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제4장. 르베이나 (41)
“무슨 자신감으로 떡하니 이름까지 써 놓은 거지?”
바흐란의 혼잣말에 유안이 답했다.
“아무래도 유파시드께서 파벤더 님에 대한 일을 비밀로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문제는 타국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이자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파악하는 겁니다. 사실이라면 타국의 병력을 디오니스로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안의 말에 각자가 생각에 잠기자 루드바하가 잠시 후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진실일 거다. 내가 최근 파벤더에 관해 기록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건 그가 상당히 솔직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니. 언제나 과할 정도의 솔직함이 그를 더 좋은 유파시드로 보이게 했지만, 그 뒤엔 뭐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더군. 일례로 많은 이를 곁에 두고 보좌를 받아야 할 왕인 그가 유일하게 곁에 둔 이는 오직 한 명뿐이라 적힌 것을 보았다.”
루드바하의 말을 들은 라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유파시드의 곁에 사람이 하나만 있을 수 있어? 그의 일상을 기록할 서기관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려면 성기사들과도 굉장히 밀접해야 할 텐데? 폐하만 해도 나랑 유안, 그리고 유파로드, 성기사단 단장들, 세츠의 대표들 하고는 막역하잖아.”
라웅의 말에 대한 대답은 유안이 대신했다.
“모두와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하지만 진짜 마음을 터놓은 이는 하나라는 거겠지. 그만큼 남을 믿지 않는 자인데도 언제나 솔직할 수 있었다는 건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다는 거고. 루드바하 님, 그자가 혹시 그때 주셨던 책에 있던 루타라는 자입니까?”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거 같다. 본명은 알 수 없지만, 파벤더가 항상 그렇게 부르며 자신의 곁에 두고 많은 일을 시켰다고 쓰여 있는 걸 봤거든. 아마도 유파시드의 자리를 유지하며 흑마법 단체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보토니에’의 초석을 다지는 모든 일에 루타라는 자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커.”
루드바하의 말에 이제껏 조용하던 르베나가 서신에서 시선을 떼고 물었다.
“굳이 하고많은 이름 중에 루타라고 부른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 상황에 조금은 엉뚱한 르베나의 질문. 하지만 루드바하는 그마저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뒤 말했다.
“글쎄요. 루타라는 자에 관해 기록된 책도 하나뿐이었고 짧게 기술한 거라 자세한 정보는 없습니다. 다만 그자는 세츠도 베이라도 아니라고 되어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할아버지이겠죠, 만약 살아있다면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3일이라. 단단히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모자란 느낌이 드네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르베나. 저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젠을 정비하고 이틀 뒤 저녁에 미리 디오니스로 오겠습니다. 절대로 디오니스나 그대가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모두의 앞에서 루드바하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애정을 드러낸 건 처음이라 르베나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더 꼭 르베나의 손을 잡으며 웃어 보였다. 어디선가 금안의 서늘함과 자칼의 포악함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얼른 흩어져야겠군요. 저희는 폐하를 모시고 젠으로 가서 디오니스로 차출할 병력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를과 바흐란의 사나운 시선을 애써 피한 유안이 르베나를 보며 미소 짓는 루드바하를 강제로 떼어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는 쿠키에 정신이 팔려 있는 라웅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 상태로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 유안은 두 사람을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한과 후벤도 눈에 불을 뿜는 아를과 바흐란을 하나씩 데리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벨디온과 다니아도 전력 상태를 정비하겠습니다.”
후벤이 먼저 다급히 말하며 사라졌다. 순간 르베나가 조금 전 루드바하가 잡았던 손을 한 번 본 다음 아한을 향해 말했다.
“베이라들에게는 곧 내가 가서 말할 테니 모두 모이라고 해 줄래, 아한?”
“신력이 나오는 모든 통로를 막으면 유파시드라도 죽으려나… 응? 뭐라고, 누나?”
순간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르베나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다시 한번 아한에게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자 아한이 언제나처럼 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사라졌다.
이제 방에 남은 이는 칸과 루안, 그리고 사나와 헬리오뿐이었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사나가 르베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르베나 님. 혹시… 혹시 헬리오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까 루드바하 님께서 헬리오에게 더는 세뇌의 위험은 없다고… 하셨는데.”
루드바하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단 같이 데려오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말했다.
“사나의 의견은 어떤데?”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후적저로 데려가고… 싶어요. 일단 후작저가 본궁과 멀리 떨어져 안전하기도 할 거고, 헬리오에게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럼 그렇게 해.”
변명 같은 이유를 더 늘어놓으려던 사나가 놀란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나를 마주 본 르베나가 헬리오와 사나를 보며 말했다.
“사나 말대로 후작 저는 본궁과 떨어져 있어 안전할 거야. 저번에 루도 같이 데려간다고 했으니 그곳에 아벨디온을 붙여 줄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 더는 헬리오의 일로 나에게 변명할 거 없어.”
르베나가 헬리오를 보고 아주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의 일은 모두 파벤더의 세뇌 때문이었고. 그조차 루드가 확실히 해결했잖아. 전쟁이 끝나면 나 또한 헬리오의 후견을 철회할 예정이야.”
