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제4장. 르베이나 (47)
“황홀해. 수많은 디오니스와 맞붙는 ‘보토니에’라니! 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어 재끼는 파벤더를 본 르베나의 시선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 순간 파벤더가 뚝, 웃음을 그치더니 매섭게 외쳤다.
“가라!! 가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다니아’를 찾아와라!”
파벤더의 외침과 동시에 ‘보토니에’의 마법사들과 몬스터가 디오니스를 향해 달려왔다.
“아벨 기사단, 전원 준비!”
그 앞에 선 다한의 외치자 수백의 아벨 기사단이 검기를 내뿜는 검을 치켜들었다.
“디온, 모두 검기 준비!”
어두운 금안을 빛내며 아를이 외치자 수백의 디온 기사단 검에서 검기가 타올랐다.
쾅……!! 곧바로 다가온 ‘보토니에’ 마법사들과 그들의 검기가 맞부딪히며 엄청난 폭발음을 내었다.
게다가 ‘보토니에’의 약을 먹은 마법사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몬스터와 동물, 심지어 물고기의 형상을 한 마법사들이 어두운 힘으로 쏟아내는 마법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를의 검에서 피어오른 금빛의 검기는 다가오는 모든 흑마법들을 내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옆의 다한이 뿜어 내는 갈색의 검기 역시 강한 힘으로 앞을 그으며 큰 획의 길을 열어냈다.
“가자!! 단장들이 뚫어 준 길이다!”
룬의 외침과 동시에 그 길을 타고 아벨디온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쇄도하는 흑마법을 자신의 검으로 방어하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단 한 걸음이라도 ‘보토니에’를 디오니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기합을 내지르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랑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도, 디오니스를 끊임없이 외치는 사람도. 그들 모두가 단 하나의 마음으로 흑마법을 향해 돌진했다.
“싸우자! 그리고 지키자!!”
어느 기사의 외침이 마치 강력한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가 그 소리에 힘을 내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니아 기사단 역시 그들의 날카로운 검을 치켜들고 이미 배웠던 몬스터들의 약점을 상기하며 하나둘 빼곡히 들어선 몬스터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간혹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그들을 향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난 검붉은 마법이 그들을 보호했기에 더 안심하고 돌진할 수 있었다.
휙-!! 순간 눈앞의 몬스터를 베어낸 후벤에게 다가온 흑마법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칸 님!”
허공에서 떠오른 채 필요한 순간마다 방어 마법을 지원해주는 칸에게 소리친 후벤이 앞으로 크게 도약하며 말했다.
“야, 그거 내 거야!!”
도망가는 몬스터를 쫓으며 소리치는 라웅도.
“죽이는데 네 것 내 것이 어딨냐!!”
그를 피해 자신에게 도망쳐온 몬스터를 내리치는 바흐란 왕자도.
“이건 제가 막겠습니다!”
엄청난 화력의 흑마법을 담담한 모습으로 막아서는 루안도.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그 옆에 실드를 하나 더 치며 루안의 곁에 붙어서는 유안도.
모두가 이 순간 디오니스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르베나 왕녀?”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라 르베나의 앞을 막은 파벤더의 손에서도 순간 금빛의 신력이 화려하게 뻗어 나왔다. 그 힘을 보고 아주 잠시 움찔 몸을 떤 르베나가 곧바로 광활한 실드를 펼쳐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파벤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나도 밑에 저 마법사들처럼 흑마법을 쓸 줄 알았나? 틀렸네. 마음먹기에 따라 쓸 수도 있지만… 난 여전히 정의를 지키는 세츠이고 유파시드의 금빛 신력을 쓰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르베나 왕녀?”
순간 파벤더의 손에서 나간 금빛의 신력이 조금 더 힘을 키워나갔다. 어느새 표정을 갈무리하고 조금 더 짙은 마력을 뿌리는 르베나를 보고 한번 웃은 그가 이어 말했다.
“이 모든 게 신이 허락한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이네.”
말을 마친 파벤더의 손에서 다시 한번 금빛의 신력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루드바하의 것보다 더 순수해 보였고 더 광활했으며 더,
“…강하다고?”
르베나의 떨리는 시선이 다가오는 그의 금빛 신력을 바라보았다.
* * *
“사나 님. 다들 괜찮을까요?”
멀리서 들려오는 엄청난 함성과 연이은 폭발음에 헬리오가 몸을 떨며 사나의 품을 파고들었다. 사나가 그런 헬리오를 꼭 안고 다독이며 말했다.
“그럼. 다들 괜찮으실 거야. 왕녀님도, 아를 경과 다한 경도, 가스트 님과 아한도, 그리고 후작님도… 모두.”
사나가 떨리는 음성에 힘을 주어 말하자 그녀를 올려다보던 헬리오가 말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렇겠죠? 꼭 그럴 거예요. 나 아빠는 처음 생긴 거란 말이에요. 헤헤.”
벽에 걸려있는 후벤과 사나의 그림을 보고 행복하게 웃는 헬리오에게 사나의 상냥한 시선이 머물렀다. 동시에 사나가 아이를 다시 한번 제품에 안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왕녀님께서 무사하시길. 후작님께도 무사하시길. 제발.’
몇 번쯤 이 같은 소원은 빌었을까.
“마님, 궁에서 시녀가 왔습니다.”
