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05화 (205/276)

205화

제4장. 르베이나 (25)

베이라들의 일을 대충 정리하고 제노스와 잠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눈 르베나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레턴이 준 고서를 마저 읽기 위해서였다. 그때 문득 앞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르베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긴 복도에 울려 퍼지던 그의 발걸음 소리도 덩달아 침묵했다.

“르베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르베나가 상대방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망설이는 듯 다가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그들을 곁에 두지 않으면 오히려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적은 수의 인원이 아니니 자칫 ‘보토니에’에게 포섭이라도 당하면 더 골치 아프고.”

르베나의 말에 작게 멈칫한 그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 말을 믿어. 네 결정도 믿어. 다만 나는 그 베이라들이 우리가 수색할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하필 지금 온 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래서 네 안전이 더 걱정되는 거고. 조사가 더 필요해.”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말했다.

“나도 그건 이상하게 생각해. 그래서 아한에게 부탁한 거고. 하지만 아벨디온 자체적으로 그들을 조사하겠다는 건 반대야.”

르베나의 단호한 결정에 아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들어왔을지 몰라. 그 표적이 너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디온’에서 자체적으로 몇 명만 추려서 알아볼게.”

그의 말에 르베나의 머릿속에는 잠시 이전 생에 겪었던 어떤 일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믿음직한 아군이었던 베이라들이 세츠를 공격하고 그녀를 찬양하며 벌인 자폭 사건. 르베나조차 막지 못했던 그 일로 그녀가 어디까지 몰렸었는지. 얼마나 참담했는지. 그 끝이 어땠는지. 르베나는 곧 아를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절대 안 돼. 그들은 베이라야. 아무리 디온이 검기에 능하다고 해도 잠재된 위험까지 피할 순 없어. 정 조사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가스트에게……!”

“됐어.”

아를이 짧게 대답하며 르베나의 말을 끊었다. 아를이 르베나의 말을 중간에 자른 것이 처음임에도 르베나는 그가 짓는 냉소적인 얼굴에 더 놀라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를.”

르베나의 부름에 무엇인가 잔뜩 가라앉아 보이는 아를의 금안이 그녀를 향했다. 그러더니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결국 넌 나를 못 믿는다는 거잖아.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넌 여전히 베이라나 세츠 앞의 나는 소용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아를의 말에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르베나의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누구보다 열심히 검기를 훈련하고. 검술을 훈련하는 사람. 언제나 상대가 누구든 르베나의 앞을 가장 먼저 막아서는 사람.

아무리 다치고 힘들어도 르베나에게 제 넓은 등을 언제나 내어주는 사람.

그게 아를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상대가 베이라라 안된다는 말을 해버리다니.

르베나가 사과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아를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도대체 난 언제 너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벨디온 합동 훈련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조금 씁쓸한 미소를 남기고 르베나를 스쳐 지나는 아를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르베나라서. 그가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 얼마나 많은 걸 걸었는지 아는 그녀라서. 르베나는 사과 따위를 핑계로 그를 붙잡지 못했다.

탁.

방에 들어와 피곤한 듯 이마에 손등을 올린 르베나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곧 르베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 의지가 되냐니. 넌 이미 의지 그 자체인데. 그래서 조금의 위험도 너한테 가는 게, 그게 싫은건데.”

듣는 이 없는 르베나의 중얼거림이 추운 겨울의 서리처럼 넓은 방 안 가득 퍼지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약간의 간격을 두고 루가 들어왔다. 어느새 따뜻한 차와 다과를 내어온 루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를 경은 만나고 오셨어요?”

루의 물음에 르베나가 시선으로 의미를 묻자 루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아를 경이 왕녀님께서 좋아하실만한 디저트라고 가져오셨거든요. 그리고 직접 말씀 전하겠다고 하셨는데. 못 만나셨어요?”

루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제 앞에 놓인 폭신한 크레이프를 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크레이프 속 겹겹이 얇게 발린 생크림. 그 위로 잔뜩 놓인 신선한 딸기와 그레이풀의 조화가 보기만 해도 먹음직해 보였다. 순간 아를이 왜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왔는지를 깨달은 르베나의 입에서 더 큰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에 루가 살짝 르베나의 심기를 살피고는 눈치껏 방을 나섰다. 달칵. 루마저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된 방. 르베나는 좋아하는 디저트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아를을 떠올리고 있었다.

