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제4장. 르베이나 (38)
처음 보자마자 눈빛으로 전해지는 그의 고통은 선명했다. 며칠 만에 본 그는 눈에 띄게 수척했고 언제나 빛나던 눈은 어둠에 잠식되어 생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아를을 치료하는 얼굴에는 고통과 분노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르베나의 방에 온 이후 내내 눈치만 보는 모습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데도 그는 자꾸만 눈치를 봤다.
그리고 모든 걸 고백한 지금. 자신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그 모습이. 눈물을 떨구며 할아버지란 사람의 죄를 고백하는 그의 모습이.
“…하.”
어째서 조금 전 느껴졌던 분노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걸까.
곧 르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건너편 의자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과 눈 맞추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 붉은 눈이 아름답다 수없이 말해 주던 사람. 오랜만에 나눈 키스가 못내 아쉬워도 그 마음마저 접고 자신을 안으며 사랑한다 말하던 사람.
르베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큰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는 그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서서 그를 안으니 자신의 배에 기대어오는 그의 머리가 생각보다 기분 좋은 무게로 다가왔다.
“…르베나.”
아직도 떨리는 목소리가 가여워 르베나는 그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적어도 마력은 아니라는 거. 그럼 신력밖에 없잖아요. 레턴 전하도 아한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중 이만한 세력을 꾸밀 수 있고 헬리오의 신력을 밖에서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으면서. ‘다니아’에 대한 비밀까지 모두 알 정도의 사람. 그리고 매개체를 통해 아를을 사지로 몰아넣을 정도의 폭발을 일으킨 힘을 가진 사람.”
르베나의 말에 흠칫 몸이 떨리는 루드바하를 르베나가 조금 더 세게 안으며 말했다.
“나나 당신 정도면 가능할까? 그런데 우리 둘이 아니라면 유파시드 정도면 가능할까… 하고.”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르베나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대도 그게 루드의 할아버님일 줄은 몰랐네요. 정말.”
르베나의 말에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던 루드바하의 저항이 멈추더니 이내 그의 얼굴이 닿아있는 배가 젖어왔다. 르베나가 조심스레 그를 제게서 떼어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마주 보았다.
안그래도 어두운 그의 눈이 쏟아지는 눈물로 더 깊은 밤하늘처럼 보였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르지 않아 르베나가 자신의 손을 그의 얼굴에 가져갔다.
스윽- 부드럽게 닦아도 계속 흐르는 그의 눈물이 아팠다. 그래서 살짝 웃어보인 르베나가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요.”
르베나의 말에 눈물을 흘리던 얼굴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바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이에 다시 한번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르베나가 말했다.
“당신이 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의 할아버지… 유파시드의 수명으로 볼 때 얼굴조차 보지 못했을 그 인간이 한 짓인데. 그게 뭐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르베나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호적상 친 할아버님입니다, 파벤더는. 그가 ‘보토니에’를 꾸려서 이제껏 그 많은 악행을……!”
“그래서 용서할 건가요, 당신은? 할아버님이니까? 영웅으로 죽었다 알려진 유파시드니까?”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르베나. 저는 당신을 위해서도. 또 더 나은 젠과 후대의 유파시드들을 위해서도 절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나에게 그의 피를 이어 줬을진 모르지만 내게 그는 그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르베나 말대로 얼굴조차 본 적이 없으니까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건가요?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 그를 땅에 무릎 꿇리고 그가 지은 죄를 모두 갚게 하면 될 뿐인데.”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풍랑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르베나,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칸 님이… 제노스 전하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러니까요. 그렇게 모두를 힘들게 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그를 용서할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피를 이어받았단 이유만으로 당신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 울 필요는… 없어요. 내 분노는. 그리고 모두의 눈물과 분노는. 정당한 대상을 향할 테니까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언제나처럼 곧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선명했다. 그 선명함이, 그 흔들림 없는 곧음이.
루드바하의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툭. 다시 떨어진 그의 눈물을 르베나가 닦아 주었다. 투둑. 또 한 번 투두두둑. 그러기를 여러 번.
르베나는 가만히 그의 앞에 앉아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루드바하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저… 버리지 않을 건가요, 르베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묻는 루드바하의 물음에 르베나가 말했다.
“당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서, 내 연락을 받지 않아서 화가 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사실은… 나도 두려웠어요. 당신이 내게 등 돌린 걸까 봐.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봐. 나 또한 그게 겁났어요. 당신을 본 순간 그걸 깨달아서 당황… 스러웠을 뿐이구요.”
