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25화 (225/276)

225화

제4장. 르베이나 (45)

“기사들은 언제라도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시켰네. 최소한의 인원만 국경 밖에서 순찰을 돌고 있으니 자네도 한 숨자. 내일부터는 며칠을 못 잘지도 모르니.”

기사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내. 단장끼리만 공유하는 응접실에 앉은 아를을 보고 다한이 말했다. 이에 아를이 그답지 않게 잠시의 망설임 끝에 다한에게 말했다.

“다한, 친구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같은 아벨디온이 된 이후 계속 경을 붙여 부르던 아를이 친구라 부르자 다한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는 바로 아를을 보며 말했다.

“그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라 미리 말하지.”

생각지도 못한 다한의 대답에 아를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 뭔지 얘기도 안 했는데?”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아를의 말에 다한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얘기든 내일 우리는 죽지 않을 거네. 언제나처럼 아를 자네는 왕녀님만 지키다 무리하게 되겠지만.

결코, 죽지는 않을 거네. 왜냐하면…….”

다한이 아를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계획대로 생활하는 사람이고. 그런 내게 내일 내 친구를 잃을 계획이 없기 때문이지.”

다한의 말에 아를이 피식 웃었다. 그런 아를을 보고 다한이 한마디를 덧붙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무엇도 아직 포기하지 말게. 아를 자네의 삶도, 왕녀님도.”

어느새 닫힌 다한의 문을 보며 아를이 조금 놀란 눈을 떴다가는 풋 하고 웃어 버렸다.

“풋. 푸하하-!”

아를답지 않은 큰 웃음소리가 얼마쯤이나 이어졌을까. 순간 아를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마음에 안 들어. 역시 내일은 죽으면 안 되겠다.”

피식. 방 안에 들어갔지만 예민한 귀 덕에 혼자 중얼거리는 아를의 소리를 들은 다한의 입에서도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록 내일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한과 아를 어느 누구도 내일을 두려워하기보다 서툰 친구의 온기에 잠시 기대어 가는 밤을 택했다.

“사나, 헬리오.”

저녁을 먹고 난 후작저에서 후벤이 사나와 헬리오를 불렀다. 조금 긴장한 듯한 사나와 헬리오의 눈을 한 번씩 다정하게 마주친 후벤이 말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택을 벗어나지 말아요. 왕녀님께서 특별히 아벨디온을 내주었으니 여기는 안전할 겁니다. 나도…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얼핏 눈물이 맺힌 사나에게 말한 후벤의 시선이 긴장한 헬리오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헬리오, 그동안 아를 경과 다한 경에게 ‘보토니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느라 수고했다. 힘들었을 텐데… 너 역시 내일부터는 사나의 곁에 꼭 붙어 있으렴. 아, 그리고 하나만 대답해 줄래? 전쟁이 끝나면 왕녀님께서 후원을 철회하신다고 하니. 그러면, 그러고 나면… 우리 아들이 되어 줄래, 헬리오?”

후벤의 말에 놀란 헬리오의 눈이 사나를 향했다. 그러자 눈시울이 붉어진 채 미소 지은 사나가 아이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헬리오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후벤과 사나를 와락 안았다.

“흑… 흑… 네네!! 저 후작님과 사나 님의 아들이 될래요! 누구보다 멋지고 용감한 아들이 될게요!! 그러니까 후작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꼭 이에요. 그동안 사나 님은 제가 반드시 지키고 있을게요!”

헬리오의 기특한 말에 후벤과 사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불안한 내일을 앞두고 맞이한 오늘의 작은 평온을 아쉬워하면서,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면서. 따뜻한 미소가 번지는 그들의 테이블 위로 정성스레 놓인 루의 쿠키가 온기를 담은 채 함께 머물렀다.

“정말 괜찮겠니, 아한?”

