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20화 (220/276)

220화

제4장. 르베이나 (40)

“그럼 르베나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아를의 첫 마디에 루드바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바흐란 왕자나 당신이나 그거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겁니까?”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보토니에’의 수장이 알고 보니 예전 유파시드 중 한 사람이고 그게 폐하의 할아버님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아를의 무성의한 말에 루드바하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어버렸다.

“어쩐지 아를 경만은 저를 비난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무겁게 들려온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새벽녘의 이슬이 맺히는 시간. 조금은 습해진 주변의 공기를 느끼며 마침내 아를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제국의 황제이건 세츠들의 왕이건 다 필요 없이 그냥 싫습니다. 이런 저를 무례하다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싫은 사람에게 좋은 척하는 건 못 하는 못난 성격이라서요.”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럼에도 아를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싫은 건 남자로서지 제국의 황제인 당신은 조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존대하는 것도, 아랫사람을 막 대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힘을 균형 있게 잘 쓰는 것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아를은 가만히 눈을 마주하고 진심을 담아 자신의 생각을 말로 꺼냈다.

“그런 당신이라면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겠죠.”

순간 루드바하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런 루드바하를 보지 못한 아를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더 이상 누군가에게 질책받아 편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자기가 한 일도 아닌데 괴로워할 게 뭐 있습니까?”

아를의 말이 모두 끝나자 루드바하가 조금 놀란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제가 아를 경에게 이런 위로를 듣다니.”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정색하며 말했다.

“위로라니, 젠에서는 이런걸 위로라고 부릅니까? 소름 돋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위로라니!”

정말로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문지르는 아를을 본 루드바하가 순간 시원하게 웃어 버렸다. 그 웃음에, 그 숨소리에. 자신의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찝찝함 마저 모두 날려 버리듯. 그런 루드바하를 바라보던 아를이 조금은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그 죄책감 같은 걸로 르베나를 포기하셔도 좋을 것 같군요.”

들려온 아를의 진심에 루드바하 역시 웃던 모습을 순식간에 지우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해 답했다.

“그런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테니 꿈 깨세요. 아무튼, 제가 전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전했고 아를 경이 살아 있는 것도 확인했으니 다시 가 봐야겠네요.”

루드바하의 말에 잠시 시선이 흔들린 아를이 조금 꽉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짧은 물음에 담긴 진짜 그의 질문이 뭔지 아는 루드바하가 잠시 아를을 바라보다가는 말했다.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곳으로요.”

작은 웃음을 남긴 루드바하의 모습이 그의 신력과 함께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혼자가 된 아를의 시선이 다시 처음 향했던 외궁의 어느 창문을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봤을까.

이내 쓴웃음을 삼킨 아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유파시드의 신력 덕분에 거의 다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 시뻘건 피를 뿜어내느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 아픔이었다.

* * *

“가기 싫습니다, 르베나.”

어느새 침대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꼭 쥐고 말하는 루드바하를 보며 르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곧 아침 해가 뜰 거고 루가 들어올 거예요, 루드.”

달래는 듯한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울먹이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곧 매일 함께할 텐데…….”

이윽고 조금 부끄럽다는 듯 말하는 루드바하를 보며 르베나가 어느새 갈아입은 편한 드레스 차림으로 머리를 대충 묶으며 말했다.

“매일 함께하는 건 부부들이나 하는 거죠. 게다가 루가 알게 되면 모두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사람들이 제 일에 집중하게 되는 건 싫어요. 그러니……!”

머리를 다 묶은 후 루드바하를 바라본 르베나의 시선이 떨린 건 그때였다.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은 듯 루드바하가 굳어 있었던 것이다.

“…루드?”

르베나가 의아함에 그를 부르자 루드바하가 무엇인가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물었다.

“르베나, 우리… 어제 하루를 같이 보냈습니다. 그대와 전 연인이고. 그러니까 그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르베나가 성의 없이 자신의 몸을 풀며 대답했다. 확실히 안 쓰던 근육들을 너무 갑자기 오래 쓴 탓인지 여기저기가 아팠다.

“글쎄요.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목을 이리저리로 돌리며 답하는 르베나의 말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루드바하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관절이 굳은 사람처럼 걸어와 르베나의 이마에 뻣뻣하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오후에 유안과 라웅을 데리고 정식으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따 봐요, 르베나.”

마치 연기를 하듯 어색한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이상함을 느낄 찰나 루드바하가 억지로 짓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새벽이슬을 맞고 들어와 침대 속에서 한참을 버티던 그가 떠나니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뭔지 모르게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또 볼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르베나는 다시 뭉친 근육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긴 밤이 지난 후 시작되는 아침이었다.

“르베나 님!!”

르베나가 들어서자 밝은 얼굴로 달려오는 헬리오가 보였다. 언제나 르베나를 조금 어려워하던 헬리오였건만. 그동안 저지른 일이 파벤더의 세뇌 때문임이 밝혀지자 아이는 마음의 짐을 던 듯 가벼워 보였다. 그런 헬리오의 얼굴을 본 르베나도 덩달아 조금 안심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모인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르베나는 루드바하가 떠나자 곧바로 연무장에 나가 몸을 풀고 마력을 점검했다. 혹시나 어젯밤의 일로 다친 곳이 없나 꼼꼼히 점검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루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제노스를 도와 일을 본 다음 칸과 함께 점심을 먹고 이곳으로 향했다.

넓은 응접실 안에는 르베나의 모든 측근과 헬리오 그리고 젠에서 정식으로 방문한 루드바하와 유안, 라웅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르베나!!”

