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제4장. 르베이나 (43)
“주변의 사람들이, 전쟁이, 그리고… 유파시드가 너를 상처입히는 게 싫어.”
갑작스러운 아를의 이야기에 르베나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루드바하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로 오라니?
“아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루드는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좋은… 남자야. 애초에 내가 그에게 상처 입은 것도 없고.”
그녀의 말에 아를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의 할아버지 일도 그렇고… 내 문제로 그와 연락이 안 닿아 네가 마음 졸였다는 것도 아한에게 다 들었어.”
“아를, 그건… 네 걱정에 내가 욕심을 낸 거야. 물론 지금 한 말도 네가 날 걱정해서 그러는 건 잘 알지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전쟁이 끝나고 유파시드가 너한테 청… 혼이라도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유독 청혼이라는 말에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는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멈칫했다.
“청혼? 갑자기?”
아를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르베나의 표정을 확인한 아를이 아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하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노력해서 정착한 이 디오니스를 버리고 젠의 황후가 될 거야?”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를 떠올린 순간, 그 대가가 너무도 크고 잔인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런 르베나를 본 아를이 조금 더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거야. 젠의 황후가 되든지 아니면 그 사람과 헤어지든지. 그리고 그 둘 중 어떤 것도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방법은 없어.”
아를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 굳어있는 르베나를 보며 망설임 끝에 한 번 더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와, 르베나.”
그리고 예상치 못한 아를의 말에 굳어있던 르베나의 눈이 한 번 더 풍랑을 만난 듯 흔들렸다. 그런 르베나를 바라보던 아를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나한테 와, 제발.”
애원으로까지 느껴지는 그의 말에 굳어있던 르베나가 그를 보며 무거운 입을 겨우 열었다.
“아를, 네가 날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잘 알아. 나 또한 그러니까. 하지만 그런 건 미래의 네 연인이나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할 이야기잖아. 우정만으로 할 얘기는 아니야.”
아를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넘어서 우정으로 사랑을 대체한다고 생각하는 르베나의 말. 그 아픈 말에 아를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과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없이 깊고 다정했으며 그의 목울대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는 낮고 애달팠다.
“우정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하는 얘기야.”
아를의 말에 한 차례 더 충격을 받은 르베나가 숨조차 멈췄다가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를, 난 지금 루드와 만나고 있어.”
반사적으로 들으면 안 될 것은 그의 뒷말을 르베나는 이렇게 방어했다. 그리고 아를은 자신의 진심으로 그녀의 방어를 손쉽게 꿰뚫었다.
“알아. 그러니까 그 사람과… 충분히 만나고 와.”
아를의 당황스러운 말에 르베나의 손이 떨려 왔다. 하지만 아를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유파시드와 만나. 그와 하고 싶은 건 모두 다 해. 그러고서… 그래도 젠의 황후가 될 생각이 없으면, 그 선택이 널 너무 힘들게 하면… 그때는 나한테 와. 난 어차피 공작이 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무엇보다 널 위해서라면 이름뿐인 부마로도 난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르베나.”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보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아를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때는 그 힘든 것까지 모두 들고 꼭 나한테 와. 난 절대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테니까.”
“르베나.”
환한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루드바하의 모습에 르베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주 미소 지은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잘 먹었어요? 잘 잤고? 무리하지 않았고?”
고작 어제 헤어지고 다시 만났으면서 물어오는 질문들이 우스웠다. 그것도 그 하루 사이 끊임없이 통신구를 울려 댔으면서. 그의 질문에 르베나가 피식 웃자 루드바하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마주 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르베나가 부탁한 거 알아봤어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돌연 무거운 표정으로 바뀌자 그가 르베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파벤더의 측근 루타는 여자였어요. 아마도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 같고요.”
들려온 말에 르베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순간 습관처럼 르베나의 손을 잡으려던 루드바하가 순간 멈칫하며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르베나, 사실 이거 때문에 저도 좀 더 알아볼 게 있어 가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함께 있고 싶었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이어진 루드바하의 갑작스러운 말에 르베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좀 더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안과 라웅도 함께 오는 바람에 젠 관련해서도 챙길 게 많아져서요. 주요 인력을 데리고 와 버려서 젠에 조금 구멍이 생길지도 모르겠거든요.”
도박처럼 파벤더의 말을 듣고 제 최측근들을 모두 디오니스로 데려온 황제에게 제국의 귀족들이 엄청난 반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르베나도 조금 전 익히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파벤더, 그는 반드시 자기의 말을 지킬 거예요. 어차피 ‘다니아’만 손에 넣으면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할 테니.”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조금 전 아를의 일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게 내심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루드바하에게 바로 고맙다고 하기에도 조금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그런 르베나의 마음까지 아는 것인지.
