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제4장. 르베이나 (32)
“헬리오! 헬리오! 혹시 뭔가 짚이는 거 없어? 손가락으로라도 가리켜!! 안 그러면 정말로 죽어!!”
아한의 외침조차 들리지 않는 건지 헬리오는 숨이 꽉 막힌 사람처럼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캑캑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아를이 헬리오의 모습을 확인하고 아한에게 물었다.
“아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게 어떤 거지?”
아를의 물음에 아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실드 몇 개밖에는 없어요. 저는 추적 전문이라. 그리고 이런 실드로는 헬리오의 폭발을 감당할 수 없구요. 생각보다 신력이… 엄청나요.”
아한의 말에 잠시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가라앉힌 아를이 물었다.
“매개체를 찾는 건?”
아를의 말에 아한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바보!!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내가 추적 전문이면서! 해 볼게요!!!”
아한이 순식간에 헬리오에게서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제 마력의 자락을 주변으로 퍼트렸다. 그 사이 헬리오에게서 흘러나온 가시적 신력은 어느새 방 하나를 꽉 채울 만큼이 되었고 이내 헬리오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신력의 팽창. 그것에 마력을 지닌 아한과 아를의 숨도 덩달아 막혀오고 있었다.
휘익-!
순간 방 안을 채우던 헬리오의 신력들이 일시 정지하듯 모두 멈추었고 그 모습에 아한이 눈을 감고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터질 거야. 곧이야. 하지만 헬리오를 두고 나갈 순 없어. 헬리오, 헬리오!’
도저히 알 수 없던 아이의 기운. 하지만 묘하게 기분을 건드리는 불쾌함. 그런 거.
곧 아한이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사나가 선물한 헬리오의 인형을 바라보았고 아한을 주시하던 아를은 주저 없이 헬리오의 인형을 검기로 베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인형이 잘려 나간 것과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큰 폭발이 시작되었다.
쾅! 콰과광… 콰광……!!
“헬리오가?”
다급한 전서를 받은 르베나가 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들린 굉음이 주위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쾅! 콰과광!! 아마도 헬리오와 아한 그리고 아를이 있을 곳. 그곳에서 들려온 소리에 르베나는 그대로 룬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이후 눈을 다섯 번쯤 깜빡였을까.
빠르게 도착한 헬리오의 방 앞. 아니 아마도 방이었던 것이 분명한 그곳은 희뿌연 안개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를 본 르베나와 룬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단장!”
“…아를!”
그리고 둘은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갔다. 헬리오와 아한을 제 넓은 등 뒤에 두고 쓰러져 있는 아를에게로. 그리고 아를에게 다가간 둘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듯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 를.”
떨리는 음성으로 아를을 부른 르베나의 손마저 약하게 떨려왔다. 곧 그녀의 시선이 그의 뒤에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두 아이에게 향했다. 다행히 두 아이는 모두 다친 곳 없이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아를은…. 그 두 아이를 폭발로부터 보호한 아를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젠장, 궁의를, 궁의를 불러!!”
크게 울려퍼진 룬의 목소리에 밖에서 수선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르베나의 시선은 굳은 듯 아를을 향해있었다.
“왕녀 전하.”
순간 자신을 부른 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르베나는 자신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룬의 목소리가, 그의 절실함이 르베나에게 닿은 그 순간. 르베나의 몸에서는 지체 없이 검붉은 마력이 솟아 나와 아를의 전신을 감싸 들었다.
‘아를, 아를… 제발!!!’
상당한 양의 출혈을 눈으로 쫓으며 속으로 수백, 수천 번 아를을 부른 어느 순간.
“으… 윽.”
겨우 출혈만 멈춘 아를이 힘겹게 눈을 뜨려했지만 힘들어 보였다. 분주하게 들어선 궁의들이 헬리오와 아한을 먼저 데리고 나가는 그 순간이었다.