후견인 철회.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을 가능성과 미래에 사나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르베나 님. 정말, 정말로.”
사나와 르베나의 대화를 듣던 헬리오도 감격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사나의 행복한 얼굴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 르베나가 칸에게 물었다.
“후벤이 지금 바쁜 거 같으니 후작저로 가는 길은 아버님과 루안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르베나의 말에 칸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3일.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 * *
줄지어 북쪽을 향해 이동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워가는 수 백여 명의 베이라. 그리고 수백의 아벨디온과 수천의 다니아의 모습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스무 살 즈음 죽었던 이전의 생을 돌아 다시 열 살. 르베나는 10년의 시간을 한 번 더 살았다.
그것만으로 르베나는 자신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리라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곳에 후회 따위는 없을 거라고. 두 번이나 같은 시간을 살게 된 그녀의 삶은 감히 완벽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게 최선이었을까? 르베나는 이 순간 정든 집을 떠나며 눈물 흘리는 백성들을 보며 자신의 시간도 되돌아보았다.
‘다니아’를 이용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 쥬라에게 디오니스의 기사들을 잃은 후에야 이곳에 정착했던 마음, 드록과의 끊임없는 신경전, 기사로서의 다짐과 아벨디온의 결성. 모든 왕국을 스치며 겪었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마주한 ‘보토니에’.
르베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어째서인지 이제야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이번 삶을 또 한 번 살게 된다 해도, 그리고 또 한 번 더 살아도, 사람이기에 르베나는 또 후회하고 아쉬워하리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번 삶 역시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 두 번은 없어.”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기적 따위는 절대 없다는 걸 르베나는 제 마음속에 재차 새겼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모두를 지켜야 해. 그럴 거야.”
소중한 누구도 잃지 않고.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지키고 그녀와 그녀의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보토니에’를 깨끗이 지워 버리기로.
그때 깊은 상념에 잠들어 있던 르베나를 깨운 것은 익숙하고도 반가운 진동이었다. 지잉— 징--! 르베나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힘껏 울려대는 반지를 향했다. 그리고 반지를 잠시 바라본 르베나가 그것을 쥐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루드.”
르베나가 오직 한 명뿐인 상대방을 부르자 그가 말했다.
“르베나, 큰일 났습니다.”
쿵. 그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이 쏟아지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떨리는 손에 힘을 준 르베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보토니에’가 벌써 움직인 건가요?”
초조함이 가득 담긴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직 백성들이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조금씩 움직여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는 더 있어야 저들이 모두 북쪽으로……!
“보고 싶어서요. 자꾸 르베나 생각이 나서 일이 안됩니다. 진짜 큰일인데 어쩌죠?”
정말 큰 일이라는 듯 들려온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반지에 넣던 마력을 끊어 버렸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루가 따뜻한 밀크티를 들고 들어왔다.
“왕녀님, 티 타임이에요.”
들어온 루를 보고 한숨을 내어 쉰 르베나가 티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사나와 후적저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르베나의 말에 루가 웃으며 말했다.
“시종 시녀들 모두 끝까지 궁을 지킨다고 남는데… 저만 가는 게 조금 미안해서요.”
작게 미소 짓는 루의 미소가 따뜻했다. 특별히 사나가 아끼는 아이라 후작저에 함께 가자 했을 텐데. 르베나가 못내 서운해하고 있을 사나를 생각할 찰나, 루가 르베나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사나 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전 왕녀님의 곁을 지켜야죠, 헤헤. 대신 이따 잠시 궁에서 만든 디저트를 드리고 오려고요.”
애교 넘치는 말투로 전하는 루의 진심이 닿아 왔다. 순간 르베나가 차분히 루를 바라보았다. 생긋 웃는 루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맑았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물론 본궁과 주위의 궁들은 모두 제노스 전하께서 지켜 주실 테지만.”
징—지이잉—! 그 순간 다시 반지의 진동이 울려오자 르베나가 서늘한 눈으로 반지를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무시했다. 그러자 루가 웃으며 말했다.
“루드바하 님 아니세요?”
루의 말에 르베나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이따 다시 하면 돼.”
조금 화가 난 듯한 르베나의 말에 루가 생긋 웃었다. 순간 르베나가 무언가 생각 난 듯 루에게 물었다.
“아, 반지는 누가 가져다 놓은 거야? 내가 어딘가 두고 깜빡했던 거 같은데.”
르베나의 말에 칸이 주고 간 쿠키와 그레이풀 푸딩을 르베나가 먹기 좋게 옮기며 루가 답했다.
“의무실에 두고 가셨길래 제가 챙겨 놨어요. 왕녀님과 연락이 안 되면 루드바하 님 애가 타실 것 아니에요. 헤헤.”
언제나처럼 사랑의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하는 루가 싱긋 웃다가는 계속 울리는 반지의 진동을 보고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런 루의 뒷모습을 르베나가 바라볼 찰나. 참을성 없는 반지가 또다시 울려댔다.
“하-.”
순간 한숨과 함께 반지를 바라보던 르베나가 다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언제나 입에 딱 맞는 루의 밀크티를 이제 못 마시게 된다는 게 조금 아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