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제4장. 르베이나 (28)
동굴이 무너지기 전, 마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를이 그쪽을 향해 멀어지자 조금 스산해진 랄프가 제 팔을 문지르며 룬에게 바짝 붙었다.
“조금 무서워요. 룬 경.”
자꾸만 칭얼거리는 랄프의 목소리에 룬이 랄프를 발로 한 번 가볍게 차 주었다.
“으앗!! 뭐 하시는 거예요!!”
룬의 행동에 놀란 랄프가 소리치자 룬이 그에게 살짝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나도 저 시신들 묻을 땅 좀 파려고. 넌 무서움 많이 타니까 구석에 잠시 좀 처박혀 있어라, 막내.”
“막내라뇨! 전 이제 어엿한 아벨디온의 원년 멤버라구요!!”
룬에게 소리치며 대답은 했지만 랄프는 가만히 구석에 몸을 맡겼다. 말만 무뚝뚝하지 무서워 벌벌 떠는 자신을 배려한 룬의 행동이 못내 기꺼웠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같아선 ‘아닙니다,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붙이고 싶었지만, 뭔가에 빨린 듯 메마른 시신과 이곳의 어둡고 습한 공기가 랄프는 새삼 무서워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 마른 경과 아를 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룬이 다른 기사들과 땅 파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구석에 몸을 맡긴 랄프의 엉덩이에 무엇인가가 느껴진 건.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엉덩이에 닿은 돌 같은 걸 집어 든 랄프의 시선이 그것에 집중되었다.
“무슨 돌이 이렇게 매끄러워? 게다가 색이 꼭 비취 같네?”
혼자 중얼거리던 랄프의 몸이 꼭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시선을 든 그의 눈에 마치 체내의 피를 모두 빨린 것 같은 시신들과 저 멀리 마른의 손에 들려 있는 결정의 색이 보였다.
제 손에 있는 것과 꼭 닮은 결정. 랄프가 서둘러 시선을 돌리자 왜 이제껏 보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같은 모양의 결정이 많이도 널려 있었다.
오소소- 갑자기 랄프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모두 검으로만 상대해라! 좁은 동굴 안이니 검기는 빼지 말고!”
그 순간 아를의 목소리와 함께 누워있던 시신들이 일어나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사들이 시신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없는 그때.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랄프의 시선은 움직이는 시신들의 위를 향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가는 선. 모든 시신의 위에 연결된 듯 보이는 그것들.
“…타나투라……?”
순간 조용히 읊조린 랄프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두에게 외쳤다.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
하지만 그의 비명이 우습게도 모든 기사는 달려드는 시신들을 상대하느라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고 이내 동굴의 위로 스며드는 큰 그림자를 본 랄프의 온몸이 굳어 버렸다. 동시에 굳어진 그의 시야에 시신들을 상대하는 기사들을 향해 점점 길이를 늘려 가는 거미줄이 보였다.
‘안 돼… 움직이면. 소리쳐야 해. 한 번 더 소리쳐야 해!’
갑작스러운 충격에 말을 듣지 않는 제 몸뚱이를 탓하며 랄프의 시선이 한껏 찌푸려졌을 때였다.
“모두 랄프의 말을 들어라!!”
그 순간 다시 외쳐진 아를의 말에 기사들 모두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동시에 난 굉음과 함께 동굴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구석에 있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룬의 다급한 표정이 랄프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으윽.”
나지막한 신음을 흘린 랄프가 어렵사리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잠시 멍한 기운이 조금 사라지길 기다렸다.
비취색의 결정, 무감각하게 움직이던 흡혈된 시신들, 그리고 시신들을 조종하던 얇고 강한 거미줄.
“…타나투라!”
갑자기 떠오른 기절 직전의 것들에 랄프가 놀라 외쳤다. 둘러보니 자신은 동굴이 무너지며 피어오른 자욱한 먼지가 채 가시기도 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가 않네?’
저 정도의 돌들이 천장에서 무너져 내렸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이상했다. 이 같은 생각에 문득 시선을 내린 랄프의 눈이 사정없이 떨려온 건 그때였다.
“…룬 …경?”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랄프의 손이 자신을 감싼 채 누워 있는 룬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그의 등에 꽂혀 있는 길고 얇은 어떤 것도.
광택 도료라도 바른 듯 반들반들하고 까만 것. 룬의 등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는 어느 것.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린 랄프의 눈이 순간 격하게 진동했다. 동굴을 가득 메울 만큼 큰 몸집과 숭숭 나 있는 어마무시한 양의 털. 그리고 죽어 있던 시신들을 꼬챙이처럼 꿇고 들어간 열 개의 다리. 심지어 그중 하나의 다리는 룬의 등에 꽂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힘을 준 랄프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제 몸을 덮은 룬을 바라보았다.
