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제4장. 르베이나 (37)
화려함보다는 절제미가 돋보이는 고급스러운 저택. 그중 커다란 테라스 전체를 응접실로 꾸민 곳에 앉아 있는 손님을 흘끗흘끗 보는 시녀들의 시선 속. 찻잔을 들어 올린 그가 말했다.
“이곳은 여전하네요.”
그의 말에 저택의 주인, 룩센 공작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한데 이상하군. 우리 루안이 없는 집에 자네만 있으니.”
룩센 공작의 말에 유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유안의 얼굴을 한번 본 룩센 공작이 마지막 다과를 내온 시녀가 나가자 옆을 지키고 선 집사에게 점잖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으니 아침 식사를 좀 차리라고 하지. 주위에 사람을 물리도록 하고.”
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공작과 유안을 한 번씩 바라본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공작님. 천천히 식사 준비를 하라 이르지요.”
희끗희끗한 머리가 무성한 집사가 테라스를 벗어나자 유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는 말했다.
“폰다 영감은 아직도 허리가 꼿꼿하시군요.”
유안의 말에 정정한 모습의 늙은 집사를 보며 룩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저 허리라도 꼿꼿하게 아프지 말아야지.”
어렴풋이 집사에 대한 잔잔한 애정을 드러내는 룩센 공작의 말에 유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침의 정적이 이슬처럼 내려앉았다. 공작이 말없이 차를 두어 모금 마셨을 때였을까. 유안이 입을 열었다.
“유파시드께서 향후 100년은 건재하실 테고. 그동안 제가 살아 있다면 저 역시 남에게 손 벌리고 살지는 않을 겁니다.”
문득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유안의 말에 룩센 공작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밤새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과 똑 닮은 공작의 눈을 마주 보며 유안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모아둔 돈도 제법 있으니 공녀님의 성에 차는 저택을 구입하겠습니다. 그래 봐야 이 저택만 하진 못하겠지만요.”
유안의 말에 룩센 공작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침묵이 뜻하는 바가 거절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히 느껴져 유안이 뜨거운 찻잔을 꽉 쥐었다.
“그란델은 내게 형제 같은 사람이었네.”
하지만 갑작스레 나온 아버지의 이름에 유안이 조금은 놀란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더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룩센 공작이 눈을 뜨고는 유안을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에는 되돌릴 수 없는 어느 순간과 어떤 사람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지독하게 묻어났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공작위를 받은 후 실력이 좋은 사무관이 필요해진 나는 황궁에서 일한 적 있다는 그를 채용했지. 그는 왜 황궁을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을 잘했다네. 언젠가 이유를 물으니 그리 답했지. 아들이 커서 꿈을 펼치는 데는 답답한 황궁보다는 아낌없이 지원해 줄 공작가가 낫지 않겠느냐고.”
룩센 공작의 말에 떠올리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린 유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유안의 얼굴을 보며 룩센 공작이 씁쓸한 듯 옅게 미소지었다.
“그란델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네. 집사 다음으로 내가 신임하는 자였고 때로는 내게 위로가 되어 줬으며 때로는 형제가 되어 주었지.”
유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한 채 조용히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신임, 위로, 형제. 그런 단어로 정의하는 사람을 어째서 죽게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자네가 전에 이 집을 떠나며 그랬지. 고작 평민 출신인 자네는 평생 이곳에 섞여들 수 없을 거라고.”
자신의 아픈 구석을 찌르는 공작의 말에 유안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그런 유안을 보고 쓴웃음을 삼킨 공작이 말했다.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백작위까지는 무리라도 후작위 정도는 가능하네. 아마 자네가 지금처럼만 일한다면 유파시드께서도 자네를 백작위까지 올려 주실지 모를 일이지. 대신 조건이 있네.”
아버지의 얘기를 하다가는 갑자기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룩센 공작.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 유안이 차갑게 조소하며 말했다.
“공녀께서는 이미 제 사람이 되었고 저 또한 이미 그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작위가 아니라 백작위를 주신다해도 이제는 포기 못 합니다. 아니, 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아버지의 일을 들먹여도 제 결심은 이제 변하지 않습니다.”
작위 따위를 위해 루안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젯밤 이미 답은 정해졌다. 그 정도 각오 없이 20년 동안 품어온 자신의 마음을. 그 오랜 시간 억눌러 온 제 사랑을 감히 잡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유안의 얼굴을 본 룩센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조건은 루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또다시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공작의 말에 유안의 시선이 차갑게 그를 향했다.
“내 조건은… 자네가 그란델의 마지막에 대해 들어주는 것이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유안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렸다. 곧 그의 눈을 본 룩센 공작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나를 용서한다면. 루안과 결혼하게. 하지만 날 용서하지 못한다면 내 딸과의 결혼은 어젯밤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불가하네.”
공작의 말에 살짝 떨리는 제 손을 잡은 유안이 잠시간의 고민 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래서 도망쳤던 그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드디어 오고야 만 것이다.
* * *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르베나.”
텔레포트를 통해 의무실에서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르베나는 오늘 피곤하니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는 얘기를 루에게 미리 전했다. 급한 일은 통신구를 통하라는 지시까지. 그 후 루가 사라지자 몇 겹의 방음 실드를 치는 르베나를 보며 루드바하가 만류한 것이다.
하지만 루드바하의 말에도 불구하고 르베나는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
“제 방에서 뭘 하든 제 맘입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가만히 그녀만 보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 해가 올라오는 시간. 르베나는 방음 마법을 친 다음 커튼을 모두 닫았다. 어두워진 침실 안. 르베나가 침대 앞 테이블에 자리하자 슬쩍 눈치를 본 루드바하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절 때리실 건가요?”
