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제4장. 르베이나 (31)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벨디온의 단장이라는 자가 디오니스를 도우러 온 베이라를 공격하다니!”
르베나처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베이라들의 대표, 맥스가 소리쳤다. 그러자 분노에 물든 다한이 그와 그 뒤에 서 있는 모든 베이라를 향해 짓씹듯 말했다.
“도우러 왔다고? 우리 백성에게 감히 저따위 짓을 하는 게 돕는 거란 말인가?”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여과 없이 뱉어내는 다한을 본 르베나의 시선이 몰려든 사람들 사이 흐트러진 옷을 잡고 벌벌 떠는 한 여인을 향했다. 대강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베이라들은 좋게 말하면 자유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들이었다. 그들 중 힘을 이용해 못된 짓을 일삼는 자가 왜 없겠는가. 맥스란 자 또한 르베나와 같은 것을 보았는지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강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저에게 먼저 말해 주셨다면…….”
“주셨다면?”
어느새 그들의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르베나의 등장에 맥스가 말문을 닫았다.
이내 르베나가 아벨디온의 한 여기사를 보며 말했다.
“일단 저 여성을 데리고 가서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라.”
르베나의 말을 들은 기사가 다한에 의해 쓰러진 베이라를 경멸의 눈으로 한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여성에게 다가갔다. 울며 떨던 여성은 아벨디온의 기사가 다가가자 그제야 안심한 듯 @눈물을 닦고 따라나섰다.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다한을 향해 말했다.
“직접 눈으로 본 건가, 다한 단장?”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그 여성분께서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저 새… 베이라가 함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한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물었다.
“아한에게 통과된 자를 디오니스 내로 들이라 하긴 했지만 이 주변에는 마을이 없었을 텐데?”
르베나는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이미 우려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마을이 없는 국경 근처 일정 지역 내에만 베이라들을 머물게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이 지낼 야영지를 꾸리고 매일 생필품을 조달하게끔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마을 여성이 있었다니. 르베나의 질문에 다한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사실 근처 마을에서 장사하는 백성들이 베이라들에게 물건을 팔고자 드나든 모양입니다. 기사들도 그 정도 사정은 봐줬던 모양인데. 시정하겠습니다.”
자신의 불찰이라는 듯 고개를 떨군 다한에게서 르베나의 시선이 떠났다. 그리고 맥스를 한 번,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끙끙거리는 베이라를 한 번 보고는 르베나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우리끼리 싸울 일은 아닌 거 같군.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니.”
태연한 르베나의 말에 놀란 건 다름 아닌 다한과 디오니스의 기사들이었다. 저 베이라들이 도우러 왔다는 명목으로 국경 안에 들어와 디오니스의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게 별일 아니라니. 그것이 다름 아닌 디오니스의 왕녀, 르베나의 말이라는 것에 모두는 좀 더 놀라 보였다.
베이라들의 대표 맥스 또한 조금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르베나는 자신을 향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베이라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뭐지? 가족관계는?”
갑작스러운 르베나의 질문에 그가 슬쩍 맥스를 바라보자 맥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티입니다. 가족은… 없습니다.”
조금은 못 마땅하다는 듯 답한 그의 말에 르베나가 무감각한 눈으로 말했다.
“다행이네, 그거.”
“예, 예? 으악!!”
르베나가 한 말의 의미를 되묻던 더티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검붉은 르베나의 마법이 그의 하체를 강하게 휘감았기 때문이다. 검붉은 마력에 휩싸인 제 하체를 보는 더티의 얼굴에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이 가득 차올랐다. 이를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자네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대를 잇지 못하는 아들을 보는 부모가 슬퍼할 게 아닌가.”
르베나의 말에 더티란 자의 눈이 경악으로 더없이 크게 떠졌을 때. 그는 더 놀라지도 못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르베나의 마력이 그의 무엇인가를 끝장냈기 때문에.
