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07화 (207/276)

207화

제4장. 르베이나 (27)

“위에서 세 번째라고 했다던가?”

가파른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르베나의 시선에 여기저기 성성이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들이 보였다. 그중 위에서 세 번째 동굴은 입구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모두 무사한 것 같구나.”

어느새 따라온 칸의 마력이 사라지며 그 사이로 조금 놀란 표정의 다한도 보였다.

“두 분 다 데자르 사막에서 텔레포트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부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의 순수한 감탄에 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새겨졌다. 자신보다 딸에 대한 칭찬이 더 기분 좋은 팔불출 같은 모습이 다한의 얼굴에 작은 미소를 지어냈다.

그리고 곧이어 루안이 모습을 나타냈다. 동시에 그를 보며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놀라움으로 살짝 위로 올라갔다.

“세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데자르에서 텔레포트가 가능한 정도였을 줄은 몰랐네요.”

예상치 못한 르베나의 말에 잠시 움찔한 루안이 계속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칸을 한번 보고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에 비하면 미약한 재주입니다.”

겸손한 루안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잠시 머물렀다. 특히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그의 신력에. 그리고 그 순간.

“루아나!!”

급하게 언령 마법을 외친 칸의 목소리와 동시에 그들 주위로 단단한 실드가 씌워졌다. 그리고 발아래 땅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르르 콰광……!!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곧바로 이어졌고 칸의 빠른 마법 덕분에 일행은 모두 땅에서 발을 뗀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본 일행의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 르베나와 칸이 디온의 온기와 움직임을 확인했던 바로 그 동굴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놀란 다한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아주 잠시 르베나는 루안의 신력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코 이 정도의 힘을 가진 마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신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그런 르베나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 아니었다. 뭔가 무력에 의한… 아니, 무력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어.”

칸의 말에 르베나가 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아를과 디온의 기척에 아주 잠시 마음을 놓았는데… 그런데 그 잠깐의 방심 때문에 그들이 함정에 빠진 채 이곳에 왔다는 중요한 사실조차 잊다니.

자신을 탓하며 입술을 점점 더 붉게 물들여 가는 르베나의 모습을 보며 칸이 딸의 어깨에 조심히 손을 올린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디온이다, 르베나. 그것만 생각하렴.”

칸의 말에 그를 마주 본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곧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평온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전신에 검붉은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단장님.”

“마른, 뭘 발견한 건가?”

자신을 부른 기사, 마른에게 다가가며 아를이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내 마른의 손에 들린 어떤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단단해 보이는 작은 결정은 비취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마른의 앞에 수백 개는 더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아를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비취색 결정 수백 개라… 왜 낯설지가 않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를의 눈이 매서워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가 빠른 속도로 제 검을 빼 들며 뒤로 돌아선 찰나,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시체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앞에 있는 기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검으로만 상대해라! 좁은 동굴 안이니 검기는 빼지 말고!”

아를이 디온 모두에게 소리치며 제게 달려든 노인의 시신을 베고 마른에게 달려들던 다른 시신을 발로 찼다. 분명 가죽밖에 남지 않은 시신들은 마치 무엇인가에 조종이라도 당하 듯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아를의 눈에 빠르게 다가오는 한 시신의 위로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

“모두 움직이지 말고 멈추세요!!!”

동굴 안을 가득 울리는 랄프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고 동시에 다가오던 시신의 위쪽으로 검을 그은 아를의 눈이 충격으로 한번 떨려왔다.

“모두 랄프의 말을 들어라!!”

아를이 곧이어 디온 모두에게 움직이지 말 것을 재차 당부한 순간이었다.

사사삭—!

동굴 안에 있는 모든 기사의 팔뚝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만한 소리가 거대한 움직임의 그림자와 함께 들려온 것이다.

우르르, 콰광……!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굉음과 함께 동굴 안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여기는 마법 간섭 정도가 다른 곳보다 훨씬 심합니다.”

루안이 다시 한번 가시적인 보랏빛 신력을 동굴 앞에 무너져내린 돌들을 향해 쏘자 신력들이 죄다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이를 본 르베나가 제 몸을 감싼 순도 높은 마력을 쏘아 보았다. 하지만 이 또한 강한 무엇인가에 튕겨 나가듯 빗맞았고 이에 동굴 앞에 쌓여 있던 작은 바위들이 큰 진동을 내며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칸에게 말했다.

“데자르 사막에 유난히 간섭이 심한 곳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인가 보군요.”

르베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칸이 말을 보탰다.

“간섭의 성질을 강하게 띤 공기라면 수백, 수천 번 이곳에서 마법을 써야 좀 익숙해질 거다.”

칸의 말에 이윽고 르베나가 제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그 행동에 곧 르베나의 입술에 다시 붉은 피가 번지고 입안으로 쇠붙이의 맛이 흘러들어왔다.

“이런, 르베나.”

놀란 칸이 얼른 르베나의 입술을 제 마력으로 치유했다. 그러자 언뜻 고개를 든 르베나의 눈에 아픔으로 물든 칸의 얼굴이 들어왔다.

“죄송해요.”