꼬리가 있었다면 축 처져 있을 게 분명한 그의 모습에도 르베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런 르베나를 슬쩍 확인한 루드바하 역시 말할 자격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르베나의 건너편에 옮겨 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르베나가 친 마법 덕분에 주변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방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종종 고문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르베나가 자신에게 하니 조금 무섭다가는 차라리 좀 맞고 용서해주길 바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네요, 역시. 르베나랑 함께 있는 건.”
이런 상황에서마저 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드디어 그를 향했다. 자신을 향하는 르베나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그게 정말 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루드바하는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정적에 휩싸인 공기가 그 무게를 더해갈 즈음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연락하지 못해서. 심지어 르베나한테 온 연락조차 받지 않아서… 미안해요, 정말.”
루드바하의 사과에도 르베나는 말이 없었다. 루드바하 역시 그런 르베나의 얼굴을 차마 볼 용기가 안 나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아를 경은 이제 괜찮을 거예요. 너무 집중하느라 르베나가 서 있는 것도 몰랐지 뭐예요. 아, 그리고 젠의 황제가 디오니스 궁으로 텔레포트가 가능하단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누가 들어 올까 봐 가려던 거였어요. 르베나를 피하려던 게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르베나가 화났을 만한 모든 경우에 대한 핑계를 늘어놓는 자신이 어색했다. 황제는 다른 사람의 핑계를 듣는 사람이지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 순간, 오늘 이 방에서 처음으로 르베나의 입이 열렸다.
“유사시를 대비해 텔레포트를 허락한 겁니다.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조차 선은 확실히 긋는 것이 그녀다워서 조금 웃어버린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요. 오늘 같은 상황이 생길까 봐 생긴 예외라는 거…….”
언제나 부드럽지만, 자신감이 넘쳤던 그답지 않게 부쩍 위축된 말소리에 르베나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 약간 떨리는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까… 있었다면 봤겠지만, 아를 경의 상처를 붙잡고 있던 힘은. 변형된 신력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에 물든 신력이죠.”
루드바하의 말이 놀랄 만도 하건만 르베나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조금 용기를 얻은 루드바하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우연히 과거 유파시드들의 기록이 보관된 서고에 갔다가 한 유파시드의 기록을 봤어요. 모든 유파시드 중 유일하게 자신을 희생해 흑마법 단체를 와해시킨 영웅. 파벤더의 기록이었죠.”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춘 그가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보토니에’의 수장이에요, 르베나.”
마침내 고개를 든 그가 르베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얘기했다. 자신이 무얼 발견했는지. 요 며칠 무엇을 숨겨왔는지. 차분히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 르베나의 눈이 간간이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그녀는 루드바가 이어나가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아마도 그가 세력 확장을 위해 칸 님을… 포섭하려 했고 이에 실패하자 루아나 공주님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그리고 르베나.”
루드바하는 순간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르베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향하는 그 시선이 무엇이든 말할 용기가 되었다가도, 최후에는 모든 것을 잃을 절망이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 할아버님입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잠시 떨리는 르베나의 시선을 본 루드바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떤 것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제 뺨을 때리면 맞을 것이고 제 가문을 모욕해도 달게 받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파벤더의 죄를 그보고 물으라 하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줘서라도 평생에 걸쳐 갚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정당했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연한 두려움이 모래사장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그 정도로는 없어질 상처가 아님을 알기에. 그보다 깊고 아팠던 과거임을 알기에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버릴까 봐. 더이상 그를 봐주지 않을까봐. 두렵고 또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르베나에게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뱉고 나서 한참. 하지만 그녀는 여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너무 분노해서일까. 그보다 더 많이 당황해서일까. 아니면 정말. 너무 실망해 그를 버릴 준비를 하는 걸까.
“손은 왜 그렇게 떨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차분하게 흘러나온 그녀의 음성에 루드바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너무 분노하게 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건 자신이나 그녀나 매한가지인가 보다. 곧 루드바하가 계속 떨구던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리며 떨리는 목에 힘을 주었다.
“버려질까 봐요. 르베나가 날 버릴까 봐요. 이 순간조차 저는… 그게 가장 무서워서요.”
루드바하는 기다렸다. 르베나가 무슨 말이든 해 주길. 그것조차 그녀의 눈에 보였을까?
“‘보토니에’의 수장이 당신의 할아버님이라고요?”
전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루드바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르베나가 말했다.
“내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그 오랜 시간 무력한 어둠 속에 가둬놓은 게. 그래서 살아 있는 상태로 자신의 여자가 죽고 아이가 홀로 남겨지게 되는 모든 걸 지켜보는 고통을 준 게?”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힘겹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를 홀로 이곳에 남겨지게 한 걸로 모자라 내 나라의 ‘다니아’를 노린 사람이. 그래서 내 기사들을 죽이고 나를 수없이 많은 죽음의 경계까지 몰고 간 사람이… 루드, 당신의 할아버님이라고요? 그 얘기를 하는 건가요, 지금?”
르베나의 서늘한 말에 루드바하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고개에 한 번 더 힘을 주어 끄덕였다. 자신의 머리가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태어나 처음 알았다.
“…하.”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소리로 전해진 무거운 그녀의 한숨이 두렵고 아팠다. 그래서 그의 눈에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흘릴 자격조차 없는 무거운 죄가, 하나둘. 그렇게. 이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이별이 분명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