조심스레 노크하고 들어온 집사의 말에 사나가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궁에서? 오늘 같은 날 누가 왔단 말인가.”
조금은 경계 어린 태도로 묻는 사나의 말에 언제나처럼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저예요, 사나 님!”
방문 사이로 불쑥 고개를 내민 그녀를 보며 사나가 묘한 감각에 잠시 굳어 있던 목을 울려 소리를 낸 건 금방이었다.
“…루? 어떻게 지금. 지금 전쟁이 시작된 거 아니니?”
사나의 말에 루가 씨익 웃으며 손에 있는 바구니를 흔들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왔어요! 너무 무섭기도 해서 같이 디저트나 먹을까 하구요. 현재 국경 안은 그래도 안전하거든요.”
루의 해맑은 미소에 물든 것인지 사나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어렸다. 사나는 마음속 어딘가에 맴도는 작은 불안을 애써 떨치며 기쁜 마음으로 루를 방으로 들였다.
* * *
광활한 금빛의 물결이 디오니스의 기사들에게로 향하자 검붉은 마력이 이에 질세라 그 모든 금빛을 막아섰다. 그리고 팽팽한 두 힘의 파동에 그 아래에서 싸움 중인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이런, 우리 마법사들을 도우려던 건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군.”
차분한 태도의 파벤더가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이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다 아래쪽 전장에 그들의 마법이 전해지지 않게 실드를 쳤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 속, 르베나는 상상보다 훨씬 순도 높은 파벤더의 신력에 집중했다. 곧 그녀의 얼굴을 본 파벤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혼란스러워 말길, 르베나 왕녀. 내가 흑마법에 물들지 않고도 이렇게 강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파벤더의 말에 르베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의 신력에 관한 게 아닌데? 그 거짓말의 간극에 대해서지.”
르베나의 말에 파벤더가 히죽 웃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화 중에도 두 사람의 힘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당신. 아무리 젊었을 때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지만 지금 아흔이 넘은 나이 아닌가?”
르베나의 말을 잠시 곱씹던 파벤더가 아! 하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르베나는 루드바하만큼이나 젊고 수려한 얼굴의 그가 조금 불편했다. 왜냐하면.
“그런데도 그만큼 젊은 외모를 유지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많이 흡수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르베나의 눈이 순간 위험하게 빛났다.
“흑마법의 일종이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르베나에게서 강하고 거친 마력이 쏟아져 나갔다. 파벤더를 경멸하는 만큼, 증오하는 만큼, 분노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힘을 싣고서. 이에 조금 뒤로 밀려난 파벤더가 씨익 웃으며 르베나의 마력을 막아섰다. 방금 자신이 밀려난 만큼의 공간을 보며 파벤더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배었다.
그때였다. 쾅……! 파벤더의 뒤쪽에서 르베나를 향한 공격 마법이 쏟아진 것은.
제법 강한 흑마법이 그녀를 향했지만, 르베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실드를 펼치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파벤더 역시 예상치 못한 공격에 조금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뒤에 있던 ‘보토니에’ 흑마법사 하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모두 치열하게 전쟁 중인데 파벤더 님께서 너무 저 베이라를 봐주시는 거 같……!”
하지만 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파벤더의 손에서 나온 부드러운 금빛의 신력이 그의 목을 그대로 조여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불쾌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르베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가 사과했다.
“미안하군, 그대와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다니.”
고작 그런 이유로 전쟁 중에 자신의 부하를 죽이다니. 겉만 멀쩡하지 절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르베나는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 순간, 주변에서 크게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가 르베나의 귀를 때려왔다. 몬스터들의 기괴한 울음소리와 이를 상대하는 다니아들의 소리. ‘보토니에’ 마법사들의 마법과 이에 대적하는 아벨디온의 검기. 그리고 생각보다도 훨씬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수백 명의 베이라들.
서로를 겨누며 국경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과 이를 막는 자들의 치열한 전투. 그 모든 치열함과 핏빛 진영을 눈에 담은 르베나가 순간 묘한 기이함을 느낀 것이다.
‘이상해. 모든 ‘보토니에’가 국경을 뚫으려고 안달이 나 있어. ‘다니아’를 갖기 위해.
그리고 ‘다니아’를 원하는 사람은 바로 파벤더. 그런데 왜 그는 굳이 내 발만 묶어놓고 있는 거지.’
지금의 파벤더는 때에 맞지 않은 시시한 대화나 할 뿐. 르베나에게 거센 공격을 퍼붓지도 않고 있다. 적당히 그녀의 힘을 가늠하듯 견제만 할 뿐. 그는 루드바하를 제외하고 사상 제일 강한 유파시드라 불리는 자. 그런 자가 흑마법까지 쓴다면 자신의 힘으로 국경을 뚫는 게 조금 더 쉬울 텐데, 왜? 왜 그는 여기서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걸까.
르베나의 눈에 짙은 경계심이 어렸다. 그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던 파벤더의 얼굴에는 그와 반대로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그때였다.
펑! 퍼버벙……! 연쇄적인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서둘러 아래로 고개를 숙인 르베나의 눈에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한 전투의 선두에 서서 싸우던 베이라들의 몸이 폭발하는 끔찍한 장면이. 더불어 그들의 곁에서 싸우던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보토니에’의 마법사들도 폭발에 휘말려 함께 죽거나 심한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두 명, 세 명. 르베나가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들의 몸은 걔속해서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