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제4장. 르베이나 (33)
시리도록 푸른 보석에 검붉은 마력을 가득 흘려 넣는 르베나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지혈제 가져와!!”
“포션, 포션부터 들이부어!!”
그 뒤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궁의들의 손은 오직 한 사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를에게 향해 있었다. 아무리 르베나가 마력을 퍼부어도 피가 멎는 건 순간뿐. 어딘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상처는 다시 벌어졌고 그 속에서 시뻘건 피를 계속해서 쏟아냈다.
위이이잉—! 다시 한번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은 르베나의 눈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벌써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르베나가 쉽게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런 그를 보호하는 수많은 세츠들과 성기사들이 있으므로. 하지만 걱정으로 얼룩진 며칠이 지나 이토록 그가 절실한 순간에조차 연락이 되지 않는 지금, 르베나는 처음으로 실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출혈이 다시 시작된다! 지혈 포션 다 가져와!!”
순간 귓전을 울리는 한 궁의의 다급한 외침에 르베나가 천천히 반지에 넣는 마력을 중지하고는 그것을 보이는 곳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깊게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출혈만 막으면 시간을 벌 수 있어. 그러면 젠에 공문을 보내서라도 치유 세츠를 데려오면 돼.’
나라 간 텔레포트는 정식 승인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루드바하와 연락마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문을 보내 허락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르베나는 의료실 구석에 놓은 반지를 한 번 보고는 미련을 떼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를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할 테니 모두 나가도록. 집중할 수 있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부탁하지.”
르베나의 말에 궁의들이 서로를 두리번거거리는 사이 어느새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분주하게 방을 비우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들이 의료실을 떠나고 다한마저 나가려는 그때, 르베나가 그에게 말했다.
“다한 경은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지금 즉시 데려올 수 있냐고 물어봐 줘.”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웠다. 이윽고 아를과 둘만 남은 의료실 안. 르베나의 눈이 여느 때보다 붉게 물든 채 아를의 힘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출혈로 원래도 하얗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까맣고 단정한 눈썹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언제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눈은 더이상 밝은 그 빛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아를.”
작은 소리로 아를을 한번 부른 르베나의 시선이 계속 피가 흘러나오는 그의 복부로 향했다. 무엇인가가 폭발한 순간 아이들을 자신의 뒤에 두고 검기로 폭발의 위력을 줄이려고 했던 그. 도대체 무엇이 르베나조차 감탄할 그의 검기를 뚫고 이만한 상처를 남긴 걸까.
르베나가 제 마력을 다시 아를의 상처로 가져가 댔다. 상처는 르베나의 마력을 받아들이듯 곧 출혈의 양을 줄여 갔고 이내 출혈이 멎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르베나의 얼굴에는 기쁨이나 환희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를의 상처는 다시 시뻘건 피를 내뿜기 시작했다.
“조금 더.”
르베나가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아를의 상처로 흘려 넣었다. 하지만 출혈이 멎는 시간만 조금 늘었을 뿐, 상처는 곧 다시 벌어져 르베나를 농락하듯 그의 피를 내뿜었다. 순간 눈을 감은 르베나가 아주 적은 양의 마력을 아를의 상처 부위로 넣고 집중했다.
폭발로 인해 장기의 한 부분이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묘한 느낌의 힘이 그 상처 부위가 아무는 걸 방해하듯 르베나의 마력을 쳐내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신력도, 마력도, 그렇다고 흑마법도 아니야. 뭔가… 익숙하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힘…….”
분명히 어디선가 느껴보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기엔 처음 느껴보는 힘같이 느껴지는 그것은 아를의 상처 부위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저걸 떼어내는 데 얼마만큼의 마력이 소모될지 짐작이 안 될 정도로 아주 세고 집요하게.
마치 싸움을 하듯 르베나가 마력으로 그 힘을 몰아내려 조금 더 마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때 온몸을 고통스럽게 경련하며 내는 아를의 신음에 르베나는 곧장 마력을 멈추었다.
