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24화 (224/276)

224화

제4장. 르베이나 (44)

자신이 할 말을 내뱉는 그에게 아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피식 웃어 버린 루드바하가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루드바하도 아를을 따라 수많은 별이 빼곡히 자리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하늘을. 그렇게 두 남자는 한동안 바라보며 침묵했다. 이윽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루드바하였다.

“아를 경. 저는 르베나와 헤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멋없는 고백은 그만해요.”

그의 말에 흠칫한 아를이 모든 분노와 욕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여전히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말했다.

“일찍 와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설레는 마음이 르베나가 다른 남자에게 고백받는 장면을 본 후의 기분으로 바뀌게 했으니. 그 원흉에게 타박까지 받고 싶지는 않네요.”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루드바하가 더 빨랐다.

“르베나조차 내가 온 것도 모른 채 당신에게 집중했어요. 그래서 더 아프니까 르베나가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묻지 마세요.”

뾰로통한 그의 말에 아를이 그를 가만히 보다가는 물었다.

“화… 안 내십니까? 전 누가 제 연인한테 고백 같은 거 하면 죽이고 싶을 거 같은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가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겠죠. 누가 르베나에게 고백 따위를 했다면 진짜 죽이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계속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던 루드바하의 깊은 시선이 이윽고 아를을 향했다.

“그게 하필이면 당신이잖아요, 아를 드 메이슨. 언제나 내가 없는 곳에서 르베나를 지켜 주고 도와줬던. 언제나 그녀의 뒤에서 버텨 주었던. 그래서… 화를 못 내겠더라고요.”

잠시 머뭇거린 루드바하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만은 그녀를 혼자 있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녀라면 오늘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당신에게 죄책감을 느낄 테니. 그런 감정까지 알게 해 주기는 싫었거든요.”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피식 웃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께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보토니에’와의 전쟁에서 그대는 죽지 않을 겁니다. 아를 드 메이슨 경.”

루드바하의 대답에 아를의 시선이 잠시 떨려왔다. 그런 아를의 시선을 확인한 루드바하가 이어 말했다.

“그때 그랬죠? 내가 싫다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곁에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르베나를 지켜 주는 그대가 싫습니다. 내가 황제이기에 쉽게 하지 못하는 걸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하는 그대가 미워요.”

아무런 거리낌 없는 그의 말에 아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해 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그러나.

“하지만… 동시에 고맙습니다. 그 모든 순간 르베나의 곁에 있어 주어서. 그녀를 지켜 주어서. 그리고…….”

잠시 망설인 루드바하가 힘겹게 입을 뗐다.

“오래 간직한 마음조차 죽을지 모를 상황이 돼야 전달하는 당신이라. 그리고 그 고백조차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이 거절당하기 위해서인 당신이라. 그래서 난 당신이 싫지만, 썩 기분 나쁘지는 않아요. 그래서 내일 당신을 죽게 하지 않을 겁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한동안 떨리는 시선을 주체 못 하던 아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늘하게 말했다.

“누가 죽어 준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르베나를 위한다고 해도 선뜻 황제 자리를 버리진 못할 테고 난 그때까지 살아서 반드시 르베나의 옆에 설 겁니다.”

그대로 루드바하를 한번 바라본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졌다. 어느새 혼자 남은 루드바하가 다시 먼 밤하늘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이 싫지 않은 거예요. 언제나 르베나에 대한 내 마음을, 내 고민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채는 게 당신이라서.”

루드바하의 독백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서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삶이 끝날 때 떨어진다는 별똥별. 그 순간 루드바하는 잠시 빌어보았다. 지금 하늘에 내리는 수많은 별똥별에 부디 그녀가. 그리고 얄미운 그가 있지 않기를.

* * *

“왕녀님은 만나고 오셨습니까?”

전쟁을 앞두고 디오니스로 와준 제국의 황제를 위해 마련된 궁. 유안과 라웅이 마지막까지 작전을 짜고 있는 그곳으로 루드바하가 들어섰다. 그런 루드바하를 보고 유안이 묻자 그가 쓰게 웃었다.

“만나긴 했지. 그것보다 젠에서 오기로 한 추가 인력이 더 있나?”

루드바하의 물음에 유안의 얼굴에 잠시의 망설임이 보였다. ‘보토니에’의 서신을 전했음에도 제국의 황제가 젠을 떠나 디오니스로 가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오니스의 ‘다니아’를 빼앗겨 더 큰 일이 생기지 않게 막자는 쪽에 무게가 실린 덕에 루드바하는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물론 반대가 있다 해도 왔겠지만.

그리고 현재, 계속 반대를 표하는 귀족들을 다름 아닌 룩센 공작이 진정시키고 있었다.

“룩센 공작 가에서도 젠의 일을 마무리하고 올 것 같습니다.”

유안의 말에 포함된 망설임을 느낀 루드바하가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룩센 공작은 생각만큼 모자란 인간이 아니야. 이런 위험한 곳에 자신의 딸을 데려오진 않을 거다. 그것도 세츠도 아닌 딸을. 본인 또한 참전은 하지 않고 단지 상황을 주시하러 올 가능성이 커.”

