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26화 (226/276)

226화

제4장. 르베이나 (46)

흰색의 제복에는 디오니스의 왕가를 상징하는 금장과 총 단장의 표식이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로 달려 있다. 왼쪽 어깨에는 아벨디온을 상징하는 검붉은 회오리가 다니아를 상징하는 금테 달걀을 휘감고 있는 모양의 견장을 부착해 디오니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마지막으로 검붉은 망토를 두르며 그것을 언젠가 칸이 선물로 준 루아나 꽃 보석으로 고정한 르베나의 손길은 건조했다. 거울을 보는 얼굴에는 조금의 미소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로지 적을 향한 투지와 절대로 지지 않을 각오가 새겨졌을 뿐이다.

“팅-!”

어느새 팅도 르베나가 따로 마련한 손바닥 크기의 아벨디온 망토를 두르고 위풍당당하게 그녀의 어깨에 올라섰다.

“르베나, 준비가 다 됐니?”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인기척과 함께 칸이 들어섰다. 어느새 위장 마법을 풀고 르베나와 똑 닮은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드러낸 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정말 닮았네요, 아버지하고 저.”

르베나의 말에 정말 기쁜 듯 웃어보인 칸이 말했다.

“네 미소는 루아나를 빼닮았단다. 그래서 더 예쁘지.”

따뜻한 온기를 닮고 전해진 칸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에 드디어 한 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고 함께 웃은 칸이 제법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오기 전에 둘러보니 다른 국경의 문은 모두 잘 감춰졌더구나. 내가 나서도 숨은 국경의 문을 찾는데 꽤 시간이 걸리겠어. 하지만 정말 그들이 남쪽으로만 몰릴까?”

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와 루드, 가스트와 아버지가 각각 맡아서 한 결계니까 쉽게 뚫지는 못할 거예요. 아마 저들도 이미 알고 있을 거고요. 게다가 백성들을 모두 북쪽으로 보낸 만큼 다른 곳이 뚫리면 방어가 어려우니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고.”

잠시 말을 멈춘 르베나의 시선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적인 ‘다니아’가 있는 왕궁도 남쪽 국경에서 제일 가까우니 저들도 백성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르베나의 어깨에 부드럽게 칸의 손이 얹어졌다.

“르베나, 넌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것만 기억하렴.”

긴장을 겨우 떨쳐 낸 어깨에 닿은 아버지의 따듯함. 칸의 그 한마디에 르베나의 머릿속,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르베나는 전신을 맴도는 묘한 긴장감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걱정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왕녀님, 칸님! 이거 드세요!”

그 순간, 방문을 열고 들어온 루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아직 봄이라 새벽은 추워요. 이걸로 몸 좀 녹이세요. 아, 혹시 몰라 간단한 디저트도 가져왔어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지 열린 방문으로 퍼져 오는 요리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영 음식이 당기지는 않았다.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궁 안의 모두가 냄새를 맡으면서도 식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식사 전에 전쟁이 시작될 것처럼.

오늘도 눈치가 빠른 루는 이 모든 걸 알고 르베나가 좋아하는 밀크티와 디저트를 준비했으리라.

“거기 두면 마시도록 하지.”

르베나의 말에 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꼭 드셔야 해요. 아무리 전쟁이라도 감기라도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얼른요!”

언제나 르베나의 건강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루의 재촉에 르베나와 칸이 못 이긴 척 밀크티를 마셨다.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루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 응원할게요.”

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 역시 루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네 응원대로 꼭 ‘보토니에’를 한 명도 빠짐없이 해치우고 올게.”

순간 가슴이 답답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르베나가 칸과 서로를 마주 볼 때였다.

펑-!!!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어두운 새벽의 밤하늘이 번쩍인 것은.

“시작인 것 같구나.”

동시에 칸과 르베나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 *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님께는 아니지 않습니까.”

원로들을 설득해 그들이 이제껏 숨긴 파벤더의 진짜 기록을 가져오길 기다리며 루드바하가 물었다. 함께 디오니스로 가겠다고 결정한 루시드가 염려되는 마음에서.

그러자 쓴웃음을 지어 보인 루시드가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아까 대회의실에서도 그를 아는 분들이 계셨을 텐데 모두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선 함구했지. 그 이유를 알겠니?”

루시드의 말에 루드바하가 곧장 답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그의 답변에 루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모두 이미 흑마법에 손을 댄 과거의 영광보다는 그를 해치움으로서 더 큰 영광이 될 너를 택한 거란다. 그 앞에서 오래전 인연을 들먹일 바보는 없었던 거지.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루드바하.”

루드바하의 깊은 눈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자 루시드가 다 큰 아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방계의 핏줄에서 입양되었다. 당시 파벤더께서는 혼인에 뜻이 없었지만 내 친부모님과 인연이 있어 혼자가 된 날 입양했다고 들었지.”

루시드의 눈이 오래전 어느 때를 그리듯 멀어졌다.

“사실 신마전쟁에서 친부모님이 돌아가신 방계의 돌잡이를 입양할 유파시드가 어디 있겠니.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5살 때쯤 그분이 죽었다고 하니 나에겐 또렷한 기억조차 없단다. 그래서 너도 파벤더 님에 대해 굳이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던 거겠지. 다만 내겐 언제나 또 다른 삶을 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루시드가 루드바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뿐이란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분인지 아닌지조차 난 기억하지 못하니. 하물며 그분이 온 세상을 구하러 온 참된 세츠라 하여도 내게는 아들인 네가 더 소중할 수밖에. 그러니 난 신경 쓰지 말아라, 루드바하. 난 너의 길에 방해가 되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아.”

