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10화 (210/276)

210화

제4장. 르베이나 (30)

“르베나 왕녀님, 따뜻한 밀크티 준비해 드릴까요?”

아를을 위시한 디온과 무사히 돌아온 르베나를 보고 시녀 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에 르베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타탁, 탁.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방의 공기에 순간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를과 열 명의 디온 모두는 혹시나 모를 부상을 진찰하기 위해 모두 궁의에게 보내 놓았다.

원래라면 그들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것까지 확인했어야 방으로 돌아올 르베나는 왜인지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 같은 아를을 보고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잠시 방 안을 데우는 벽난로를 보던 르베나가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그러자 얇은 줄에 걸려 있던 반지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제 존재를 과시했다. 나가기 전 대충 집은 목걸이에 걸려 있던 다이아몬드를 빼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과할 정도로 순도 높은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잠시 그 반지를 빤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그것을 줄에서 빼내 벽난로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째지?”

하루가 멀다 하고 통신구를 가장한 반지를 울려 대던 루드바하. 그런 그에게서 최근 연락이 전혀 오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서 반지를 받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끔 여의치 않은 상황이 생기면 며칠 정도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고 세심하게도 미리 말해 주던 그이건만. 심지어 르베나가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그가 이제는 조금 걱정되었다.

이윽고 르베나가 피곤한 듯 반지에서 눈을 떼며 응접실을 차지한 폭신한 소파에 제 몸을 뉘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나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든 것인지 테이블 위에 밀크티와 마들렌이 놓여 있었다. 그새 루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밀크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증기를 봐서는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지만 인기척도 모르고 잠이 든 스스로가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이제 막 선잠에서 깬 르베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벽난로 위에 올려진 반지에 잠시 머물렀다.

쪽잠을 자는 사이에 통신구가 울렸다면 깜빡거려야 할 반지는 여전히 고고한 빛만 낼 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

데자르 사막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야 궁으로 돌아온 것은 생각지도 않은 르베나의 혼잣말이 어쩐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어둠에 잠겼던 밤이 조금씩 여명을 드러내는 새벽.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티 튀는 소리와 따뜻한 공기. 제 앞에서 달콤쌉싸름한 냄새를 풍기는 밀크티와 포근한 소파.

절대로 불편할 것이 없는 지금 르베나는 왜인지 모를 불편감에 몸을 한번 뒤척였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지켜보지 말고 들어가.”

평소랑 같은 말이었는데 왜인지 불편함이 느껴졌던 아를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아를을 안도감에 덥석 포옹부터 해 버린 르베나 자신에 대한 불편함일까.

사실 아를과는 긴 시간을 함께하며 수많은 적을 함께 상대했고 그때마다 서로의 어깨를 감싸거나 가볍게 포옹을 하는 정도는 늘 있어 왔던 일이었다. 다만 르베나가 먼저 아를을 안아 버린 건 처음이었지만.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에 아를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못내 서운했다.

“…서운하다, 라.”

저답지 않은 감정에 피식 웃어 버린 르베나가 곧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울리지 않는 반지를 다시 한번 보고는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에 놓아 두었던 것을 집어 들었다.

월계관 위 엑스자 모양으로 그려진 두 개의 검.

“이걸 왜 그가 쥐고 있었을까.”

타나투라를 해치우고 시신을 마저 묻어 주려던 순간 한 노인 시신의 손에서 발견된 것.

비밀스러운 서식지에 사는 타나투라. 비정상적인 수의 알을 낳고 유지해온 기이한 생태. 기사들조차 가기 쉽지 않은 곳에 갔던 노인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젠의 표식을 손에 쥐며 죽어간 노인이라.”

풀리지 않는 의문과 찝찝함.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과 걱정이 뒤섞인 새벽이 지고 있었다.

탁.

문을 닫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아를이 곧바로 닫힌 방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하… 미쳤냐, 아를 드 메이슨.”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뱉은 아를의 금안이 어둠 속 창밖을 향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르베나가 먼저 자신을 안은 순간. 그것이 단지 동료애라는 걸 알면서도 아를의 심장은 미친 듯 쿵쾅거렸다.

르베나를 스칠 때 나던 향기가 제 안 가득 퍼져 들어온다는 게, 검 때문에 투박한 손과는 다른 부드러운 몸이 닿아올 때의 느낌이라는 게, 무엇보다 저를 안을 때 르베나의 전신이 제 품에 꼬옥 들어오는 게…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안았을 르베나에게 제 욕심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평온을 가장했건만.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본 순간… 그 안에서 반짝이는 블루 다이아 반지를 본 순간.

아를은 그녀에게서 선뜻 멀어져 버렸다.

그 순간 아주 조금 당황하던 르베나의 표정이 여전히 선명했다. 아를과 디온이 다친 곳 없나 걱정하던 르베나를 보며 그녀의 향기와 생각보다 작은 몸이 떠올라 먼저 들어가라 평소보다 차갑게 말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귓가에 선명했다.

그 모든 것이 도무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멍청한 놈.”

르베나를 밀치던 동굴에서의 자신에게 말했다.

“미련한 놈.”

질투심에 눈이 돌아 르베나에게 차갑게 말한 아까의 자신에게도.

