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19화 (219/276)

219화

제4장. 르베이나 (39)

침대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모든 것이 루드바하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살짝 떨리는 매혹적인 눈매와 자신으로 인해 붉어진 채 살짝 벌어진 입술. 긴장으로 인해 가쁘게 내쉬는 호흡과 그에 따라 들썩이는 그녀의 몸.

루드바하가 그대로 그녀의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제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과 같은 침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렬하게 뛰어 대던 심장은 그 대상이 르베나라는 것을 깨닫자 아프도록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루드바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제 입술을 받아들이는 르베나의 입술이 따뜻해서, 뜨거워서, 그리고 달콤해서.

수없이 반복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목말라서. 루드바하는 탐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계속 삼키고 또 삼켰다.

“…하.”

그리고 잠시 떼어진 둘 사이의 숨결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가빠진 호흡과 살짝 뜬 눈 사이로 보이는 일렁이는 불꽃이 그의 안에 도사리는 무엇인가를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르베나의 입술을 양껏 삼킨 루드바하가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머리를 제게로 살짝 고정했다. 그리고 더 깊게, 더 마음껏 그녀의 입술을 느끼며 다른 손을 르베나의 허리로 가져갔다. 얇은 드레스 위로 잘록한 그녀의 허리선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곳에 머물러 있는 입술과 손의 거리감이 아쉬워졌다.

“…르베나.”

잠시 뗀 입술마저 그녀의 이름을 외쳤고 그 잠시의 공백도 참지 못한 입술은 다시 그녀의 목을 다급하게 찾았다. V자로 파진 드레스를 따라 그녀의 부드러운 턱선과 길고 가는 목을 따라 루드바하가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폭주하기 전의 신력처럼 전신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벗어나 그 아래 목으로 향하자 알 수 없는 감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생소한 감각은 르베나의 아랫배를 살며시 감돌았다. 순간 허리에서 조금 더 올라온 그의 손이 아무도 닿은 적 없는 곳을 향했을 때.

“…흣.”

르베나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소리가 자신의 목을 타고 울렸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루드바하가 상체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기사단에서 수없이 봐 온 남성의 맨몸. 르베나에게 그것은 잘 단련된 누군가의 흔적일 뿐 결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옷을 벗는 움직임에 따라 보이는 그의 잘 짜인 복근이 처음으로 묘한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르베나조차 자신이 뭘 기대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셔츠까지 벗은 그의 몸이 뜨거운 열기를 안고 가까워졌을 때. 그의 손이 분주하게 르베나의 온몸을 어루만질 때, 르베나의 손 역시 그의 상체를 거리낌 없이 쓸고 매만지기 시작했다.

손과 입술로 르베나의 전신을 느끼던 그가 풀리지 않는 갈증이라도 채우듯 이윽고 그녀의 목선부터 허리까지 겹겹의 끈으로 조여진 드레스 끈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툭, 투두둑. 드레스의 시접이 뜯어지는 소리였을까? 루드바하가 천천히 그녀의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온전히 닿은 서로의 몸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만족스러움도 잠시,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아직 채워지지 않아 르베나는 조금 괴로워졌다.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루드바하는 모든 이성이 마비되는 아찔함을 느꼈고 작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져 보이는 르베나의 몸이 아름다워서. 자신에게는 없는 굴곡이, 부드러움이, 그 생경하고 떨리는 감각이 눈부셔서.

“…하, 르베나.”

달뜬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는 루드바하의 입술이 르베나의 심장을 담은 곳으로 향했다.

드레스가 벗겨진 그녀의 몸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생각보다 선명해 루드바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이 더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 흣! 루드.”

순간 처음 느끼는 감각에. 누군가의 손이, 입술이 처음 닿는 그곳의 느낌에 르베나의 입에서도 뜨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멈출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 좀 더 르베나의 부드러운 그곳을 제 입안 가득 머금고 느꼈다.

