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제4장. 르베이나 (29)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낸 랄프가 혹시 모를 타나투라의 공격에 대비해 온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타나투라는 청각이 발달하지 못했는지 랄프의 소리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거미줄에 집중한 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내뿜어지는 진액이 볼품없는 시신들을 고치처럼 감싸는 모습이 소름 돋았다.
기사들 역시 랄프의 뜻을 받아들인 건지 여타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랄프는 조금 더 확신을 실은 어조로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타나투라에 대한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한동안 이어진 설명이 어느새 거의 끝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타나투라와 새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면 누군가 미끼가 되어 타나투라의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그동안 남은 모두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타나투라를 잡아야 하고요. 그리고 소수의 남은 분들이 뒤늦게 움직일 새끼를 잡아야 합니다. 다행히 새끼는 어미보다 힘이 약하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랄프는 조금 긴 말을 끝내며 아주 천천히, 제 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몇 년 전 아벨디온의 막내 시절, 아벨디온의 미끼가 되겠다, 호언장담을 한 후로 그는 줄곧 모두의 보호만을 받았다. 그리고 디오니스와 ‘보토니에‘의 격전이 자신이 보호받을 마지막 전쟁이 되리라 결심했다.
한 명의 미끼. 그는 분명 거미줄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발이 빨라야 하고 민첩해야 한다. 초기 멤버 그대로 온 탓에 지금 역시 자신이 이 안에선 막내라는 게 우습고도 다행이었다. 아마도 곧 들려올 아를의 명에 랄프는 검을 꺼내 룬을 보호함과 동시에 타나투라의 시선을 끌 준비를 했다.
“셋을 세면 디온 모두 검기를 꺼내 가장 가까이 있는 타나투라의 다리를 잘라낸다. 룬은 현재 의식을 잃었다고 하니 바리타와 마른은 타나투라 제압 후 움직일 새끼를 처리한다. 랄프, 준비됐나?”
긴장으로 조금 굳어진 아를의 물음에 랄프가 확신에 찬 시선을 빛내며 멀리서 대답했다.
“네.”
랄프는 이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룬 경의 등을 뚫은 다리를 먼저 잘라내면 타나투라의 시선을 끌면서 룬 경을 보호할 수 있을 거야.’
아를의 구호와 동시에 검을 뽑아낼 준비를 하며 랄프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하나.”
아를의 구호가 적막에 휩싸인 동굴 안을 울렸다. 동시에 랄프도 꿀꺽 침을 삼켰다.
“둘.”
다시 한번 아를의 저음이 동굴의 공기를 때리자 랄프가 오른손에 힘을 주며 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휙-! 그런데 그때,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날아온 금빛의 검기가 룬의 등을 꿰뚫은 타나투라의 다리를 정확하게 베어냈다.
“랄프! 셋을 세면 룬의 앞을 막아!”
그리고 울린 아를의 고함과 동시에 타나투라의 거대한 몸이 아를이 있는 자리를 향해 기괴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미끼가 될 생각에 굳어 있던 랄프가 순간 당황스러움을 멀리 던져 놓았다. 그리고 약간의 헛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자신이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아벨디온이 어떤 기사단이었는지. 특히 그들을 이끄는 단장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잊고 희생을 자처하려던 자신의 마음이 조금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를의 마지막 구호가 들려왔다.
“셋!”
타나투라의 거대한 몸뚱이에서 칼날보다 날카로운 거미줄이 아를을 향해 쏘아진 순간, 동굴 안을 환하게 밝힐 만큼 강한 열 개의 검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중 여덟 개의 검기가 타나투라의 발을 정확하게 끊어내었다.
“캬아앗!!”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타나투라는 아를을 향한 거미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를은 얇은 쇠줄만큼이나 단단한 거미줄을 가볍게 검기로 자르며 다가온 타나투라의 다리 두 개를 그대로 베어내었다.
“크아악!!!”
동시에 열 개의 다리를 모두 잘린 채 크고 동그란 몸뚱이를 바둥거리는 타나투라를 확인한 아를이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가라, 바리타, 마른!!”
그의 명에 움직이지 않고 있던 두 개의 검기가 다른 검기로 밝혀진 동굴 안을 스르륵- 움직이고 있던 작은 생명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캬아아-!”
“캬아아악!!’
동굴 안을 찢어놓듯 울리는 새끼 두 마리의 단말마가 귀청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검기로 밝혀진 동굴 안이 삽시간에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미간을 구긴 아를의 눈에 넓은 동굴 안이 다시 어두워질 정도로 모습을 드러낸 수백 마리의 타나투라 새끼들이 비쳤기 때문이다.
모두 손바닥만 한 개체들이긴 했지만, 거미줄을 쏘고 사람의 몸을 녹이는 진액을 뿜으며 흡혈이 가능한 것은 어미와 똑같았다. 하지만 아를을 비롯한 디온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검기로 다가오는 새끼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기 시작했다.
검기 한 번에 수십 마리의 새끼들이 불에 탔고 괴기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동굴은 여전히 밝아지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새끼들이 많습니다, 단장!”
바리타의 외침에 주변을 둘러 본 아를이 룬의 앞에 서서 멋진 검기를 뿌리는 랄프를 보며 외쳤다.