자신을 향한 루시드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루드바하가 편안히 미소 지으며 마주 보았다. 그때 루드바하와 루시드의 시선이 나란히 방문을 향하자 곧 열린 문으로 들어온 가문의 시종들이 수많은 책을 놓기 시작했다.

“일단은 여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부터 살피자꾸나.”

루시드의 말을 끝으로 부자는 한동안 쌓여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바꾸어가며 영혼만 유지한다.’

‘쾌활한 듯 잔혹한 성정과 말투.’

‘루타 허브의 불쾌한 냄새.’

방금 읽은 글귀 중 몇 가지를 떠올리던 루드바하의 안색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파벤더와 그의 연인, 루타에 관해 숨겨진 기록을 모두 본 이후였다.

그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유파시드시여, 알아본 결과 당시 파벤더 님, 아니 그와 루타라는 여인의 관계를 가장 심하게 반대하던 원로들이… 죽었답니다. 바로 어젯밤에요.”

참혹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원로 중 하나인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루드바하가 말했다.

“원로회 분들과 가문의 방비를 더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그의 복수가 당시 두 사람을 방해하던 사람들에 이어 가문으로까지 번질 수 있으니.”

루드바하의 말에 잠시 놀라던 원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사라졌다. 아마 가문의 모두를 한데 모으고 방비를 하기 위해서이리라. 그가 사라지자 루시드를 바라본 루드바하가 말했다.

“아버님, 황궁에서 디오니스로 차출될 세츠와 성기사들을 룩센 공작이 데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부탁합니다.”

루드바하의 안색을 보고 무엇인가를 눈치챈 루시드가 곧바로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저는 곧바로 모두를 데리고 따르겠습니다.”

루시드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어머니, 아드리안에게 루드바하의 시선이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루드바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킬 순 없는 법입니다. 가세요, 유파시드. 가서 당신의 모든 걸 걸고 당신의 사람을, 정의를 지키세요.”

흔들리지 않는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루드바하의 시야가 또렷해진 순간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가문의 젊은 세츠 하나가 급하게 소리를 낸 것은.

“유파시드님! 지금 디오니스에 ‘보토니에’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아드리안이 루드바하와 루시드를 보고 서둘러 말했다.

“어서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가세요. 만약 그들이 젠을 공격한다면 우리가 지킬게요. 내 남편과 내 아들이 돌아올 이곳을.”

그녀의 말에 루시드가 아내의 이마에 소중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러고는 그녀와 다정한 눈맞춤을 한 뒤 가문의 세츠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남은 루드바하 역시 어머니, 아드리안과 깊은 포옹을 나눈 후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아들과 남편이 사라진 자리. 굳건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은 시선으로 그곳을 보던 아드리안이 비틀, 하고 그제야 잠시 몸을 휘청였다. 다가온 시녀의 부축에 겨우 발을 지탱한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히 빛나는 눈으로 빌었다.

“신이시여. 당신이 만든 이 세상의 모두를 저버리지 마세요.”

* * *

“퍼부어라. 모두가 깰 때까지. 그들 모두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까지!!”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그의 주변에서 수많은 공격 마법이 발현되었다. 색색의 신력과 마력이 빚어낸 마법들이 저마다 디오니스의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디오니스에서 날아온 수많은 색의 힘과 충돌하며 엄청난 굉음을 만들어 냈다.

펑! 퍼펑!!!

그 장관을 보며 그가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저게 아벨디온이란 기사들의 검기인가. 오, 제법 쓸 만하구나.”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끊임없이 격돌하는 마법과 검기의 대치를 보며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 것은 순간이었다.

화악---!

사방이 훤히 보일 정도로 밝은 검붉은 마력. 그 광폭하고 강한 힘이 만들어 내는 단 하나의 마법. 그 하나에 ‘보토니에’ 수백 명이 내지른 모든 공격 마법이 공기 중으로 스르륵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군 앞으로.”

그때 마법 확성기를 통해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일순 그의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긴장을 가장한 뜻 모를 희열 같기도 했고 다가올 승리에 대한 흥분 같기도 했다.

“모든 아벨디온, 최전방에서 다가오는 모든 ‘보토니에’를 즉각 사살한다.”

“아벨디온의 정의를 위해!”

그녀의 목소리에 수백 아벨디온의 대답이 하나의 음성처럼 들려 왔다.

“다니아 기사단 절반은 디오니스로 향하는 모든 몬스터를 즉각 사살한다.”

“또한, 다른 절반의 다니아는 디오니스 안에서 국경을 사수해, 이 모든 걸 뚫고 들어온 존재들을 말살한다.”

“디오니스의 영광을 위해!”

“디오니스의 영광을 위해!”

다시 한번 들려온 그녀의 날카로운 명령에 수천의 다니아 기사들이 한 사람처럼 답했다.

마치 ‘보토니에’에게 들으라는 듯 확성기를 통해 명령을 전달한 르베나의 신형이 어두운 새벽,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검붉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림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로 몇 명의 사람이 함께 떠올랐다. 칸과 루안, 유안. 제각기 다른 색으로 발하는 그들의 마력과 신력의 조화와 신비로웠다.

곧 자신 밑에 자리한 수천 명의 디오니스 기사와 상대편에 있는 수천 명의 ‘보토니에’와 수만의 몬스터를 본 르베나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 시간부터 마지막 한 명의 ‘보토니에’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피와 목숨을 내걸고 디오니스를 수호한다. 디오니스의 영원한 정의를 위하여!”

순간 새벽을 물리치며 떠오른 태양에 르베나의 모습이 별처럼 타올랐다. 동시에 디오니스의 온 대지를 울리는 수천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었다.

“디오니스의 정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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