그리고 나온 르베나의 말에 놀란 건 오히려 칸이었다. 칸의 놀란 눈을 본 르베나가 다시 한번 그에게 말했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아를… 에게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버지의 얼굴까지 그렇게 만들 줄은 몰랐네요.”

살짝 눈을 피하며 조금은 어색하게 말을 하는 르베나의 모습에 칸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르베나. 너야말로 얼마나 참을 일이 많았으면 제 몸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그런 습관이 생겼겠니. 다만…….”

칸이 르베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이미 힘든 상황이라면 널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널 힘들게 한 그 사람을 괴롭히렴. 그게 힘들면 나에게 말하거라, 르베나. 이제는 내가 대신 혼내 줄 테니.”

짐짓 엄한 어조로 말을 하는 칸의 말이 이 순간에조차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르베나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칸이 르베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무너진 동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기사들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거 보니 모두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구나.”

칸의 말에 얼굴에 짓던 미소를 어느새 말끔히 지워낸 르베나 역시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에, 하지만 뭔가 이상해요. 아를이라면… 또 아벨디온 중에서도 디온이라면 동굴이 무너질 상황을 피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냥 놔둔 거라면 분명.”

르베나의 말을 이번엔 다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거겠죠.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저들을 묶어 놓았을지도 모르고요.”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아를은 기감이 빠른 기사다. 어떤 때에는 베이라인 그녀보다도 더 빨리 위험을 감지하고는 했다. 그런 아를이 동굴이 무너지는 순간, 기사들과 함께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분명 동굴 안에 그럴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던 걸까요?”

순간 들려온 루안의 질문에 르베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를은 다른 기사들을 먼저 내보내고 남았을지언정 모두를 함께 위험에 빠트릴 인물이 아닙니다.”

르베나의 단호한 답에 이번엔 다한이 물었다.

“아니면 다친 기사가 있는 걸까요? 함정인 만큼 안에 있는 위험한 것과 싸운 거라면…….”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굴이 무너지기 바로 직전까지 모두의 생명력이 안정적이었어. 전투가 있었다면 분명 동요가 있었을 거다.”

르베나의 말에 다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그때 동굴 앞에서 무엇인가를 찾기라도 하듯 서성이던 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르베나가 다가가니 칸의 손에는 오후의 석양에 반짝이는 작은 결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서는 비취와 같은 색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가 아닙니다.”

그리고 덩달아 칸의 곁으로 다가와 두리번거리던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시선을 돌리자 무너진 입구의 돌들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많은 결정이 보였다.

“…타나투라의 결정?”

작게 중얼거린 르베나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거 같구나. 맙소사. 타나투라가 데자르 사막에 서식한다니……!”

하얗게 질린 칸의 얼굴에 다한이 걱정스레 되물었다.

“타나투라? 거미의 한 종류가 아닙니까?”

들려온 다한의 물음에 칸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빠르게 답했다.

“보통은 그렇지만 비취색의 결정을 만드는 타나투라는 1급 몬스터에 분류될 정도로 위험합니다. 얇고 긴 다리로 사람의 피를 흡혈해 에너지를 얻고 공격당한 시신을 자신의 진액으로 굳히죠. 그런 다음 그것을 이처럼 작게 압축시켜 새끼에게 줄 비취색의 결정으로 만듭니다. 특히 이 타나투라가 위험한 이유는 서식지에 들어온 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조용히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나 르베나의 기감이라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일 겁니다.”

칸의 말에 다한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났다. 마법 간섭이 심한 데자르 사막에서 정확하게 텔레포트를 구사하는 베이라들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이라니. 다한의 얼굴을 마주 본 칸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타나투라는 이미 흡혈한 시신들을 자신의 거미줄에 연결해 서식지에 들어온 이들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몸을 숨기기 위해서죠. 아마도 아를 경과 기사들이 나오지 못한 이유가 이것인 것 같군요.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없게 동굴을 무너트린 것도 타나투라의 짓인 듯합니다.”

칸의 말에 르베나 역시 주변의 타나투라 결정을 보며 얼굴을 굳혀갔다. 그리고 칸의 이야기를 듣던 다한이 그답지 않게 조금은 다급한 투로 물어왔다.

“약점은, 약점은 뭡니까?”

다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손안에 든 타나투라의 결정을 노려보는 르베나에게서 들려왔다.

“일단 이놈들은 개별적으로 서식하는 특성을 지녔고 시각과 청각이 없어 움직임으로만 먹이를 포착하지. 그러니 움직임을 멈추고 놈의 위치를 파악해 일시에 공격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잠시 말을 멈춘 르베나가 손에 쥔 타나투라의 결정을 이내 부숴 버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놈의 정체와 정보를 아는 사람만 가능한 전술이다. 게다가 이미 타나투라가 결정을 만들기 시작했다면…….”

르베나의 붉은 눈이 어둡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놈한테 식욕이 왕성한 새끼가 있다는 말이다. 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면 디온과 아를은… 전멸이다.”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날의 석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완연한 밤. 빛이 없는 하늘. 몬스터들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간이 데자르 사막의 공기를 물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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