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제4장. 르베이나 (36)
[그는 젠의 유파시드가 계속 자신의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 했고 가족을 해치는 것은 정의에 위배되므로 어느 유파시드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강대한 마법사를 배출하는 마지막 걸림돌, 자칸의 왕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나날이 세력이 커지는 그들이 자칸을 습격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처참히 죽여 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협조할 수도 없는바.
나는 오늘 그와 정면으로 대결하려 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패한다면… 나의 후손들은 그에게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며 나는 내 아이들의 피에 숨겨진 신력과 마력의 힘을 봉인한다. 내 생명력을 쓴 봉인은 피를 통해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간절히 원하게 된다면. 자랑스러운 자칼의 생명력을 가진 내 후손이 그들의 피에 잠들어 있는 힘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은 나의 봉인이 깨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조심해라 나의 후손들아. 그는 보기보다 영악하고 사악하며 유파시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다. 그를 피해라. 그를 피해 자칸과 백성을 지켜라. 그것만이 너희에게 전하고 싶은 내 마지막 유언이다.]
거칠게 휘갈겨 써 거의 읽을 수 없는 마지막 페이지. 이제는 굳어 색이 변한 것은 분명 누군가의 피였다. 고서를 잡은 손의 떨림이 선명했다. 곧 루드바하가 가만히 동요를 감추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흐란 왕자.”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그 헬리오인가 하는 아이 때문에 디오니스의 궁에서 폭발이 일어난 건 아십니까?”
자신의 말에 놀란 듯 눈을 치켜뜬 루드바하의 모습에 바흐란이 실망한 듯 말을 이었다.
“그 결과 아를 경이 현재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 르베나가 도움을 청하려 유파시드께 연락을 드렸을 텐데요.”
약간은 책망하는 듯한 바흐란의 말에 계속해서 울리던 르베나와의 통신구 반지가 생각났다. 이에 안색이 파리해진 루드바하가 조금 다급하게 물었다.
“르베나는, 그녀는 괜찮습니까?”
루드바하의 물음에 바흐란이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있죠. 유파시드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파벤더… 아마도 보토니에의 수장일 그는 과거 젠을 대표했던 유파시드입니다. 또… 현 유파시드님의 할아버님이기도 하지요. 이 사실은 분명 르베나에게 충격을 줄 겁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이제 르베나를 포기하실 겁니까?”
바흐란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잠시 시선을 피했다.
유파시드들은 수명이 길다. 100년 정도는 우습게 사는 것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유독 일찍 죽었다고 알려진 파벤더. 루드바하는 할아버지란 그를 본 적조차 없다.
다만, 항상 들으며 자랐을 뿐이다. 그의 명성, 그의 정의, 그의 긍지에 대해.
그러나… 자랑스럽기만 한 줄 알았던 그가 르베나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녀의 아버지를 오랜 어둠에서 헤매게 했으며 결국 르베나를 궁지로 몰았다고 한다.
비록 죄가 대물림되지 않는다지만, 그럼에도 도의를 따지자면 그는 그녀를 포기해야 했다. 그가 의도치 않았어도 선대의 잘못으로 그녀가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으니. 자신에게 르베나를 볼 면목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난 그녀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운 겁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를 질책할 그녀를, 나를 원망할 그녀를 알면서도. 저는 그녀를 놓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일단 그대부터 말해 보세요. 나의 조부가 저지른 일로 자칸의 왕실이 제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루드바하의 질문에 바흐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왕실 차원의 입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녀의 궁에 큰 사고가 났고, 그녀의 사람이 다쳐서 르베나가 힘들어하는 순간… 그 순간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포기하세요, 르베나를.”
바흐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한기가 돋을만한 신력의 자락들이 펄럭였다. 방 안의 모든 것들이 구슬피 울며 펄럭일 정도의 신력. 바흐란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밖에 두고온 검을 생각할 정도의 신력. 모든 유리창이 부들부들 제 몸을 떨며 터져나가기 직전의 신력.
휘이--- 곧 눈 깜짝할 새 신력을 갈무리한 루드바하가 바흐란을 보며 말했다.
“내 조부를 저버리고 내 가문을 저버릴지언정. 바흐란 왕자. 나는 르베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해도. 나는 그녀를 놓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히 제 앞에서 제 연인을 입에 올리지 마세요.”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이 그를 보며 말했다.
“세츠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황제께서 지켜온 유파시드의 자리가, 아니 그 이름이 전해주는 모든 것이 흔들리겠죠. 제국이 흔들릴 것이고 다른 4개의 왕국은 그 여파를 피해갈 수 없을 겁니다.
불순한 무리가 있다면 전쟁이 날 수도 있습니다. 유파시드께서 당신의 조부를 외면하는 순간 말입니다. 그럼에도 르베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까?”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루드바하를 바라보는 바흐란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무슨 수를 써도 저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르베나가 포기하라고 한다면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들려온 바흐란의 질문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아프게 흔들렸다. 이를 본 바흐란이 말했다.
“저는 르베나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알게 되었거든요. 기적이 일어나 그녀가 나를 보더라도. 그녀는 결코 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르베나가 디오니스를 사랑하는 한 그녀는 자칸의 왕자와 혼인하려 들지 않을것이고 나 또한.”
