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15화 (215/276)

215화

제4장. 르베이나 (35)

“꺄아!”

공녀가 소리지른 것과 동시에 마르망 백작의 그곳이 한 번 더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버렸다.

“그러니까 밤에 혼자 있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차가운 분노가 실린 음성과 함께 누군가의 겉옷이 루안 공녀의 위로 덮어졌다.

옅은 시가 냄새가 배어 있는 재킷. 겁에 질린 루안 공녀의 눈이 방금 제 윗옷을 벗어 덮어 주며 마르망 백작을 차버린 그, 유안에게 향했다.

“유안……!”

한 남자를 불구로 만들 만한 행동을 잘도 했으면서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떠는 공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유안과 마주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안도감으로 젖어 갔다.

유안이 루안 공녀의 앞에 서며 제 중심을 잡고 신음성을 흘리는 마르망 백작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신력을 흘려 주변에 투명한 막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루, 루안 공녀… 네 이놈!! 지, 지금 무슨 짓을… 일단 내 허리 좀! 허리 좀 쳐… 주게.”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는 마르망 백작을 본 유안이 그에게로 걸어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늦은 밤 공녀님 혼자 계신 정원에 만취한 상태로 들어와 감히 희롱하시다니요. 이 일을 룩센 공작님께서 아시면 어떻게 되실지 알고 그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계신지, 원.”

말투는 조금 느릿했지만 그의 시선에 박힌 날카로움은 베일 듯 반짝였다. 순간 움찔한 마르망 백작이 고통까지 잊은 채 유안을 보며 소리쳤다.

“감히 네까짓 게 날 협박하는 것이냐!! 크흑… 평민 주제에 유파시드의 눈에 운 좋게 들어 사무관이나 하는 놈이, 네놈이!!”

아직도 술이 덜 깬 건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도 잊히지 않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마르망 백작. 곧 유안이 웅크리고 앉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이에 놀란 마르망 백작이 뭐라 소리치기도 전에 유안이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을 뱉었다.

“제가 평민 출신일지언정 유파시드께 오늘의 일을 고하고 당신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그만큼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될 거고요.”

서늘한 음성으로 경고를 전한 유안의 몸에서 파란색의 신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르망 백작의 몸이 두려움으로 벌벌 떨려왔다. 스륵-

“켁!”

순간 멱살을 놓아버린 유안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마르망 백작의 귀에 유안이 작게 속삭였다. 루안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크기로.

“잘 들어, 이 뱀 같은 새끼야. 한 번만 더 루안 공녀님 앞에 나타나면 그때는 내가 직접 백작가의 대를 끊어 버릴 거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시도해 봐도 좋을 거야. 꽤 즐거울 것 같거든.”

유안의 스산한 목소리가 제 귓가를 스치자 마르망 백작의 온몸이 공포로 떨려 왔다. 그와 동시에 유안이 일어선 채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되기 싫으면 지금 당장 꺼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백작님.”

유안의 말을 들은 마르망 백작이 유안과 그 뒤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안 공녀를 한번 보고는 허겁지겁 정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창피한 건 아는지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않고 조용히 도망친 덕에 시간이 지나도 정원은 조용했다.

곧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른 유안이 루안 공녀를 보며 말했다.

“공작가 기사들은 어디에 두고 오셨습니까? 제가 곧바로 불러오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 언저리를 스치듯 보았다가 얼른 멀어졌다.

“하… 기사들은 안 되겠군요. 차라리 저와 궁으로 가시죠. 가문의 시녀들에게 옷을 들고 오라 할 테니.”

유안의 말에 루안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살며시 유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손… 잡고 가 줘. 예전에 나 무서워하면 유안이… 잡아 줬잖아.”

루안 공녀의 차디찬 손이 제 손에 닿은 순간 유안이 휙 돌아서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소리쳤다.