전쟁을 앞두고 젠의 마법 학교에서 돌아온 가스트가 손자, 아한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가스트의 손을 꼭 잡은 아한이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날만을 기다렸는걸요. 누나를 도울 거고. 더욱 멋진 베이라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제 걱정 좀 그만하세요. 게다가 제가 전쟁에 직접 나가는 것도 아닌걸요.”

아들 내외를 떠나보내고 아한마저 전쟁에 나가겠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반대한 그가 무색하게도, 그의 어린 손자는 자신의 설 곳을 찾아 또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사나와 함께 후작저에 머물렀으면 하는 그의 마음이 속 좁아 보이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아한에게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노령인 그와 어린 아한이 무리라도 할까 싶어 르베나가 먼저 그들에게 ‘디오니스의 결계’를 지킬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명령. 예기치 못한 상황이 되면 누구도 디오니스에 들어올 수 없도록 단단히 걸어 잠가야 하는 결계를 지키란 그 단호한 지시.

“이 늙은이와 너에게 내린 명령까지도 이다지 따뜻해서야.”

‘조금의 위험도 없는 곳. 그곳에 있어.’

들리지 않는 르베나의 진심을 상기한 가스트가 늙은 손으로 자신의 손자를 끌어안았다. 이 밤이 더없이 길어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폐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곧 동이 터오는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하고 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제노스에게 시종장 크론의 당부가 벌써 여러 번 들려왔다.

“아직도 르베나의 궁을 비롯해 바흐란 왕자와 유파시드님이 묵는 궁의 불빛이 저렇게 환한데 어찌 내가 잠들 수 있겠느냐?”

제노스의 회한 어린 목소리에 크론이 따뜻한 차를 내밀며 말했다.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돕는 차입니다. 드시고 조금이라도 주무셔야지요.

르베나 왕녀님을 도우러 자칸의 왕자님과 제국의 유파시드 그리고 라웅 경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아벨디온과 다니아, 그리고 베이라들까지. 내일 결코 디오니스에 패배란 없을 겁니다.”

의심 따위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크론의 말에 제노스의 얼굴에 흐린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녀의 환히 밝힌 궁을 바라보는 제노스의 녹안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부디 저 어리고 빛나는 젊음이. 이곳에서 지는 일은 없어야지.”

그리고 나서도 한참. 제노스는 르베나의 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내 크론이 한 번 더 따뜻하게 데운 차를 내밀자 이윽고 제노스가 그 차를 입술에 가져갔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이 차는 다음에 마셔야겠군.”

제노스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른 새벽.

‘보토니에’의 공격 마법이 시작되고 있었다. 온 디오니스가 환히 밝혀질 만큼.

* * *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말소리와 분주한 발걸음 소리. 큰 저택 내 가득 찬 여러 사람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루드바하에게 전해졌다. 그 순간 지나가던 시종이 그를 보고 매우 놀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 유파시드님… 디오니스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에……?”

그를 본 루드바하가 저택을 마저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요?”

루드바하의 말에 시종이 공손히 답했다.

“지금 대회의장에서 원로회 분들과 내일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해 회의 중이십니다.”

“고마워요.”

루드바하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하고 사라지자 시종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예의를 다하시고. 역시 대대로 유파시드를 배출해온 헤리테온즈가의 세츠셔.”

그렇게 루드바하의 뒷모습을 끝까지 본 시종이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들은 대로라면 ‘보토니에’가 말한 그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토니에’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국의 국경에 더 많은 성기사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디오니스의 ‘다니아’를 빼앗기면 그마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디오니스로 좀 더 많은 세츠들……!”

“애초에 그 ‘다니아’인가 뭔가 하는 게 정말 무슨 힘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 힘이 있으니 ‘보토니에’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겠죠!”