아직 건장한 체격을 보니 아직 타나투라가 그의 피를 흡혈한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랄프. 침착해. 룬 경은 아직 무사해. 타나투라의 발이 시신들만 찍고 있는 걸 보면 다른 기사들은 그 순간 움직이지 않았던 게 분명해. 그러니까 생각하자. 타나투라, 그건 어떤 특징을 지녔지.”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의 박동을 무시하고 랄프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 몸을 덮고 있는 룬의 무게가 너무 아프고 두려워서 랄프는 쉽사리 생각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저는 지식이 해박해서… 언제고 다른 기사들에게 꼭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순간 마를한을 향하던 도중 마주한 가젤 떼와의 싸움에서 희생을 각오했던 그가 르베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이후 더 열심히 공부했잖아. 그리고 거기엔 분명 타나투라에 대한 정보도 있었어!! 그러니까 기억해 내, 랄프.’
자신의 강점을 처음으로 입 밖에 소리 내었던 그 날. 그날을 떠올리며 랄프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점점 약해지는 룬의 숨소리와 그의 등을 꿰뚫은 타나투라의 긴 발이 그의 신경을 온통 빼앗았다.
‘틀리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된 정보를 기억해서 룬 경을 더 위험에 빠트리면. 그러면 난 어쩌지.’
불안한 상황에서 떠오른 부정적 가정은 곧 더 큰 힘을 내기 시작했다. 랄프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고 덜덜 떨려오던 팔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믿어라, 랄프. 방금 네가 한 말을. 그리고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때는 그런 이유로 널 뽑은 날 믿어라. 그리고 그마저도 의심이 가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게 목숨을 맡기고 네게 등을 맡길 동료들을 믿어라.”
순간 랄프의 머릿속에 르베나의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들의 단장. 그들의 위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걸 내놓는 걸음 하나마저 의지를 불어넣던 그들의 왕녀. 그리고 지금 아직도 막내 같다고 생각되는 그를 위해 몸을 던진 룬 경.
곧 랄프의 온몸이 거짓말처럼 떨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랄프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거미줄을 움직여 시신들이 기사들을 공격하게 만들어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다음에 공격하려 했으나 타나투라는 실패했다. 아를 단장의 명에 디온 모두가 거미줄에 닿기 직전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하려 뛰어든 룬 경은 제외.’
랄프는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타나투라는 거미줄의 진동을 기가 막히게 느끼지만 아이러니하게 시간과 청각은 거의 쓸모가 없을 정도로 둔하다. 그러니까 약간의 소리라면 못 들을 가능성이 크다. …방금처럼. 그에 대한 시험물은 나다.’
곧 생각을 멈춘 랄프가 제 오른쪽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한번 흘끗 본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타나투라의 거대한 몸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열고 소리를 내었다.
“제 말이 들리신다면 소리도 내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들어만 주세요. 랄프입니다.”
곧 랄프의 목소리가 타나투라의 바로 앞에서 동굴 안쪽을 향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휘잉--.
주위를 감싸는 검붉은 마력에 반응하듯 얼핏 차가워진 공기가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우웅—우우웅--.
그리고 그 공기마저 제압하듯 진동을 일으킨 검붉은 마력의 힘이 점점 더 크기를 불려 나갔다.
뚝, 뚜둑-.
무너진 동굴 앞. 양손 가득 검붉은 마력을 내뿜으며 조용히 눈을 감은 르베나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마저 소리가 되어 들리듯 사위가 조용했다.
칸과 루안, 다한까지도 그런 르베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까지 작게 내며 그녀의 주변을 안정시켰다.
우웅—우우웅--!!! 순간 공기가 공명하는 소리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펄럭-! 동시에 다한의 등에 있던 아벨디온의 검붉은 망토가 나부끼듯 펄럭였고 이것이 마치 신호인 듯 일행을 감싼 공기가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마력을 집중한 르베나의 손이 주변의 압력에 서서히 떨리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주위의 공기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됐어요.”
순간 어둠 속에서 드러난 르베나의 검붉은 시선이 일렁였고 중기 중에 제 마력을 흘려 넣은 칸의 몸에선 전율이 일었다.
“정말… 성공했구나. 르베나”
약간은 떨려오는 칸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닦아내며 말했다.
“성공해야죠, 이 안에 내 사람들이 있는데.”
차가운 밤바람이 순간 르베나의 젖은 이마를 식혀주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얼굴에는 미약한 미소가 걸렸지만, 칸을 위시한 루안과 다한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데자르 사막에서의 마법. 그중에서도 가장 간섭이 심하다고 알려진 몇몇 장소에서는 평생을 바쳐 마법을 시도했던 대마법사들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할 정도로 정상적 마법의 운용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르베나와 칸마저 마법에 실패한 이곳 동굴 앞에서.
방금 르베나는 모두 마법사들이 기함할 정도의 일을 벌이고야 만 것이다. 마법 간섭의 성질을 지닌 이곳의 공기를 모두 실드 안에 가둔 채 그 성질 자체를 제 마력과 흡사한 것으로 바꿔버린 기적.
“기화.”
뒤에선 이들의 충격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르베나의 짧은 한마디에 실드 안에 들어 있던 데자르 사막의 모든 공기가 순종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동굴 앞의 돌과 자갈, 모래들이 한순간 공기 중으로 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