“아… 한. 하… 아한은. 헬리… 오는.”
눈도 채 뜨지 못한 정신으로 아이들부터 찾는 아를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울컥 솟는 감정을 삼켜내며 말했다.
“무사해. 아한도, 헬리오도.”
르베나의 목소리가 들려서일까? 순간 눈을 뜬 아를이 르베나를 보고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위, 험해… 르베나. 여… 긴.”
가쁜 숨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잇는 아를의 목소리가 르베나의 귀가 아닌 가슴에 아프게 박혀왔다.
“네가 죽을 뻔했어. 너를 다신 못 볼 뻔했어. 조금만 늦게 도착했으면 그럴 뻔했다고.”
르베나가 떨리는 시선으로 아를의 상처를 보며 말했지만 아를은 힘겨운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아를을 보며 지금도 르베나의 머릿속에는 이 정도의 상처는 치유 세츠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절망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 르베나는 치솟는 수많은 감정과 말, 그 모든 것을 잠시 미뤄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속절없이 차오르는 불안과 안도의 그 어디쯤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넌 이제 단장을 지켜야 하는 부단장이 아니야. 넌 이제… 너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단장이야, 아를.”
끊임없이 아를에게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을 잇는 르베나의 시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은 아를의 몸을 향했다.
“그러니까 제발 내 걱정은 그만해.”
르베다 답지않게 떨리는 음성이 그 순간 다시 한번 아를의 귀를 두드렸다. 그리고 힘겹게 뜬 눈으로 조금 구겨진 그녀의 미간과 짓씹어 붉어진 입술이 보였다. 그 작은 것들이. 그 사소한 것들이. 이 순간조차 제게 고스란히 전해져 아를은 겨우 한마디의 대답을 온 몸을 다해 뱉었다.
“넌 영원히… 내가 지켜야 할… 사람… 이야.”
툭. 순간 아를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르베나의 예민한 감각에 잡혀 오던 아를의 심장 소리가 하염없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 * *
지잉-지이잉----.
방 안을 낮게 울리는 진동 소리가 어두운 적막을 뚫고 전해졌지만, 루드바하는 빛 한점 담지 않은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눈을 닮은 루비와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반지. 언제나 제 몸을 힘껏 부르르 떨면 그것만으로 그를 행복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 반지가 지금 다시 한번 온 힘을 내어 제 몸을 떨어 댔지만 이젠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죽을 만큼 괴로웠다.
텅 빈 눈으로 진동하는 반지에서 시선을 뗀 루드바하의 눈이 이내 앞에 놓인 고서를 향했다.
혼자서 흑마법사 단체를 몰살시키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은 유파시드들의 영웅, 파벤더.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날이 기록된 책 <파벤더의 마지막>, 그 마지막 페이지에.
[나는 오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잇는 신력이 있고 그 신력을 잇는 유파시드들이 있는 한. 그들의 이어짐으로 나는 결코 죽지 않았음을. 내 죽음이 남길 마지막 한 조각까지 이 세상의 어느 시작을 알리고 있음을. 나는 이곳에 적어 놓겠다.]
펼쳐져 있는 그곳을 텅 빈 눈으로 보던 루드바하가 자신의 신력을 흘려 넣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조소가 흘렀다. 그의 신력이 닿자 방금까지 활자가 적혀있던 곳 위로 전혀 다른 글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후대의 유파시드가 이곳에 신력을 흘려넣는 다면, 그는 궁금했을 것이다. 유파시드란 존재가 흑마법사 단체를 홀로 전멸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아이러니가. 역대 가장 신력이 많은 유파시드인 내가 그랬다는 게 말이다. 그만큼 나에 관해 관심이 많은 그대라면. 어쩌면 흑마법에 대한 관심 또한 많았던 거겠지. 바로 나처럼.]
루드바하의 벽안이 신력에 의해 빛나는 글자를 시린 분노를 담고 따라갔다.