그 짧고도 강렬한 장면에 모두가 하나같이 말을 잃었다. 언제나 점잖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뜨거운 분노를 뿜어내던 다한마저 새하얗게 질려 흔들리는 눈빛으로 더티란 베이라를 바라보았다.
“이, 이건 너무 심하십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소리치는 맥스란 이의 얼굴도 다한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를 보며 르베나가 무감하게 말했다.
“뭐가 심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저 사람이 더는 범죄자가 되지 않도록 도운 것뿐인데.”
너무 평온한 르베나의 어조에 맥스가 두려움이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르베나는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각자 신체 일부분을 손으로 가린 베이라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어떤 것에도 관대하지 않지만, 범죄에는 더욱 그렇다. 그 대상이 디오니스의 백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더군다나 그대들 모두 디오니스 내에서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그러니 감히 이 디오니스에서 또 이따위 짓을 벌일 생각이라면 이 정도 처벌은 각오해야 할 거다. 다한 경.”
“네.”
서늘하게 빛나는 르베나의 시선을 받은 다한이 평소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에 르베나가 모든 베이라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며 말했다.
“현재 국경이 막혀 장사에 차질이 생긴 백성들의 물품을 궁에서 사들이게 할 테니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그리고 지역 내에 머무는 베이라들을 감시하는 기사의 수를 늘려라.”
르베나의 말에 베이라들이 반발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가 정체도 모를 어린 소년에게 ‘보토니에’의 첩자인지 확인하는 검사를 받고 들어왔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참전했는데 한낱 용병 취급이나 받는 것도 화가 났는데 말이다. 그나마 인근 마을에서 들여오는 간식이나 소품 따위를 사는 것이 유일한 재미였는데. 르베나가 이제는 그것마저 막아 버리고 죄수처럼 감시 한다니.
하급 용병에게도 이런 취급을 하는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표가 뱉은 대답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뜻을 알겠습니다, 왕녀 전하. 저와 함께 온 베이라들이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저도 더 많이 신경 쓰겠습니다.”
조금 전 항의 때와는 조금 달라진 그의 태도에 르베나가 스치듯 그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모든 국경 주위의 백성들은 오늘부로 왕궁에서 마련한 거처로 옮긴다. 하나도 빠짐없이.”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곧 일어날 전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베이라들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검붉은 마력에 휩싸여.
“별… 일 없겠지?”
위축된 자세로 묻는 헬리오에게 아한의 눈이 무감정하게 향했다가는 다시 읽고 있는 책을 향해 돌려졌다.
“누나가 갔으니 그러겠지.”
여전히 성의없는 아한의 대답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헬리오의 어깨가 순간 잠시 떨려왔다. 책에 시선을 고정한 듯하면서도 헬리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확인하던 아한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네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그게 너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헬리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조금은 따뜻하게 부른 아한의 말에, 놀란 헬리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르베나 누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너를 도울 기회는 줘. 그래야 나도. 널 미워하는 게 조금은 편해질 것 같거든.”
처음으로 전해진 아한의 진심에 헬리오의 시선이 오갈 데 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아이의 눈에 맑은 눈물이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한이 헬리오를 바라보자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난 젠의 마법학교 입학 대기자였어.”
그리고 들려온 헬리오의 말에 아한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제 눈에 한 번 담은 헬리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보토니에’라는 곳과의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하자 젠의 마법학원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이 늘었거든. 특히 나같이 가난한 집의 아이 중 신력이 있는 아이들은 더더욱. 그곳에 가면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또… 보호받을 수 있으니까.”
말을 잇는 헬리오의 시선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게다가 나는 그곳에 가고 싶은 이유가 더 있었어. 사실 나는 엄마만 있는데…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소매치기하는 법 따위나 가르쳤거든. 그게… 엄마 직업이었어. 난 그게 너무너무 싫었지만 참을 수 있었어. 곧 마법학교에 입학해 엄마한테 용돈을 드리면 엄마도 그런 건 그만하지 않을까 해서. 그럼 나도 그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헉!”