쪽.
부드럽게 르베나의 이마에 버드 키스를 한 루드바하가 편안한 미소로 그녀를 마주 보며 말했다.
“사랑해요. 아주 많이.”
장난스러운 음성에 깊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그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에도 어느새 편안한 미소가 맴돌았다.
* * *
“머저리인 건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니면 천하의 바보 천치인 건가…….”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넋 놓고 밤하늘을 보는 아를이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시간이 온통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충격으로 굳어진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조차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심이야, 아를? 지금 한 얘기가 진심이냐고.”
조금은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아를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에겐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가 물러나면 그곳에 르베나의 눈물이 있을 테니.
“미안해.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할 텐데 이런 얘기 해서. 하지만 르베나. 진심이야.”
좀 더 확고해진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곧장 물어왔다.
“그럼 그 말은? 나보고 루드… 를 충분히 만나고 오라는 말은?”
분노가 여과 없이 드러난 르베나의 물음에 아를이 다시 한번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그것도 진심이야. 그와 네 앞길이 누가 봐도 편안한 길이였다면… 그랬다면 난 평생 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야, 네 삶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내 마음 같은 거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를의 금안에 깃든 진심이 르베나에게도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분명 디오니스와 유파시드의 반려라는 갈림길 앞에 서면 너는 고민할 테고 유파시드도 황제를 포기할 순 없을 테니까. 그럼 네가… 네가…….”
순간 아를은 치미는 감정을 겨우 집어삼키며 말했다.
“힘들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진심이야. 만나. 유파시드가 아니라 또 네 마음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편하게 만나. 그리고 네 마지막에… 네가 더는 누구도 마음에 둘 생각이 없어지면. 그럼 그때 내가 네 옆에만 있게 해 줘.”
자신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얼마나 치욕적일지 아를은 잘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한결같은 그녀에게 이따위 걸 고백이라고 지껄이다니. 다른 사람 실컷 만나고 혼인만은 이용하기 좋은 나랑 하라고. 이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지금 르베나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화가 날지 아를은 잘 알았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었다.
항상 내가 있을 거라고. 네 뒤에. 보이지 않는 그곳에. 친구로서가 아닌 남자로서의 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힘들 때 혼자 참지 말고. 그것조차 나한테 모두 달라고.
오래 간직해 온 마음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뭣 같은 고백에 아를은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르베나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져 암담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거의 다 저물어간 석양이 감춘 빛만큼 아를의 마음도 재가 되어버릴 만큼 초조했을 때. 르베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동시에 아를은 오늘이 제 생에 가장 끔찍한 날이 될 것을 이미 예상하였다.
“아를 드 메이슨.”
르베나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풀 네임으로 불렀다. 그 거리감이. 그 간격이. 아를의 심장을 마구 난도질했다. 그리고 이어질 그녀의 거절에 그의 영혼은 넝마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오랜 기다림 끝 들려온 그녀의 음성은, 그 모든 고통을 상쇄시키고야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해.”
생각지도 못한 르베나의 말에 놀란 아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 르베나가 있었다.
“…르베나?”
놀란 아를의 부름에 르베나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그 오랜 시간. 혼자 아프게 해서. 네 마음 알지 못해서. 그런 네 앞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서. 그래서.”
툭. 르베나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아를의 심장도 땅 밑으로 꺼져 들었다.
“이런 말… 까지 하게 해서. 오랫동안 품어온 네 마음을. 이런 식으로 고백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를.”
그리고 전해진 그녀의 진심에 이윽고 아를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화내 주기를 바랬다. 이것도 고백이냐고 분노해 주기를 바랐다. 그게 고작 자신에게 할 제안이냐고. 그것도 아니면 당황한 채 다음을 기약해주기를 바랐다. 너의 거절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도록.
그런데.
“…네가 사과를 하면 어떡해. 그러면 내가… 내가, 널 더 놓을 수가 없어지잖아.”
아를은 그 순간 깨달았다. 고백을 가장한 끝을 준비한 오늘. 아를은 영원히 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을 심장에 더 깊이 새겨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게 그를 평생 괴롭고 외롭게 할 거란 걸 알면서도 눈치 없는 그의 심장은 그녀를 보며 더 미친 듯 박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어야 끝이 날까.”
조용히 읊조린 낮은 음성이 허공에 흩어지듯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를의 귀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휙-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가오는 이를 경계하던 아를의 눈에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하…….”
그를 보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어 쉰 아를의 모습에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나도 싫어요. 아를 경을 만나는 건.”
르베나의 그, 루드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