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제4장. 르베이나 (42)
“하… 흣… 하응!”
습한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여성의 신음이 점점 극한으로 치달았다.
“흣… 앗…! 파, 파벤더 님!!”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여자의 손톱이 그의 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어느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두 남녀의 진한 몸부림이 끝나자 거친 숨을 몰아쉰 남자가 여성의 등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르베나 왕녀는 내 서신을 잘 받았으려나?”
은근한 남자의 말에 여자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남자의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저랑 침대에 있으면서까지 그 여자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토라져서는 침대를 벗어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파벤더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이런 얘기 너랑만 나누는 거 잘 알잖아.”
파벤더가 다시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며 속삭였다.
“죽어서도 넌 내 사람이니까, 루타.”
그의 말에 루타라 불린 여자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름 진짜 싫어요. 너무 촌스러워! 남자 이름 같단 말이에요! 차라리 다른 이름으로 불러 줘요! 당신이 붙여 준 거로.”
토라진 루타의 표정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그가 말했다.
“난 이 이름이 좋아. 들판 가득 피어있는 루타를 봤을 때 결심했다며. 그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나와야겠다고. 그러니까 루타는 널 내게 데려다준 고마운 허브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아직 식지 않은 여자의 목에 닿자 그녀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겨우 다시 입은 여자의 가운을 거칠게 헤치며 파벤더가 속삭였다.
“루타, 루타. 너만이 내 의미야. 너만이 내 정의고. 너만이 내 힘이야.”
“흣…….”
어느새 풀린 가운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가 목을 뒤로 젖혔다. 그 목에 가느다란 키스를 퍼부으며 파벤더가 속삭였다.
“이제 곧 세상이 우리 발밑에 올 거야.”
“아흑… 파벤더!”
거침없는 그의 손길에 신음을 퍼트린 루타의 손길이 그의 목을 휘감자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목에 살짝 자신의 이를 박으며 말했다.
“널 고작 돈 몇 푼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팔아 버렸던 네 주변의 모두를 죽인 그날처럼.”
파벤더의 말에 여자의 눈에서 불같은 분노가 피어올랐다.
“몸 파는 여자라며 나를 당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던 그들을 죽인 날처럼요?”
그녀의 물음에 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날처럼. 이제 세상이 우리 것이 되는 거야.”
휙. 여자를 자신 쪽으로 돌린 파벤더의 탐욕에 젖은 눈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그 시선만으로 황홀해진 여자의 몸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동시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벤더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은 것과 동시에 둘의 정욕이 다시 한번 타올랐다. 그들의 뜨거움으로 가득 찬 공간의 창문. 그곳에 보이는 디오니스의 국경이 제법 분주해 보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 루타, 나만의 꽃…….”
파벤더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들은 또다시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그럼 아벨디온과 다니아 모두 준비가 끝난 건가?”
사방을 가득 메운 기사들을 보며 르베나가 물었다.
“다니아의 반은 국경 안에서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고 나머지 반은 바로 국경 앞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할 겁니다.”
후벤의 말에 다한과 아를이 이어 말했다.
“아벨디온 역시 아벨과 디온이 반씩 섞여 국경의 최전방을 수호할 겁니다.”
“그리고 소수의 병력은 진짜 ‘다니아’를 지킬 거고.”
모두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보토니에’가 예고한 전쟁이 시작된다.
아를과 아벨디온이 함정에 빠지고, 가짜 ‘다니아’에 걸어 놓았던 칸의 마법조차 추적이 되지 않아 그들의 근거지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조차 상대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파시드였던 파벤더라는 사실을 깨닫자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마법이라면 칸이 가볍게 걸어 놓았던 추적 마법 정도는 쉽게 가려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칸의 서신을 조작해서 전한 자가 디오니스 내에 아직 있다는 것, 그것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 찾지 못했나?”
르베나의 물음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듯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에 후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시 궁에 드나든 모든 이들을 추궁, 수색하고 있으나 아직 단서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이미 단서도 모두 없앴겠지.”
그의 말에 르베나가 대답하자 곧바로 다한이 말했다.
“아무래도 며칠 전 헬리오의 자폭을 유도한 게 꼭 헬리오를 없애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막상 헬리오의 증언 자체도 큰 의미는 없지 않았습니까.”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서늘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 자폭 사건으로 디오니스 내에 있는 그들의 조력자가 단서를 모두 없애기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는 뜻이라면. 나도 동감이야.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아를이 그녀의 말을 받아 짓씹을 듯 말했다.
“반드시 잡아야 해. 그놈이 전쟁에 어떤 변수가 되기 전에.”
얼마 전을 떠올린 것인지 차가운 분노가 새겨진 아를의 시선이 문득 다른 곳을 향했다.