“답도 없는 놈.”

그리고 그럼에도 그 사람과 나눠 낀 반지를 지닌 르베나가 여전히 좋은 자신에게도.

서서히 눈을 감은 아를의 전신이 그렇게 새벽녘에 서서히 파묻혀 가고 있었다.

* * *

“불편한 건 없나.”

다음 날 오전 일찍 눈을 뜬 르베나는 곧바로 헬리오가 갇혀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제 새벽 아네벨 상회 내의 첩자를 찾아냈다는 칸이 보내온 서신 때문이었다.

[찾아낸 자가 젠의 사람이지만 디오니스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았다고 하더구나.]

달칵. 짤막한 서신을 생각하던 르베나의 서늘한 몸이 이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응접실에 앉아 있던 헬리오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내보내 주세요… 사나 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불안해요, 왕녀님. 자꾸만 불안해요… 그러니 제발 사나 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다니아’를 훔친 이후 여느 때처럼 앓았다는 이야기를 루에게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마주친 헬리오의 얼굴은 생각 이상으로 많이 수척해 보였다.

“불편한 게 있는지 물었다, 헬리오”

하지만 돌아온 르베나의 딱딱한 말에 헬리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 이제 고작 열한 살이에요. 제가 그 ‘다니아’라는걸 훔쳐 뭐 하겠어요? 전 정말 훔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여긴… 여긴 너무 무서워요, 르베나 님…….”

헬리오가 울먹이며 하는 말에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깊어졌다. 헬리오의 말대로 아이는 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들려온 다른 목소리는 르베나와는 전혀 다른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널 가두는 걸로 벌을 대신하고 있는 거야, 헬리오. 감히 ‘보토니에’가 노리고 있는 디오니스의 국보를 훔친 너에게.”

들려온 목소리에 헬리오가 두려운 시선으로 문가에 선 아한을 바라보았다. 맑은 녹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아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긴 르베나 누나의 방보다도 넓고 아픈 널 위해 상주하는 시종, 시녀만 해도 다섯이 넘어. 그런데 아직도 불평이라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한의 말을 들은 헬리오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아한의 말대로 헬리오는 응접실과 드레스 룸, 그리고 두 개의 방이 포함된 이곳을 나가지 못할 뿐, 굉장한 호사를 누리는 벌을 받고 있었으니.

가만히 앉아 있는 헬리오를 보며 아한이 말했다.

“그리고 너의 그 도벽 때문에. 사나 님은 지금 궁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계시고 르베나 누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 역시 사나 님을 못 보고 있어. 그런데 너는 사나 님을 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어려도 염치라는 게 있어야지.”

아프도록 따가운 아한의 말에 헬리오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아한에게 그만하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에 아한은 곧바로 제 입을 닫아 버렸다.

르베나가 다시 헬리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한테 말하기 힘들다면 언제든 시종, 시녀들에게 불편한 걸 말하도록. 그들이 다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물을 것이 아주 많지만… 모두 모른다고만 하니 하나만 묻도록 하지. 이건 아무쪼록 네가 꼭 알고 있는 질문이길 바란다.”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가 조용히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헬리오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르베나가 몸을 낮춰 헬리오의 눈을 맞추며 물었다.

“사라진 ‘다니아’의 위치를 가짜로 알린 서신 때문에 아를과 디온 모두가 크게 위험할 뻔했다, 헬리오.”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르베나는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이어 말했다.

“그 일을 꾸민 자가… 헬리오 너와 같은 젠 사람이더군. 게다가 디오니스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르베나의 말에 헬리오의 눈이 아까보다 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손도 떨리고 있었다.

“헬리오, 만일 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 준다면. 약속하마. 너와 네가 염려하는 모든 이들을 내가 지켜주겠다고.”

르베나의 마지막 말에 헬리오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모른다는 대답과 침묵만을 지켰던 헬리오의 입술이 열리려는 찰나.

콰과과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뿌연 연기가 디오니스의 국경 쪽에서 들려 왔다. 이에 놀란 르베나가 곧바로 헬리오와 아한을 보며 말했다.

“헬리오, 지금 하려던 말은 조금 있다가 와서 듣도록 하지. 아한, 헬리오를 부탁할게.”

말을 마친 르베나는 그대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헬리오의 방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겨우 입을 열려고 했던 헬리오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게 어쩐지 르베나의 마음에 걸렸음에도.

* * *

“무슨 일이지?”

곧바로 국경에 도착한 르베나의 말에 한 기사가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베이라 하나가 국경 인근 마을 주민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사의 말에 르베나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힘없는 자에게 마법을 쓴 건가?”

르베나의 말에 기사가 잠시 긴장한 듯 눈을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방금 그 폭발음은 베이라… 의 마법이 아닙니다.”

기사의 말에 르베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그가 르베나의 앞에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왕녀님. 제발 다한 단장님 좀 말려 주십시오! 이러다 다한 단장님께서 베이라를 죽일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조금 놀란 얼굴로 앞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엄청난 살기를 띠고 형형한 검기를 뽑아 든 다한과 그의 앞에 넝마가 된 채 누워 있는 한 베이라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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