타다닥. 그 순간 문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르베나의 초조한 마음을 조금 달래 주었다.
“르베나!”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누군지 이미 알기 때문에 르베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다한 경이 전했겠지만, 알 수 없는 힘이에요. 몰아내려고 하면 아를이… 고통스러워해요.”
잠시 괴로운 듯 말을 멈춘 르베나가 문가에 선 그, 칸을 보며 이어 말했다.
“일단은 상처를 틀어막고 있는 힘이 더는 몸 전체에 작용할 수 없게 강한 마력으로 막아 놓은 후 실력이 좋은 치유 세츠를 데려올 수밖에 없어요.”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 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이아 용병에 속한 치유 세츠를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필 지금 ‘보토니에‘ 일로 나가 있단다. 아무래도 은신 중이라 접촉이 어려워서… 미안하구나.”
칸의 말에 르베나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칸의 품에서 나와 르베나의 품에 제 몸을 비벼 댄 것은.
곧 르베나가 익숙하고, 그래서 더 그리웠던 그것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칸에게 말했다.
“충분해요. 아버지께서 팅을 이렇게… 성장시켜 주셨잖아요.”
“팅~!!!”
자신의 이름을 알아들은 건지 팅이 제 얼굴을 힘껏 르베나의 얼굴이 비벼 댔다. 그 감촉과 온기가 주는 힘에 감사하며 르베나가 잠시 작은 팅에게 지친 마음을 기대었다.
처음 르베나의 힘으로 각성했던 팅은 이후 자주 잠에 빠져들었다. 칸은 이것이 두 번째 각성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보토니에‘와의 결전 이후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든 팅이 좀 더 빨리 각성을 마칠 수 있도록 칸은 예전 나팅을 잘 안다고 했던 지인에게 팅을 데려갔다. 우습게도 그게 칸 본인이었다는 건 팅을 데려가고 얼마 후 발각되었지만.
민망함과 부끄러움의 그 중간, 칸은 두 번째 각성을 위해 필요한 특정 잠자리와 먹이를 위해 팅을 데리고 요정의 숲으로 떠났었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지속해서 바쁜 르베나를 대신해 팅을 돌보다 드디어 얼마 전 팅이 두 번째 각성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크기는 전과 비슷했지만, 털의 윤기와 눈에 도는 요요한 푸른 빛은 신비한 전설을 마주하는 듯 깊어졌다.
“이제는 웬만한 베이라 못지 않은 마법을 쓸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팅은 너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르베나. 그러기 위해 요정의 숲까지 데려간 것이니”
칸의 말에 품 안의 팅을 보고 살짝 웃은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저와 몇 시간 이상 떨어져 있으면 위험해지는… 그걸 말씀하시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칸을 본 후 르베나가 팅을 바라보았다.
“팅, 건강하게 다시 보니 너무 좋구나. 그런데 미안하지만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좀 도와줄래?”
르베나의 말을 들은 팅의 눈이 침대에 누운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아를에게 향했다. 앙숙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 순간 아를을 바라보던 팅이 도도한 자태로 날아오르더니 아를의 복부에 내려앉았다.
“…큭! 젠, 장…….”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욕을 할 정도로 아팠나 보다. 그런 아를을 보고 피식 웃은 듯한 팅이 순간 짧고 귀여운 날개를 활짝 펼쳐 아를의 복부를 감싸듯 덮었다. 그리고 칸을 통해 충전해 놓은 르베나의 마력을 아를에게 넣기 시작했다.
“…팅.”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떨려 왔다. 언제나 팅은 마력을 보관하고 전해 줄 뿐 스스로 깊게 생각해, 무엇인가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팅은 마치 르베나가 하려던 것을 알기라도 하듯 아를의 상처에 붙어있는 미지의 힘을 향해 그곳에만 마력을 방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내가 미세하게 조절하는 것보다는 몸짓 작은 네가 흘려 넣는 게 아를에게 부담이 덜 되겠구나.”