“그리고 저 베이라들 중 석연찮은 힘을 가졌다고 분리된 이들도 있으니 그들의 감시도 늦춰선 안 돼. 더 이상의 변수는 사망자의 숫자만 늘릴 테니.”
이어진 아를의 말에 르베나를 위시한 모두의 시선이 어느새 몰려든 베이라들을 향했다.
처음 모인 삼백여 명 중 아한이 들여보낸 이는 고작 이백여 명. 나머지 백여 명은 모두 의심자로 분류되어 궁의 지하 감옥에 임시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력이 깨끗하지 않을 뿐, ‘보토니에’와 연관을 짓기 어려운 자들이 대부분이라 섣부른 판단이 어려웠다.
“정말 내일 ‘보토니에’와의 전쟁이 시작됩니까?”
어느새 그들의 곁으로 와 묻는 맥스와 그 뒤에 선 베이라들을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그래. 모두 들었겠지만, 내일부터 ‘보토니에’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자들은 나가도 좋다.”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 한 베이라가 분하다는 듯 소리쳤다.
“알 수 없는 꼬맹이한테 검사까지 받으며 기다린 저희입니다. 당장 내일 우리의 고향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요. 그런데 왕녀님께서는 여전히 저희를 하급 용병만도 못한 이들로 취급하시는군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소리친 그의 말이 끝났으나 르베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칠 자는 없다는 말인가?”
르베나의 물음에 모두가 침묵으로 그들의 답을 대신했다. 이에 방금 소리친 남자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르베나를 보았다. 이에 르베나가 옆에 있던 아벨디온 기사 하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짓과 함께 곧 수백 개의 나무 박스가 들어왔다.
“저게 뭐야?”
“몰라, 무슨 포션 같은데?”
“포션? 그게 얼만데 포션이겠냐!”
아벨디온 기사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박스를 보며 베이라들이 소란스럽게 말했다. 그 소란에 르베나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한 번 눈으로 훑자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지만.
곧 르베나가 그들 모두를 한 명, 한 명. 기억하려는 듯 자신의 눈에 새겼다. 그리고 마지막 베이라까지 바라본 후 붉은 입술을 열었다.
“억울했나? 전쟁에 패해 모습을 감춰야 했던 수십 년이.”
갑자기 자신들의 치부를 찌르는 그녀의 말에 모든 베이라들의 눈에 오래전 패배의 아픔이 다시 새겨졌다.
“분했나? 알려지지도 않은 어린 베이라에게 검사나 받는 신세가. 그렇게 국경 안으로 들어와서도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신세가. 너희 모두를 그렇게 대한 내가.”
곧 베이라들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너희들은 스스로가 설 자리를, 어둠이 아닌 빛 앞에 나설 그 자리를 이미 너희 손으로 한 번 버렸다. 힘들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 핍박당할 것 같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순간 베이라들의 얼굴이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물드는 것을 르베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버린 그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왔다.”
그녀의 말을 듣고 사뭇 긴장으로 떨리는 베이라들을 바라보며 르베나가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디오니스는 모든 베이라들을 우리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능력만 갖추었다면 그게 누구든, 어떤 능력을 갖췄든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적극적으로 기용할 것이다. 그러니 그 미래를 보기 위해, 맞이하기 위해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수백 명의 베이라들이 하나같은 시선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어떤 초조함과 기대, 그리고 희망의 빛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살아남아라. 내일부터 전쟁이 끝날 그때까지. 너희 몸의 마지막 마력을 써서라도. 이 모든 포션을 마셔서라도. 자신의 손으로 버린 디오니스를 재건하는데 너희의 마지막을 쏟아부어라. 그것이 너희의 왕녀로서 내가 내리는 첫 명령이다.”
이윽고 르베나의 말이 끝났다. 동시에 베이라들의 몸에서는 수백 개의 마력 자락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을 숨죽이고 기다린 미래가. 그 희망이 이제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
“아를,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마지막 점검이 끝난 후 외궁 후원 티 테이블에 따로 자리를 잡은 르베나가 아를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아를의 얼굴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보였다.
“괜찮아, 알아낸 사실을 그대로 얘기해 줘.”
하지만 르베나가 그녀답지 않게 다시 재촉하자 아를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이 맞아. 궁에 들어오기 전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더라.”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밀려오는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르베나가 조금 후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 하자. 대신 기사들을 좀 더 붙여야겠어. 왠지 좀 불안해.”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난 뭐가 어떻게 되든 다시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르베나.”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이 순간조차 그녀의 시선이, 미소가 자신을 향하는 게 좋아 아를은 자신을 미친놈이라 되새겼다. 그래서 아를은 오랫동안 턱 끝에서 찰랑대던 그 말을, 드디어 할 수 있었다. 르베나의 시선을 마주 보며,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자신을 향하는 그 순간에.
“그러니까 나한테 와.”
아를의 낮은 음성이 오래되어 더 무거운 진심을 드디어 뱉은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