“하,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오늘 제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저따위 인간에게 어떤 꼴을 당했을 줄 아십니까!”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는 유안의 화에도 루안 공녀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 덕분에 유안을 봤잖아. 그럼 됐지.”

자신 앞에서만 멍청이가 되는 공녀의 모습에 유안이 다시 화를 참아내며 말했다.

“공녀님, 두 번의 요행은 없습니다. 다음번엔 괜찮으리란 보장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그만 보시고 다른 사람을 보십시오, 제발.”

하지만 루안 공녀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말했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는지, 어떻게 사랑받는 건지, 누군가와 닿아 있는 체온이 얼마나 다정한 건지… 모두 유안이 알려 줬잖아.”

흔들림 없는 루안 공녀의 말에 오히려 유안의 차가운 시선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슬프게 미소 지은 루안 공녀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내 마음속에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잊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잖아.”

툭. 이내 루안 공녀의 창백한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빛이 어두운 밤, 촉촉하게 젖은 자안과 차갑게 식은 루안의 몸. 유안이 그녀에게서 돌아서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릴 테니. 그리고 다신 저녁 산책 따위 하지 않을테니 그만 기다리시고.”

돌아선 유안의 등을 가만히 보며 루안 공녀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매일 올 거야. 이것보다 더한 옷들을 걸치고. 그러다 위험해지면, 그럼… 그땐 유안이 또 오겠지.”

철없는 공녀의 말에 다시 화가 난 유안이 뒤돌아 소리쳤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화를 내게만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오늘만 해도 두려워 벌벌 떨었으면서! 그런데 그딴 일들을 계속하겠다고, 지금……!”

촉.

순간 분노해 외치는 유안의 입술에 루안 공녀의 입술이 닿았다. 이에 멈칫한 유안에게 루안 공녀가 말했다.

“아까 신력으로 만든 거. 안 보이고 안 들리게 하는 거 맞지?”

루안의 말에 유안이 제 손을 꾹 쥐며 말했다.

“맞다면요?”

그의 대답에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유안 안 따라갈래.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 볼 텐데… 괜찮겠어? 이런 내 모습을 다른 남자가 봐도?”

루안의 말에 유안의 시선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안이 다시 한번 뒤꿈치를 올려 유안에게 입 맞췄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 안 차가워? 진짜 많이 추웠는데.”

발을 동동거리며 애교 어린 목소리로 묻는 루안 공녀의 모습에 유안이 모든 화가 식어 버린 목소리로 한숨을 쉬듯 말했다.

“생각보다 더… 식었네요, 몸이.”

무엇인가를 꾹꾹 눌러 담듯 내뱉는 그의 말에 유안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루안 공녀가 말했다.

“유안 때문이니까. 유안이… 다시 따뜻하게 해 줘.”

루안 공녀의 말에 유안의 눈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르망 백작에게 한 막말을 들키지 않게 쳐둔 투명한 막 때문일까. 그래서 누구도 그들을 보지 않고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옅게 비추던 달마저 그들을 위해 사라져 줬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고 소리를 치고 냉정하게 대해 보아도 또다시 웃으며 저를 원하는 이 작고 발칙한 아가씨 때문일까.

한동안 루안 공녀를 바라보던 유안이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차가운 루안 공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흡.”

자신이 원했음에도 생각지도 못한 유안의 행동에 잠시 놀라 신음을 삼키던 루안 공녀가 이내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찬 입술에 닿은 그의 숨결은 너무 뜨거웠고, 그래서 예전보다 더 초조하게 느껴지는 그의 입맞춤이 좋았다.

정신없이 자신의 입안을 탐하는 그의 온기에 이윽고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눈물을 느낀 건지 잠시 떼어진 두 입술 사이, 이른 봄의 밤바람이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게 싫어서. 그 스산함이 싫어서 루안이 유안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

그녀의 눈물이 거절이라고 생각해 떼어낸 잠시의 공백을 못참고 제게 다가온 루안의 입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서 유안이 그녀의 입안으로 집요하게 파고들며 루안의 허리를 한팔로 단단히 휘감았다.