자신이 불안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 주는 루드바하의 말에 유안이 조금 나아진 얼굴로 보던 서류를 마저 넘겼다. 그러다가는 이상하게 조용한 건너편 자리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이미 오두방정 난리가 났어도 충분한 라웅의 침묵 때문이었다. 곧 라웅이 앉은 곳을 바라보며 유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큰 전쟁을 앞두다 보니 아무리 라웅 너라도 긴장을 하는……!”

하지만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입안 가득 디오니스의 디저트를 물고 한 입이라도 더 넣으려고 발버둥 치는 라웅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유안은 그대로 눈을 돌렸다. 잠시라도 라웅에게 긴장 같은 걸 기대한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개를 돌린 유안을 보고 갸우뚱하며 쿠키 세 개를 더 집어넣는 라웅을 보니 더더욱.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혹시 유안 님 계십니까?”

그리고 들려온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에 가장 놀란 건 바로 루드바하였다.

“르베나?”

텔레포트를 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문으로 다가간 루드바하가 그 앞에 서 있는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이 밤에 어쩐 일이에요? 별궁에서는 거리도 좀 있던데 차라리 부르죠.”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슬쩍 보이는 루드바하를 본 르베나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 유안 님을… 보러 온 거라.”

르베나의 대답에 잠시 멈칫한 루드바하가 유안을 한번 서늘하게 노려보고는 다시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르베나에게 물었다.

“당연히 둘만 보는 건 아니겠죠, 르베나?”

적어도 오늘 그와 단둘이 있는 건 피하고자 유안을 찾았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도 들썩이는 그의 신력 자락들이 유안을 공격할까 걱정된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인지 그들이 있던 방 안에서는 여전히 한기가 흘러나왔다.

“이걸… 어디서 발견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르베나가 건넨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루드바하의 질문에 유안과 라웅의 표정도 왜인지 서늘해졌다.

“지난번 아를 경과 디온 기사단이 가짜 다니아에 휘말려 데자르 사막에 간 일을 기억하세요? 그때 그곳에 아이들과 노인들의 시신이 있었다고도 말씀드렸지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설마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이 전부 끝나고 그곳의 시신들을 묻어 주는 과정에서 한 노인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발견한 겁니다. 얼핏 보기에 젠의 표식과 많이 닮아 있어서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작은 표식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떼어낸 것 같은 천 쪼가리에 새겨진 두 개의 검과 월계관.

“이건 옛 성기사들이 제복에 달던 표식입니다.”

루드바하를 대신해 유안이 대답했다. 르베나가 그를 바라보자 억눌린 분노를 겨우 누른 라웅이 이어 말했다.

“왕녀님은 모르겠지만 신마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 성기사들이 최근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늘고 있어. ‘보토니에’를 의심하긴 했지만, 딱히 성기사들은 신력이 강한 것도 아니라 그들이 탐낼 대상이 아니거든. 그래서 오히려 다른 원인이 있나 했지. 근데… 왕녀님 말을 들으니 불길한 가정이 떠오르네.”

라웅의 말에 루드바하의 몸에서 분노한 신력의 자락들이 펄럭댔다. 그걸 본 르베나가 말했다.

“혹시 ‘보토니에’가 예전 신마 전쟁에 참여했던 성기사들을… 자신들이 키우는 몬스터의 먹이로… 쓴다는 겁니까?”

평소보다 딱딱해진 르베나의 말에 라웅이 차마 답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결국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 건 유안이었다.

“아직 확신할 순 없습니다. 실종된 성기사들의 나이가 모두 많았거든요. 언제 자연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몬스터들의 먹이라면 좀 더 젊은 사람들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죽음을 앞둔 성기사들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아마도 파벤더를 호위하던 자들일 거다.”

유안의 말이 끝날 때쯤 루드바하가 말을 더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분노로 깊게 가라앉는 목소리로 그가 이어 말했다.

“파벤더의 여자, 루타에 대한 기록이 이상할 정도로 없었습니다. 분명 어느 유파시드건 서기관은 그의 치부까지 몰래 기록할 의무가 있음에도 말이죠. 루타란 자가 여성이었다는 것도, 그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도 모두 파벤더의 자료들을 조사하다 어느 모퉁이 낙서처럼 작게 쓰인 글귀로 안 것이니…….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겠죠.”

루드바하가 잠시 숨을 골랐다.

“아마도 루타란 자가 유파시드와 맺어지기에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것, 그리고 파벤더는 그걸 모두 알고도 그녀를 원했을 거란 것.”

루드바하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던 유안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파벤더의 측근들은 어떻게든 그녀를 파벤더로부터 떼어내려고 했겠군요. 가까이는 서기관부터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성기사들… 까지.”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만약 저 가정이 사실이라면 저희 가문의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르베나, 정말 미안하지만…….”

“어서 가보세요, 루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요.”

루드바하의 말이 끝나기 전 르베나가 먼저 그의 말을 대신했다. 따뜻한 그녀의 배려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르베나의 이마에 작은 키스를 남기며 사라졌다.

파벤터가 정말 당시 주변의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라면 이미 그의 가문에 문제가 생겼음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유안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라웅은 신기해하며 목구멍까지 디오니스의 쿠키를 채우며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민망함은 혼자 남은 그녀, 르베나만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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