이윽고 그의 손이 점점 르베나의 아래를 향하자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가쁘게 섞여들기 시작했다. 단정하고 다정한 키스로 시작했던 처음은 없었다. 처음으로 타인의 손길이 닿은 몸의 군데군데가 뜨겁게 타올랐고 서로를 향한 애타는 몸짓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윽고 스쳐 가는 온몸의 마찰이 거세어지기 시작하며 자꾸만 조여들 듯 퍼지는 야릇한 감각에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함께 몸을 내던졌다. 동시에 르베나의 방 안 가득 정제하지 못한 검붉은 마력과 금빛의 신력이 사정없이 뒤엉켜 뜨거운 온기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 * *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동그란 눈동자는 수많은 불안과 의문을 담고 있었고 자신과 마주 잡은 두 손엔 미처 감추지 못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런 그녀가 이 순간까지 사랑스러운 자신이 유안은 조금 우스웠다.

“그냥.”

유안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묻어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다정스레 향했다.

“별말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유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루안 공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젯밤 일 잊은 거 아니지? 나 유안을 책임질 행동을 했어. 그러니까 기쁘게 책임질 거야.

절대로 딴생각은 용납 못 해. 내 아이를 다섯 낳을 때까지는 벗어날 수 없어.”

자칫 엄하게 말하는 루안 공녀의 모습에 유안이 작게 미소 짓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낳는 건 안타깝게도 여성만이 할 수 있습니다.”

루안의 말을 듣고 아차 싶은 루안 공녀가 작게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러면 말을 바꿀게. 나랑 유안이 낳은 다섯 명의 아이가 장성해서 시집 장가를 갈 때까지는 날 벗어날 수 없어.”

말을 마치고 슬쩍 유안의 눈치를 보는 공녀의 모습에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어째 기간이 더 늘어난 것 같네요.”

유안이 시치미를 떼는 루안에게 말하며 그녀를 제 품 가득 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가 좋았다. 언제나 풍기던 달콤한 향기도 좋았다. 안으면 제 가슴께에 오는 그녀의 동그란 머리가 그리웠다.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을 두고 그 오랜 시간을.”

그래서였을까.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을 흘려버린 자신의 품 안에서 루안 공녀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이 움찔거림조차 예뻐서. 그녀를 밀어냈던 그동안의 시간이 이제는 더없이 우스워져서. 유안은 아끼지 않았다.

“좋아합니다, 당신을. 그리고 나 역시.”

유안이 어느새 눈물이 고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안 공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날 책임지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웃어 보였다. 근사한 미사여구도, 절절함도 없는 밋밋한 고백. 그게 뭐가 그리도 좋을까. 자신의 말을 듣고 어느 빛보다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유안은 제 안에 차곡차곡 담았다.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할 때마다 꺼내어 보기 위해서.

“공녀는 사실 쌍둥이로 태어났네. 다른 아이는 루안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넘치는 신력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안전한 성장을 위한 신력의 봉인을 위해 잠시 영지에 내려가게 했는데… 그때 영지가 습격당하며 아이가 사라졌네.”

유안이 제 품에 얼굴을 비비며 웃는 루안 공녀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네. 무엇보다 쌍둥이 동생의 실종에 많이 힘들어하던 루안과 부인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 상황이 좋지 않았지.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아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네. 혹시나 그 아이가 루안의 쌍둥이가 아니면 그 실망을, 좌절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거든. 무엇보다 루안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고 말이네. 신력이 많던 쌍둥이 동생이 사라지고 신력이 없는 루안은 성장하며 부쩍 위축됐고. 그런 아이를… 내가 얼마나 몰아붙였는지 잘 알기 때문에 말이네.”

“유안 냄새 너무 좋아.”