잠시 말을 끊은 바흐란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그녀보다 자칸을 더 사랑하는 거 같으니까요.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제국의 황제이신 당신은 르베나를 위해 젠을, 황제의 자리를, 유파시드의 자리를. 그 모든 것을 포기하실 수 있으십니까?”
바흐란의 질문에 루드바하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제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어봤으면 좋겠군요. 알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도 날 지키는 귀들이 많아서요. 그리고 난.. 그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이 곧 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 말, 지켜볼 겁니다.”
바흐란의 말에 이번엔 루드바하가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대는 영원히 지켜보게만 될 테니.”
어느새 평소의 미소를 되찾은 루드바하. 그의 얼굴에 또렷한 결심이 새겨지는 순간을 바흐란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확고한 결심으로 우뚝 선 순간, 루드바하가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제게 이 방을 나갈 용기를 주어서.”
이어진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은 그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대가로 저는 평생 짝사랑만 하겠죠.”
창밖 멀리 보이는 어느 소정원이 왜인지 되게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며 바흐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휘익--!
열린 창문에 달린 커튼이 한차례 살랑 흔들리고 동시에 한 인영이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 가득 약과 포션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그 방의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티잉~!”
그가 깰까 조그마한 소리를 낸 팅이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를 향해 울었다. 곧 팅의 머리에 그의 큰 손이 부드러이 향했다.
“착하구나, 팅.”
그의 손으로 전해진 미약한 신력이 기분 좋아, 팅은 그대로 까무룩 아를의 배 위에 제 배를 깐 채 드러누워 잠들어 버렸다. 그린 팅을 보고 한번 웃은 그가 팅을 옆 쿠션 위에 조심히 올려놓고는 아를의 환부를 보았다.
엄청난 마력을 통해 잠재운 출혈. 하지만 그 상처를 꽉 붙들고 있는 힘.
곧 루드바하가 제 신력을 긴 실처럼 만들어 아를의 상처 부위로 흘려 넣었다. 루드바하의 신력이 닿자 다시 저항하듯 상처를 붙들고 늘어지는 힘에 아를이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루드.”
하지만 그가 자신의 언령을 외우자 그 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이 루드바하의 힘에 밀려 아를의 복부 밖으로 흘러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 힘이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한 번 살랑이고는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그것을 보고 표정을 굳힌 루드바하가 곧바로 제 신력을 이용해 아를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제법 많이 다쳤는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느새 늦은 밤의 한기가 물러나고 궁의 작은 인기척들이 깨어날 때쯤, 루드바하는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한번 신력으로 씻고는 아를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혈색이 조금은 돌아온 그의 눈이 언제 떠진 건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일부러 늦게… 오신 겁니까.”
잔뜩 쉬어버린 아를의 목소리에 루드바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 주니 고맙군요.”
그 말에 힘없이 피식 웃은 아를의 얼굴을 본 루드바하가 그의 눈 위로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좀 더 주무세요. 흘린 피의 양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를이 뭐라고 더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루드바하의 신력에 의해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떠오른 이른 아침의 태양이 방 안을 비추기 시작했다.
조금씩 분주해지는 궁인들의 발걸음 소리와 이른 아침의 상쾌한 바람이 이슬 냄새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루드바하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루드바하의 눈이 천천히 제 벽안을 드러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잠든 아를의 얼굴과 그 옆에서 통통한 배를 드러내고 잠든 팅의 모습을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작게 움찔한 루드바하가 작게 숨을 내어 쉬며 입을 연 것은.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겁니까, 힘들게.”
루드바하의 말에 문가에 서 있던 그녀, 르베나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 궁에 당신의 신력이 흘러들어온 순간부터요.”
르베나의 말에 한번 쓰게 웃어 보인 루드바하가 뒤로 돌아서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지키고 계셨던 거예요, 제가 도망갈까 봐?”
사뭇 장난스럽게 묻는 그의 질문에 표정의 변화가 없는 르베나가 답했다.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도망칠까 봐.”
그리고 들려온 르베나의 대답에 루드바하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어느새 완연히 아침을 맞이한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따뜻해졌다.
* * *
부스럭. 작은 인기척을 내며 일어난 유안의 시선이 제 옆에 잠들어 있는 루안 공녀를 향했다.
자신의 흔적이 잔뜩 남은 그녀의 몸을 이불을 끌어 올려 조심히 덮어 주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주었다. 어느새 이른 새벽의 공기가 그를 깨웠고 밤새 힘들었을 루안 공녀가 까무룩 잠에 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촉.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공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옷을 입고는 방을 나섰다. 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집. 유파시드의 최측근이자 사무관인 그의 월급에 터무니없이 작고 초라한 집.
“수도에 저택을 하나 사야겠군.”
이제껏 불만 없이 살았던 집을 나서며 작게 읊조린 그의 얼굴에 낯선 미소가 걸렸다. 현관 앞에서 그녀가 잠든 자신의 집을 한 번 바라본 유안이 또다시 중얼거렸다.
“공녀님 마음에 드실 만한 집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그리는 그의 눈에 사랑이 가득했다. 오래 참은 만큼 더 깊고 더 진한 감정이. 하지만 궁으로 가기 위해 앞을 향한 그의 눈은 삽시간에 식어 버렸다.
“일찍 출근하는군.”
제 집 마당에 서 있는 그, 룩센 공작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