“랄프, 보통 타나투라의 새끼가 몇 마리지?”
“캬캬캬!!”
눈앞에 즐비한 타나투라의 새끼들을 베어내며 랄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많아 봐야 수십 마리입니다. 알의 형태로 낳긴 하지만 이놈들의 서식지가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에너지를 비축하기 힘들어서 그 이상은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랄프의 말에 아를의 시선이 어미 타나투라에 의해 죽어 고치가 된 수십 구의 시신을 향했다.
이 외진 곳을 향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다니아’를 추적하기 위해 칸의 서신을 받고 이곳으로 온 자신과 디온. 칸의 추적 마법이 수많은 동굴 중 단 하나를 짚어 낼 정도로 정밀한가에 대해 들었던 잠시 잠깐의 의문.
“젠장… 함정이군.”
곧 진실을 깨달은 아를이 모두를 보며 외쳤다.
“적당한 검기로 주변만 치우면서 버텨라. 아마도 칸 님의 쪽지가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금안을 번쩍 빛내며 그보다 밝은 검기로 주변을 한 바퀴 베어 버린 아를이 약간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곧 르베나가 올 거다.”
화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마치 아를의 말이 마법을 발현하는 주문이라도 되듯 동굴 안에 익숙하고도 반가운 검붉은 마력이 타오른 것은.
“캬캬캬아아아--!”
수많은 타나투라 새끼들의 비명도 잠시, 동굴 안 전부를 감싼 검붉은 마력은 그것들을 모두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어서 들어온 조금 더 밝은 빛의 검붉은 마력은 기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듯 감싸기 시작했고 이어 동굴을 밝힌 보랏빛의 힘은 재가 되어 흩날리는 타나투라의 흔적들을 조용히 없애 버렸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버린 하늘과 한치도 다름없는 어둠이 다시 동굴 안을 침범했다.
조금 전의 괴성과 검을 긋는 소리가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침묵 또한 편안하게 그곳 모두를 감싸 왔다.
화악-! 순간 밝은 보랏빛의 힘이 동굴의 제일 위로 솟아오르며 동굴 전체를 환히 밝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주 조금 지쳐 보이는 르베나와 다한, 그리고 칸과 루안이 있었다.
“총단장님!!”
누군가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르베나의 붉은 시선이 열 명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지나치다 이윽고 한 곳에서 멈춰 섰다.
“룬이 다친 모양이군.”
르베나의 말에 랄프가 마구 고개를 끄덕이자 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곳으로 향했다.
이내 르베나의 시선이 다시 모두를 훑다가 또다시 어느 한 사람 앞에 멈추었다. 저벅저벅. 그리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걸음을 옮긴 르베나가 그, 아를의 앞에 섰다.
언젠가의 아를이 르베나에게 한 것처럼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주던 르베나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의 아를을 덥석 껴안았다.
“르베… 나?”
르베나가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자신의 말과 동시에 나타난 것도 조금 놀랐는데 갑자기 포옹이라니. 온몸의 신경과 세포들이 뜻밖의 습격을 당한 듯 굳어졌다.
아를의 당황스러운 부름에도 르베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아를을 안았다. 그 모습에 아를뿐만 아니라 다한과 다른 기사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함정인 걸 알았는데… 그런데 마법 간섭이 너무 심해서… 이번엔 정말 잘못되는 줄 알았어.”
그제야 자신을 안은 르베나의 팔이 아주 조금 떨리는 걸 느낀 아를의 금안이, 그리고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자신을 안은 르베나에게 말했다.
“네가 와 줄 걸 알았어. 그리고 내 믿음대로 아주 적절한 순간에 네가 와서 생채기도 안 났어. 민망할 정도로 멀쩡해.”
아를의 말에 곧 그들을 바라보던 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법 간섭 정도가 심해 르베나 님이 아주 크게 무리를 하셨습니다. 무사하신 것을 확인하시니 그만큼 안도감이 큰 모양입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기사들 앞이기에 존대를 한 칸이 자신의 마력으로 룬의 등을 마저 치유하며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웃으며 르베나를 향해 말했다.
“저희는 죽음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맞아요! 게다가 총 단장님이 항상 구해 주시면서.”
“그리고 총단장님! 포옹을 잘못하신 게 아닌가요? 여기서 최약체는 적어도 단장은 아닌 거 같은데.”
하나둘 쏟아지는 격의 없는 말에 어느새 긴장이 풀어지고 안도 섞인 웃음이 차올랐다.
이에 아를 역시 보기 드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자신을 가볍게 안은 르베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르베나의 목에서 반짝이는 어떤 것에 이끌리듯 시선이 닿았다. 동시에 무방비하게 허물어졌던 아를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른 나가자. 룬을 빨리 데려가야지.”
조금 전의 부드러운 어조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딱딱한 말로 르베나를 밀어낸 아를의 몸이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리고 그런 아를을 바라본 르베나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모두 피곤하겠다. 얼른 돌아가자.”
돌아선 아를의 등 뒤. 큰 키가 만들어 낸 작은 그림자가 순간 르베나의 얼굴을 살짝 어둡게 물들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