순간 닿아 온 그녀의 몸이 생각보다 말라 있어서. 그 작은 몸이 차게 식을 때까지 그를 기다린 그녀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유안.”

또다시 떼어진 틈 사이 자신으로 인해 붉게 물든 그녀의 입술이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들썩이는 그녀의 호흡이, 그래서 자꾸만 생기는 욕심이 슬펐다.

“공녀님 이제 그만…….”

그래서 모든 인내를 끌어모아 뱉은 그의 말은 이번에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안, 참지 마.”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루안의 눈동자가 너무 선명했다.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애절했다. 그래, 그 핑계로 유안은 마지막 인내의 끈마저 놓아 버렸다.

유안이 곧바로 그녀의 몸을 제게 더 밀착시켰다. 그리고 오랫동안 참았기에 더 성급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나 더 느끼고 또 느꼈다. 그러고는 그녀의 차가운 목을 뜨겁게 데우기 시작했다.

“흣, 유안.”

순간 뜨겁게 뱉어진 그녀의 목소리에, 그 달뜬 소리에, 그녀를 안은 유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고개를 젖히며 드러난 그녀의 긴 목선을 타고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찬바람에 식어버리고, 가뿐 호흡에 들썩거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 언저리에 그의 입술이 닿고, 그의 왼팔 가득 들어온 그녀의 몸이 가쁜 호흡을 뱉어내는 순간. 그의 오른손은 두서없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헤집고 들어갔다.

달마저 구름 뒤로 숨어 버린 농밀한 밤이었다.

* * *

“신력만 있다 뿐이지 마법은 전혀 쓰지를 못하네요.”

어느새 신력을 거둔 루드바하의 차분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바흐란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자칸에는 저에게 마법을 가르칠 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쯤은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이 나이에 마법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우습고.”

그의 말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루드바하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아꼈다. 그런 그를 한번 본 후 차를 마시던 바흐란이 잠시의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자칸의 왕족에서 베이라나 세츠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성인이 돼서 신력이나 마력이 발현된 경우는 전무하다는 것까지는 아버님도 알고 계셨고요. 그럼에도 해결 안 되는 것이 많았고, 젠이나 디오니스는 모두 전쟁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 같길래 왕가 서고를 좀 뒤졌어요. 선대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놓으셨을까 싶어서.”

잠시 말을 멈춘 바흐란이 고서로 보이는 책 하나를 올려 놓으며 말했다.

“그러다 이걸 발견했죠.”

루드바하가 바흐란이 놓은 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빠르게 활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파벤더. 그는 역대 유파시드 중 가장 큰 신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자이다.

그런 그가 대륙을 어지럽히는 흑마법 단체를 쫓고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그가 목숨을 희생해 단체를 와해시킨 지 10년. 5개의 왕국은 평화를 되찾았고 모두가 죽은 그의 희생을 기렸다. 그리고 오늘, 이미 목숨을 잃은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글을 읽던 루드바하의 시선이 떨려왔다. 이를 보던 바흐란이 말했다.

“파벤더라는 죽은 유파시드가 자칸에 찾아와 협력을 요구했다. 우리는 거칠게 반항했다. 아무리 신마전쟁에 중립을 고수하는 나라라 하더라도 흑마법 단체와 손을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다.”

루드바하의 시선이 바흐란을 향하자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흐란이 책의 내용을 이어 읊기 시작했다.

“그는 신마전쟁이 세츠들의 승리로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 했고 디오니스는 자연히 망가질 거라 했다. 켄느는 다른 나라의 일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를한은 왕가가 썩어빠진 덕에 언제든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자칸과 젠뿐.”

바흐란의 말을 듣던 루드바하의 시선이 다시 책을 향했다. 시간이 갈수록 필체가 거칠어진 50년 전 자칸의 왕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이야기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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