순간 말을 잇던 헬리오가 갑자기 제 목을 틀어쥐며 숨을 쉬지 못했다.
“…헬리오!”
그 모습에 들고 있던 책을 내던지고 헬리오에게 달려간 아한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맙소사…….”
놀란 아한이 곧바로 자신의 마력을 헬리오의 몸에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아를 형!”
둘의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밖에서 기다리던 아를이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아한!”
순간 방으로 들어선 아를에게 아한이 매우 급하게 소리쳤다.
“헬리오가, 헬리오의 신력이 개방됐어요!!”
아한의 말에 아를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자 아한이 날뛰는 제 심장의 박동을 무시하려 애쓰며 아는 것을 빠르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 헬리오의 신력을 강제로 묶어 놓았던 것 같아요. 칸 님께서 르베나 누나가 어릴 때 걸었던 봉인과 비슷해요! 그래서 제가 그간 헬리오의 신력을 느끼지 못한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
아를을 보는 아한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했다.
“지금 그 봉인이 모두 풀렸어요!!”
아한의 말에 아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갔다. 서늘한 눈빛으로 헬리오를 한 번 바라본 아를이 물었다.
“그 말은 헬리오의 신력이 지금 폭주하고 있다는 건가?”
지속해서 헬리오의 몸 안에 마력을 흘려 넣는 아한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르베나 누나한테 걸려 있던 칸 님의 봉인은 안전하고 완벽했지만 이건… 이 봉인은 너무 불안정해요. 만약 이게 한 번에 풀려 버리면… 그러면……!”
“헉, 커헉……!!”
살려달라는 듯 필사적으로 아한의 팔을 붙잡은 헬리오의 안색이 이제 파랗게 질려 갔다.
“몸이 갑자기 팽창하는 신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한의 떨리는 시선이 힘에 겨워 숨조차 쉬지 못하는 헬리오와 그런 헬리오를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를에게 한 번씩 향했다.
“폭발할 거예요.”
그리고 들려온 아한의 말에 아를이 빠르게 방문을 닫으며 물었다.
“막을 방법은? 르베나를 불러오면?”
아를의 물음에 아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르베나 누나는 지금 국경으로 갔어요. 폭발이 언제 일어날지 몰라 사람을 보낼 시간조차 없어요! 당장 이걸 막으려면……!”
아한이 괴로워하는 헬리오의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매개체를 찾아야 해요! 헬리오가 저에게 자기 일을 털어놓으려 할 때 갑자기 봉인이 풀렸어요. 그건 분명히 시전자가 어떤 매개체를 통해 헬리오를 보고 있고 그걸로 봉인을 조정하고 있단 거예요!”
“크 허헉!!!”
순간 숨이 막혀 버린 헬리오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엄청난 양의 신력이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헬리오!!”
아한이 급히 헬리오를 부르며 주변에 겹겹의 실드를 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를에게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 빨리요! 이러다간 헬리오가 죽어요!”
아한의 다급함에 아를이 급히 주변을 보며 닥치는 대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헬리오의 방에 있던 가구, 찻잔, 옷가지. 아를이 베어내는 것들이 깨지고 부서질 때마다 나는 소음이 점점 커졌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와 함게 그들을 막아서는 룬의 목소리도 들려 왔다.
“모두 다가오면 안 돼!! 룬, 룬 있나?”
아를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던 룬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런 룬을 보며 아를이 빠르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이 주변을 전부 폐쇄한다. 곧 헬리오의 신력 때문에 대규모 폭발이 일어날지 몰라. 그리고 곧바로 르베나를 불러. 얼른!”
아를의 말에 룬이 곧바로 방을 벗어나며 모두에게 나가라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동시에 가시적으로 보일 만큼 퍼져나오는 헬리오의 신력에 아를과 아한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