제 옷깃에 코를 박고 킁킁대는 루안을 보며 유안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그래서 그란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대신 가서 확인해 주기를 부탁했네. 그때 루안의 나이가 열다섯, 자네가 열아홉이었던가. 아이가 예민한 나이라는 핑계로 조심하느라 그란델을 혼자 보냈지. 그땐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유안 우리 수도에 집 살 거지? 결혼식은 최고로 화려하게 하자! 아, 아니다! 소박해도 괜찮아. 유안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하자!”

뻔히 보이는 속마음을 숨기는 루안이 사랑스러워 유안이 그녀를 다시 제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런데 그란델이 그 아이가 루안의 쌍둥이 동생이 맞는 거 같다는 서신을 보낸 후 습격을 받았네. 내 실수였네.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서. 그것만으로 감사해서. 또다시 습격을 당할 가능성 따윈 염두도 하지 않은. 애초에 내가 아니라 그 아이가 누군가의 목표일 가능성을 염두해두지 않았으니 말이네. 그래서 힘이 없는 그란델이. 내 아이를 보호하며 그렇게… 죽어갔을 줄을 미처 몰랐던 것에 대해…….”

루안을 안은 유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멀리 출장을 다녀온다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의 온기가 생각난 탓에.

“용서해 주게. 자네의 아비를 그리 죽게 했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어린아이 하나 보호해 달라 부탁하는 내 청을 들어주기 위해. 수많은 자객의 방패막이가 되어. 두렵고, 고통스럽고, 비통한 마음이었을 텐데……. 결국 눈도 감지 못한 채 자네를 남겨두고 내 아이를 구하며 그렇게… 죽게 했네.”

툭. 유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순간 이상함을 느낀 루안이 고개를 빼려 하자 유안은 그런 루안을 더 꼬옥 안았다. 그러자 자신을 안아주던 아버지의 큰 품이 생각났다.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더 그 품이 그리워졌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날 용서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나의 딸인 루안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아이와 결혼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아서. 아버지의 시체를 봤을 때도 흘리지 못한 십수 년의 눈물이 하필이면 지금 흘러서. 유안은 불안해하는 루안을 안은 채 울어 버렸다.

마지막까지 바보같이 착했던 아버지가 미워서. 그럼에도 공작의 아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어린아이라 보호했을 그의 아버지를 너무 잘 알아서.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때려본 적도 없던 아버지가 그 순간 얼마나 두려웠을까 미치도록 가여워서.

“근데 이젠 이 사람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요. 죄… 송해요.”

그럼에도 품에 안은 이 여자를 어떠한 이유로도 이제는 놓을 수가 없어서. 그게 미안해서.

* * *

“하-.”

어느새 긴 밤이 지나 새벽을 반기듯 불어오는 바람에 정원을 걷던 아를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여름이 오긴 하는지 따뜻한 바람의 간지럼이 기분 좋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워 한 번 피식 웃은 아를의 시선이 그리 높지 않은 외궁의 어느 창문을 향했다.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방. 넌 좋은 꿈을 꾸고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아를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배었다.

루드바하가 다녀간 후 몇 시간. 푹 자고 일어난 몸의 회복이 이렇게나 빠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제일 먼저 르베나를 보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새벽인 시간대가 조금 아쉬워졌다.

“유파시드라더니 실력이 좋긴 하네.”

씁쓸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를이 한 걸음을 더 옮겼을 때였다.

“그건 맞지만 벌써 움직이면 안 될 텐데요.”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아를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가오는 이를 보며 아를의 눈에 복잡한 빛이 어렸다.

“분명 이른 아침에 제게 다녀가신 거 같은데. 늦은 새벽이 된 지금 왜 디오니스에, 그것도 아까와 같은 차림으로 계시는 건지?”

차가운 아를의 목소리에 루드바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면 됐습니다. 아를 경이 아니라도 그녀의 사람이라면 똑같이 했을 테니.”

둘 사이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를이 느끼는 불쾌하고 끔찍한 감각은 차라리 그를 죽음의 목전에 뒀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게끔 만들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아를 경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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