[나는 정해진 세츠의 정의에 따라 그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그들을 만나고 접촉하며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흑마법은 과연 나쁜 것일까. 왜 나는 그것을 악으로 정의한 것일까. 애초에 세츠에게 정해진 옳고 그름의 기준은 누가 심은 것인가. 어쩌면 나는 그때 그 호기심을 멈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세츠들의 왕인 내가 흑마법사들의 왕이 될 결심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중략
그래서 나는 오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유파시드로써의 나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잇는 신력이 있고 그 신력을 잇는 유파시드들이 있는 한. 그들의 이어짐으로 나는 결코 죽지 않았음을. 내 죽음이 남긴 마지막 한 조각조차 이 세상의 어느 시작을 알리고 있음을. 나는 이곳에 적어놓겠다. 보토니에. 만약 지금 이걸 읽고 있는 유파시드, 당신이 저런 이름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안심해라.
나 파벤더는 살아있다. 보토니에의 수장으로. 그대를 새로운 흑마법의 세계로 초대할 스승으로. 어쩌면 그대와 맞서게 될 적으로.]
분노로 시려오는 루드바하의 눈이 마지막 구절을 읽어내자 빛은 힘을 잃은 듯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자신이 만들어냈던 글자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보토니에의 수장, 파벤더. 이 기록이 정말 사실이라면 3대 전의 유파시드가 자신이 궤멸했다고 알려진 흑마법사들의 수장이 되어 ‘보토니에‘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글귀가 정말 사실일까?‘
루드바하는 우연히 서고에서 이것을 발견한 이후 파벤더에 관련된 모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의 모두가 말했다. ‘흑마법사 단체를 궤멸시킨 영웅’, ‘누구의 희생도 없이 자신만을 희생한 세츠의 정의’, ‘유파시드들의 유파시드’.
그러면 이것이 거짓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루드바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짓이 진실일 때, 그제야 모든 것이 비로소 이해되기 때문이다. ‘보토니에’ 조직 내 세츠가 있다는 레턴의 말도. 신마전쟁 당시 힘 있는 세츠들에게 합류를 권유한 조직의 목적도.
무엇보다
“…칸 님.”
칸의 회유에 실패하자 그의 아내이자 르베나의 어머니인 루아나 공주를 죽이고 그의 인생마저 빼앗을 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마저도 말이다.
순간 루드바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잉-지이잉--.
급한 일인 듯 계속 울려 대는 반지의 진동을 들으며 루드바하가 괴로운 듯 제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모든 가치 있는 고서엔 저자가 자신의 힘을 담아 놓는다. 그러니 내 힘을 느끼고 싶었다면, 그만큼 흑마법 단체에 관심이 있다면. 내게 오라, 유파시드여. 내가 그대를 새로운 세츠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우연히 이를 알게 되었다면 그대는 조용히 입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지금 젠의 유파시드인 그대가 젠과 세츠들의 정의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읽었던 구절의 어느 부분이 계속 울려 대는 반지의 진동과 함께 계속 그의 머리께를 두드려 댔다. 그가 이것을 밝히는 순간 모든 대륙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여기저기서 모든 세츠들이 흑마법사로 의심 받게 될 것이고 제국의 위상은 순식간에 땅에 처박힐 것이다. 만약 르베나와 다른 목적을 가진 베이라들이 그들만의 단체를 이루고 있다면 제2의 신마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후드득. 순간 그의 눈에서 차마 정제하지 못한 괴로움이 흘러넘쳤다.
“르베나… 르베나.”
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르베나를 애타게 불러 댔다. 그리고 이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습니다. 그대를 외롭게 만든 것이, 칸 님을 그렇게 만든 것이… 유파시드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분이 제 할아버님… 이라는 것이.”
후드득, 후드드득. 하염없이 떨어지는 루드바하의 괴로움이 그의 온 얼굴을 적실 동안. 반지의 진동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