서로 간 좁혀지지 않는 치열함이 수십 명의 원로가 자리한 대회의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들어선 사람을 본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유, 유파시드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한 원로의 말에 루드바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 과열된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고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유파시드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대회의장 모두를 둘러본 후 조금의 망설임을 마저 지우며 시작된 유파시드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모든 헤리테온즈 가문 사람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냐는 생각으로 시작된 유파시드의 말에 가문의 사활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파벤더… 께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써 수차례 같은 것을 되묻는 한 원로에게 루드바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말했다.

“그리고 전 이것을 비밀로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모든 사람이 경악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유파시드 그건 안 됩니다. 대대로 수많은 유파시드를 배출해 온 우리 헤리테온즈입니다. 단 한 명의 잘못으로 그간 우리가 쌓아온 명예와 정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노한 듯 외치는 한 원로의 말에 루드바하가 깊은 시선을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 모든 명예와 정의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가문의 부흥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높지 않은 톤이었지만 루드바하의 음색에는 명백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느낀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루드바하는 그런 모두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건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세츠들의 왕이 되어 세츠들을 이끌며 결국 젠의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오래전 선조의 뜻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파벤더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들이 떠올린 것이 고작……!”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분노에 물든 신력이 흘러나왔다.

“가문의 명예 따위입니까.”

짓씹듯 들려오는 그의 선연한 음성에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휘이-! 그 순간 루드바하의 신력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또 다른 힘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들 중 누군가는 그의 압도적 힘에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불어오는 신력의 부드러움, 그 따뜻함에 루드바하가 순간 한숨을 내쉬며 힘을 거두었다.

그리고 들려온 그녀의 부드러운 음색에 분노도 조금씩 꺾여 들었다.

“유파시드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두 부끄러워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의 순간을.”

“…어머니.”

대회의장의 문을 열고 들어와 루드바하의 옆에 선 여성이 그와 똑 닮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아드님이 오셨다기에 얼굴을 보러 왔는데 다들 못난 모습을 보이고 계셨구나.”

루드바하의 어머니가 말하자 원로 중 한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드리안! 이곳은 헤리테온즈다. 우리 가문 사람도 아닌 네가 감히……!”

“장로, 말을 삼가십시오. 나와 결혼한 이상 그녀는 누가 뭐래도 우리 가문의 사람입니다. 제 앞에서 한 번만 더 제 아내를 모욕하신다면 절대로 참지 않겠습니다.”

아내를 따라 대회의장으로 들어선 루시드가 아내의 옆에 자리했다. 그리고 모두를 보며 이어 말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유파시드께서 제 아드님이라 편든다는 오해를 받을까 말을 아낄까도 했지만… 이런 게 헤리테온즈라면, 가문의 영웅이라 알려진 파벤더의 잘못조차 바로잡을 용기도, 힘도 없는 것이 저의 가문이라면 수치스럽기만 할 뿐이군요.”

그의 발언에 모두가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현재 유파시드를 제외하고 가문 내 가장 강한 세츠가 바로 루시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리테온즈가 아니라고 무시하기는 했지만, 루드바하의 어머니는 제국에서 가자 유서 깊은 백작가의 장녀이기도 했다.

“수치스럽더라도 그대의 가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요!”

한 원로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치자 루시드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숨기는 일이라면.”

그가 루드바하와 자신의 아내, 아드리안을 한 번씩 본 후 말했다.

“저는 헤리테온즈에서 나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대회의장 모두가 놀라 웅성거렸다. 하지만 루시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내가 가문을 나가는 순간 제 아내와 제 아들도 나와 함께하게 될 테니.”

루시드의 말이 끝나자 순식간에 대회의장안이 혼란으로 가득찼다. 유파시드를 빼가겠다니……!

순간 더 가까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본 루드바하가 원로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군요. 파벤더의 잘못을 공인하고 함께 그것을 바로잡을지 아니면…….”

순간 여느 때 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루드바하의 미소가 위험하게 빛났다.

“저와 아버지, 어머님을 모두 잃고. 남은 분들끼리 파벤더의 복수를 감당하다 헤리테온즈의 마지막이 되실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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