오를 보고 사나가 집사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아, 그리고 별관으로 가는 길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홍차를 아벨디온 기사님들께 가져다 드렸으면 좋겠네.”
언제나 아랫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사나이기에 집사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곧장 차를 내리라고 해, 헬리오 님과 함께 드리러 가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집사가 곧장 헬리오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이에 루를 향해 웃어 보인 사나가 대신 인사를 전했다.
“헬리오를 위해 따로 챙겨 주어서 정말 고마워, 루. 혹시 가져온 디저트는 이게 다니?”
사나의 말에 루가 싱긋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니요! 넉넉하게 가져와서 밖에서 호위 중인 아벨디온 기사님들께 드렸어요! 올라오기 전에 후작저의 시종, 시녀들도 먹으라고 나눠 줬고요! 헤헤. 저 잘했죠?”
루의 말에 잠시 멈칫한 사나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 끝에 있는 긴 선반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홍차가 있는데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물어봤어.”
사나가 선반 아래에 있는 문을 여는 모습을 보고 루가 서둘러 말했다.
“이미 차가 있는데 힘드시게 뭘 또 내리세요!”
번거로운 일을 말리는 루의 말에도 사나는 찻잎을 꺼내 찻잔에 넣었다.
“이게 차 맛이 정말 좋아서. 아휴, 그나저나 내가 요즘 나이가 들었는지 자꾸만 말을 틀리게 해. 그거 때문에 후작님과 헬리오가 자주 놀리고.”
사나의 말에 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사나 님이요? 무엇이든 잘 기억하시잖아요!”
루의 말에 다시 허리를 펴고 옆으로 이동해 주전자에 물을 올린 사나가 말했다.뒤로 돌아선 사나에게서 살짝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그랬나. 근데 요즘은 더 그러네. 그 파벤더인가 뭔가 하는 흑마법사도 자꾸 파렌더라고 불러서 후작님이 웃으셨거든.”
주전자가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며 울자 사나가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근데, 루. 새삼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부으며 사나가 이어 말했다.
“어떻게 회의에 한 번도 참석 하지 않은 네가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파벤더의 이름을 잘 아는 걸까?”
루에게서 뒤돌아 말을 하는 사나의 얼굴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고 차갑게 굳은 눈빛만이 보였다. 곧 사나가 곧바로 티 테이블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언제 다가온 건지 사나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루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움찔했다. 그런 사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사나 님.”
놀라는 와중에도 주전자 손잡이를 놓지 않고 꽉 쥔 사나의 손을 한 번 본 루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손은 왜 그렇게 떠세요?”
사나가 떨리는 눈을 들어 앞에 선 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루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 짓는 건 그녀의 입술뿐. 루의 눈매는 이제껏 보지 못한 서늘함으로 까맣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