르베나의 말에 마구 고개를 저은 루드바하가 말했다.
“죽어도 그런 일은 없어요, 르베나!! 난 죽을 때까지 그대만 사랑할 거예요. 이 마음에는 그대만 담을 거예요. 아주 만약 제가 당신에게 등을 돌린다면 파벤더에게 당해 흑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해 줘요. 그거밖에는 방법이 없을 거거든요.”
조금 전까지 파벤더의 존재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군 사람은 어디 갔는지. 어느새 흑마법을 운운하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그의 말이 우스워 르베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그제서야 젖은 얼굴에 간신히 미소를 담았다.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은 르베나를 보고는 벌떡 놀라 일어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무릎 꿇지 말아요, 르베나. 그대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걱정스레 자신의 무릎을 살피며 말하는 루드바하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당신도요, 루드. 당신도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 사람이 아니에요.”
온기가 듬뿍담긴 르베나의 말에 멈칫한 루드바하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봐주는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모든 어둠을 한순간에 몰아내는 말을 전해 주는 입술이 그곳에 있었다.
루드바하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촉.
“사랑해요, 르베나.”
그의 고백에 르베나가 가만히 미소 짓자 루드바하가 조금 더 르베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촉.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지금 이 방에 올 사람이 있나요?”
루드바하의 억눌린 음성에 르베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위가 어두웠다. 아니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안이 어두웠다.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마주 보았다. 어느새 깊어진 그의 눈이 이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게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 *
타타탓!! 작고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리자 곧 테라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유안한테 협박하지 마세요!! 유안은 잘못 없어요!! 제가 매달렸어요. 제가 함께 있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러니 유안에겐 제발……!”
일어나자마자 달려온건지 헝클어진 머리로 테라스에 들어선 루안 공녀가 쉬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다 재빠르게 두리번거리고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안을 발견하고 얼른 그에게로 뛰어갔다.
“유안!! 다치지 않았어? 아버지가 때렸어? 아니면 협박이라도 당했어? 응, 응?”
빠르게 유안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다다다 말을 쏟는 루안 공녀를 보며 유안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공녀님,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진정 좀 하세요.”
정말 괜찮은지 한 번 더 유안을 살펴본 루안 공녀가 곧 헛기침하며 건너편에 앉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공작을 바라보았다.
“유안이 괜찮은 걸 확인했으면 좀 정돈을 하고 왔으면 좋겠구나, 루안. 사람들 보기 부끄럽지 않으려면.”
공작의 말에 문득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루안 공녀가 놀라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에밀리, 빨리빨리 나 머리 좀 빗겨줘. 옷도 준비해 줘. 제일 예쁜 걸로!”
공녀의 큰 목소리에 공작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 아이가 저리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자네가 떠나고 처음이군.”
공작의 말에 유안이 피곤한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본 룩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 얘기는 모두 끝났으니, 나머지는 자네 몫이네. 일단은 루안이 눈치채지 못하게 함께 식사나 하면 어떨까 하는데.”
일어선 룩센 공작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유안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공작이 테라스를 벗어나며 말했다.
“정리가 좀 되면 오도록 하지. 안내는 집사가 해 줄 테니.”
곧 유안을 남겨둔 공작이 떠나자 텅 빈 응접실엔 그만 홀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방금 들은 이야기의 여파가 너무 심해서. 웬만한 일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 유안은 넋을 잃은 듯 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떠오른 해가 테라스 가득 퍼져오고 그 온기에 어울리는 루안의 목소리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 * *
마주치는 입술의 뜨거움에 온몸이 데일 것만 같았다. 쉼 없이 다가오는 루드바하의 입술이 전하는 열기가 그랬다. 끊임없이 틈을 좁혀 오는 루드바하의 몸을 그래서 르베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루드바하의 넓은 등을 두 손으로 가득 안았다. 입술의 마찰이 내는 조금은 촉촉한 소리가 왜인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푹. 조금씩 뒤로 밀려 어느새 침대에 눕게 된 르베나의 위로 루드바하가 다가왔다.
침대 가득 흐트러진 르베나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담은 루드바하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그러면서도 르베나에게서 떼지 않는 시선은 데일 듯 뜨거웠다.
“싫으면 지금 얘기해요, 르베나.”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는 루드바하의 눈은 말과는 다르게 싫다는 뜻을 전혀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방 안이 어두울 뿐, 아직 대낮이었다. 이 시간에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르베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그녀의 이성을 거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르베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루드바하의 얼굴이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 움직이는 침대의 울림이 묘한 떨림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