그런 팅을 보고 잠시 놀란 르베나가 곧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팅의 몸에 제 마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어느새 깊은 밤의 적막이 성을 제 색으로 물들이는 시간. 이내 아를의 상처에 피가 멎기 시작했다. 이후 상처는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 * *
“아를 님은 어떻게 되신 거야?”
헬리오의 물음에 눈에 띄게 안색이 어두워진 아한이 말했다.
“일단 르베나 누나와 팅 덕분에 출혈은 멈췄어. 하지만 형 상처에 들러붙은 기분 나쁜 걸 빼내고 장기를 치료하려면 아주 정교하고 실력 좋은 치유 세츠가 필요하대. 안 그러면 형이…….”
순간 아한이 말을 멈추었다. 말끝에 울먹거리는 소리가 나와 버렸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헬리오의 눈이 죄책감으로 떨려 왔다.
“정말… 정말 몰랐어. 그 인형에 그런 게… 그런 게 있을 줄은.”
서러운 눈물을 떨구는 헬리오를 바라보던 아한이 어느새 헬리오의 앞에 선 채 말했다.
“나도 몰랐으니까 넌 당연히 몰랐겠지. 그거에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마.”
자신을 탓하며 매도할 줄 알았던 아한이 의외로 자신을 달래 주는 듯한 말을 하자 놀란 헬리오의 눈이 아한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아한이 헬리오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 보며 말했다.
“하지만 헬리오, 이대로면 또 누가 다칠 거야. 너도 모르게 네 몸이 다시 폭발할 만한 신력을 팽창해 네가 다칠 수도 있고. 아니면 또 그 인형처럼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들로 사나 님이나… 후벤 님이 다칠 수도 있어.”
이어진 아한의 말에 헬리오의 눈이 공포로 떨려 왔다. 그리고 헬리오 눈에 새겨진 공포와 두려움을 확인한 아한이 아이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얘기해줘. 너의 모든 이야기, 네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없거든.”
아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굳은 얼굴의 르베나와 칸, 그리고 다한이 있었다.
“…헬리오.”
그리고 헬리오와 그 옆의 아한을 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한 사람, 사나 또한. 사나를 마주한 헬리오의 눈에서 아이다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아주 오래 참아야 했기에 서러웠고, 무거운 만큼 힘들었던 헬리오의 마음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 * *
어두운 방 안. 어지럽게 널려있는 수많은 책 사이. 침대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 이의 시선이 어두웠다. 창밖에 떠 있는 달빛의 시린 빛조차 자신에게는 너무 밝다고 생각한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야, 세츠 하면 빛 아닙니까? 근데 세츠들의 수장이 이렇게 어둡게 해 놓고 있으니 조금 무서운데요.”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투에 그, 루드바하의 시린 시선이 향했다.
“감히 누가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라고 했지?”
루드바하의 날 선 말에 순간 상대방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에게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공포와 분노 그리고 압박감이 방 안 가득 팽창했기 때문이다.
선뜻 이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찰나, 방문이 열리고 차와 다과를 든 유안이 분위길 전환하듯 들어서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 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화풀이하시려거든 먼 길 오신 바흐란 왕자님 말고 제게 하십시오.”
들고 온 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루드바하의 무감각한 눈을 마주한 유안이 이어 말했다.
“감히 유파시드님의 방에 허락도 없이 손님을 들인 벌. 달게 받겠습니다.”
이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유안에게 루드바하의 날 선 시선이 닿았다. 침 한번 삼키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팽창한 긴장감에 바흐란 왕자의 몸도 얼핏 굳어 갔다. 그 순간.
약간은 산뜻하게 느껴지는 신력이 한바탕 방안을 휘저었다. 이에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며 바람이 들어왔고 방 안이 환하게 밝혀졌으며 기분 좋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흐란 왕자.”
그리고 거기엔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는 루드바하가 있었다. 하지만 그만이 모르는 것 같았다. 공기와 빛과 미소를 되찾았음에도. 그의 눈이 지금 얼마나 차가운 분노와 공허에 휩싸여 있는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