들어서는 르베나를 보자마자 그녀를 안으려 달려들다 아를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그 자세 그대로 루드바하의 신력에 묶인 바흐란 왕자까지. 넘어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눈동자만 어색하게 굴리는 바흐란을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왕자님. 신력이 듣던 것보다 많으시네요. 아직 쓰지는 못하는 거 같지만.”

그리고 홀연히 그 옆을 지나는 르베나의 모습을 확인한 바흐란의 몸이 마저 바닥에 넘어졌다. 그제야 루드바하가 신력을 푼 탓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황제를 한심하게 바라본 유안의 시선을 모두가 모른 척 넘어갔다.

“칸 님은요?”

책을 잔뜩 들고있는 아한의 질문에 르베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들어오실 거야.”

그리고 르베나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칸이 루안과 함께 들어섰고,

“팅~!”

팅이 칸의 품에서 나와 쪼르르 르베나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디오니스의 많은 이들이 오랜만에 본 팅과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럼 ‘보토니에’와의 전쟁 준비 상황을 본격적으로 점검해 보죠!”

모두를 향해 들려온 라웅의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두 나라의 오랜 회의가 시작되었다.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는 ‘보토니에’의 흔적으로 보아 멀지 않은 전쟁.

젠과 디오니스는 서로의 전력을 확인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웅과 다한, 아를은 전술에 관한 부분을 끊임없이 확인했고 바흐란은 자칸의 상황에 대해 칸, 루드바하와 함께 의견을 이어 나갔다.

“루안도 꽤 큰 전력이 될 테니 저와 함께 디오니스의 최전방에 설 겁니다.”

그리고 얼추 회의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칸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의 말에 루드바하가 루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노력한 세츠라고는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훌륭하네요.”

담백한 루드바하의 칭찬에 루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루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바흐란이 휴식을 위해 나온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물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루안 자네 부모님 중에 자칸인이 계신 건가?”

갑작스러운 바흐란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루안에게로 향했다. 사실 모두가 루안의 피부를 보고 궁금해하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있던 칸이 크게 웃으며 루안에게 말했다.

“하하.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분명 그리들 생각한다니까!”

칸의 웃음이 조금 민망했는지 입을 삐죽거린 루안이 바흐란을 보며 답했다.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잘 모르겠는데 원래 제 피부는 매우 흰 편입니다.”

들려온 그의 뜻밖의 대답에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자 루안이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 낯을 가리는 루안의 모습을 익히 아는 칸이 자상한 미소를 띠고 대신 답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약해 보이는게 싫다고 어느 순간부터 햇볕에 나가 살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흰 피부라 조금만 햇빛을 안 봐도 금방 하얘지죠.”

칸의 말에 모두가 그렇구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흐란만은 자신을 향해 말을 높인 칸에게 정중한 요청을 했다.

“르베나의 아버님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간 무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바흐란 왕자의 말에 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를한에서부터 르베나의 곁에 있던 바흐란 왕자의 눈빛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한 바흐란의 요청이 귀여울 수 밖에. 하지만 대답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거 같은데.”

“자주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바흐란 왕자를 편히 대하실 필요가 있나 싶네요.”

동시에 들려온 아를과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의 매서운 눈으로 둘을 노려보았고 곧 모두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되는 전쟁을 앞두고 함께하는 시간이 왜인지 모두에게 더욱 소중해진 탓이리라.

“모두 장시간 수고하셨으니 괜찮다면 저녁 식사를 하고 가시면 어떨까 하는데.”

이후 여러 근황과 수다가 오고 간 후 르베나가 모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바흐란이 먼저 답했다.

“난 이제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디오니스에 있을 예정이야. 자칸은 스릴 공주와 젠의 협력으로도 이젠 충분해서. 르베나 덕분에 검기를 쓰는 기사들도 많이 늘었고.”

바흐란에게 익히 들었던 내용이라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칸에 워낙 출중한 기사들이 많아서 빠르게 익힐 수 있었던 거죠. 아무튼, 디오니스 본궁에 손님방을 마련하라 했으니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르베나의 태도가 조금 서운한 바흐란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스치듯 지나가고 모두가 곧 다가올 전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오늘의 기쁨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르베나 님!”

벌컥 문이 열리며 시녀 루가 다급한 얼굴로 들어선 것이다. 언제나 눈치껏 예의를 잘 지키는 루였기에 르베나는 그녀를 탓하기 전 차분하게 용건부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루?”

그러자 루가 떨리는 손으로 르베나에게 무엇인가를 전하며 말했다.

“르베나 님께 온 서신들을 정리하다 이걸 보았어요. 근데 바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루가 전한 서신을 본 르베나의 시선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서신의 앞에 ‘다니아’의 모양이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던 것이다. 이에 르베나가 서신을 열자 모두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가짜 다니아는 귀엽더군요, 르베나 왕녀님. 물론 그걸로 나를 추적할 생각이었다면 우습지만 말이죠. 되려 그걸로 그대의 전력인 아벨디온의 한 축을 꺾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아, 그리고 혹시 지금쯤 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너무 좋아하진 마세요. 그대들이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3일 뒤. 해가 뜨는 시간. ‘보토니에’는 디오니스의 ‘다니아’를 찾으러 갑니다. 이렇게 미리 알려 주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 ‘보토니에’는 필요없는 살상을 줄이기 위해 디오니스를 제외한 어떠한 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 말인즉. 어떤 나라도 디오니스를 돕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디오니스에서 알아서 협력해 준다면 피비린내가 날 일도 없겠지요.

부디 그대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립니다.

‘보토니에’의 파벤더로부터.]

서신을 읽은 모두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고작 3일. 이제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서신을 들고 있던 르베나의 붉은 시선은 아주 오래도록 그곳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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