헬리오가 온 후로 자주 의견이 갈리고 예전보다 부쩍 표정이 어두워진 아를. 하필 그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오늘만큼 저 자신이 머저리같다고 느낀 적이 없어 르베나는 잠시동안의 자기반성을 한 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교적 궁에서 가까운 남쪽 국경 안쪽. 그곳에 잔뜩 몰려있는 베이라들. 그들을 바라보자 조금 전 베이라들의 대표로 나섰던 맥스란 자가 르베나의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전의 삶에서 연합군과의 전쟁 전후로 많은 베이라들을 소개받았지만, 그중 한 번도 본 적 없던 베이라. 뒤에 선 자들 역시 간혹 눈에 익은 자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이었다.

“그게… 좋은 걸까, 안 좋은 걸까.”

가만히 창밖을 향하는 르베나의 붉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흰 눈처럼 가만히 내려앉았다.

* * *

“다음 사람 오세요.”

무뚝뚝한 아한의 말에 한 베이라가 주뼛주뼛 다가와 제 팔을 걷어 붙였다. 그러자 아한이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마력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훑는 아한의 마력이 따끔거리기도 하고 묘한 이질감이 느껴져 베이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벌써 열 명이나 했는데 너무 빠른 건 아니니, 아한?”

부드러운 후벤의 물음에 아한이 감았던 눈을 뜨고 옆에서 표기를 담당한 이에게 합격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쟁이 언제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렇게라도 누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아한의 말에 후벤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르베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가 어느새 커 제 역할을 담담히 수행해나가는 모습이 주는 묘한 뿌듯함이었다.

그때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수십 구의 말들이 국경을 향해 달려왔다.

“아를……?”

후벤의 옆에 서 있던 다한의 혼잣말에 후벤과 아한의 시선마저 다가오는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동시에 안장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아를이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어딜 가는 거지, 아를 경?”

다한의 물음에 아를이 자신을 바라보는 베이라들을 시린 눈으로 한번 훑어본 후 답했다.

“방금 칸 님에게서 전서가 왔어. 그게 있는 걸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되었다고. 너무 시선을 끌지 않게 내가 디온 몇만 대동하고 왔으면 한다더군.”

아를의 말에 다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칸 님이 진짜 빠르긴 빠르시네. 근데 자네가 가면 룬 경도 함께 가는 건가?”

르베나의 명으로 아한의 호위를 담당하며 서 있던 룬이 다한의 말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왕녀님의 명이신데 저는 여기 있어야죠! 아하하하!”

아를의 눈치를 살짝 보며 애원하듯 다한을 바라보는 룬의 얼굴이 꽤 절실해 보였다.

“네 말은 바리타가 가져왔으니 그대로 출발하면 된다.”

하지만 감정의 실오라기조차 보이지 않는 아를의 선연한 말에 룬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아한 님의 호위는요? 르베나 왕녀님께서 특별히 제게 하사하신 명인데 이걸 단장 마음대로 바꾸면……!”

“루나타.”

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를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루나타를 부르자 그가 룬을 보고 한번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고 싶었는데 진짜 아쉽다, 룬. 조심해서 다녀오고 단장님 보필 잘 해라.”

순식간에 뒤바뀐 운명에 룬이 마지막 애절함을 담고 다한과 후벤, 아한을 차례로 바라보았으나 모두 슬며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들 앞에 선 아를의 금안과 표정이 여느 때보다 싸늘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룬이 눈물을 흘리며 말에 올라타자 아를을 위시한 열 명의 디온은 곧바로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그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후벤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를 경의 표정이 좋지 않군.”

이에 아한이 흙먼지가 잔뜩 흩날린 뒤쪽을 살짝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나마나 베이라들 일로 누나랑 한 판 했겠죠, 뭐.”

조금은 성의 없이 들리는 아한의 말에 후벤이 다시 말했다.

“요즘 르베나 님과 아한 경의 의견 충돌이 잦구나. 원래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 말에 다한 역시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보태었다.

“헬리오가 온 이후 계속 그러니 아벨디온 내에서도 걱정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서로 등을 맞댄 사이인데 쉽게 틀어지지는 않겠죠.”

다한의 말을 듣고 조금 전 공격적인 신력을 쓰던 헬리오를 떠올린 후벤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아를이 떠났던 곳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국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인 건.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방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곧 모습을 나타낸 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예의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고생이 많으십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놀란 아한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칸 님! 어쩐 일이세요? 전서를 보내셨다기에 바쁘신 줄 알았는데.”

아한의 말에 루안에게서 이것저것을 옮겨 받던 칸이 아한을 보며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 르베나, 아니 르베나 왕녀님께 서신을 받고 베이라들의 야영 물품을 전해 드리러 온 것뿐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칸과 루안.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아한과 다한, 후벤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려갔다. 또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늦겨울의 눈이 그들의 시야를 충분히 가릴 때까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