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04화 (204/276)

204화

제4장. 르베이나 (24)

“베이라들이 말인가?”

놀란 제노스 왕의 말에 그 앞에 부복한 '다니아'의 기사가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말했다.

“네, 지금 성문 앞에 수백 명의 베이라들이 왔습니다. 일단은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에 대기하고 있긴 한데…….”

기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제노스 왕이 옆에 있던 크론에게 말했다.

“어서 르베나와 아벨디온의 단장들, 그리고 후벤 후작을 들라 하게.”

제노스의 명에 크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는 그가 베이라임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그의 마법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르베나와 아를, 다한과 후벤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섰다. 이들의 표정을 본 제노스 왕이 잠시 베이라들의 출현을 알린 기사를 물러가게 하고는 말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제노스의 말에 르베나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열지 않자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아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은 르베나 왕녀님께서 마력으로 봉쇄한 방에 가둘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니아‘가 사라졌습니다.”

아를의 말에 제노스가 놀라 르베나에게 물었다.

“사라졌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르베나?”

제노스의 걱정스러운 음색에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텔레포트가 아닌 다른 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로 제가 안전 장치를 해 뒀으니 너무 염려는 마세요. 무엇보다 당장은 ’다니아’를 작동시킬 수 없을 겁니다.”

곧 제노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르베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 베이라들이라니… 무슨 일인가요?”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 왕이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그들을 부른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야기를 다 들은 후벤이 먼저 놀란 듯 소리쳤다.

“베이라들이 말입니까?”

후벤의 말에 제노스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한이 조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한 수의 베이라들이 함께 있다는 얘기는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르베나 왕녀님께서 베이라임을 알게 되고 아를 경과 잠적한 베이라들을 추적한 적이 있으나 많은 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찾아낸 소수의 이들은 모두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원했고요. 그런데 수백 명이라니……!”

다한의 말에 르베나의 눈도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전의 시간에서 숨어 있던 수많은 베이라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 또한 이맘때쯤이었다. 다만, 그때의 베이라들은 후츠 백작의 명으로 르베나의 뒷통수를 치러 왔었지만.

이번 생에 왕녀로 즉위한 르베나는 곧바로 후츠 백작을 디오니스의 땅끝으로 보내 버렸다. 찢어 죽일 만큼 괘씸했으나, 당장은 그저 조금 욕심이 많은 백작일 뿐이었기 때문에.

이후 일부러 그의 호위들까지 르베나의 사람들로 두었으나 수상한 흔적은 아직까지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때 아를이 제 목소리를 내었다.

“안 됩니다. 곧 보토니에와의 전쟁이 있을 텐데 믿을 수 없는 병력을 디오니스로 들일 순 없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들어오라고 하시죠, 폐하. 최소한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르베나였다. 그녀의 말에 아를이 수려한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안 돼, 이것만큼은 찬성할 수 없어. 정체가 확인되지도 않은 베이라들을 들이자니. 그러다 그들이 폭동이라고 일으키면? 백성들이 다칠지도 몰라. 막말로 그들 중 보토니에라도 섞여 있으면 어쩔 거야?”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정도는 아한이 걸러낼 수 있어.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뒀다가 전쟁 중 문제가 생기면 더 곤란해. 그러니까 아를, 그냥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나아.”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헬리오가 온 이후로 내내 의견을 달리하며 부딪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한편 깊은 염려의 빛을 내비췄다.

다가올 전쟁에 가장 합이 잘 맞아야 할 두 사람이 이렇게 의견이 맞지 않으니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 다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콰과광……!!

갑작스레 들려온 굉음과 함께 땅을 울리는 진동이 성 내부까지 전해진 것이다. 순간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썩이더니 궁의 천장을 뚫고 나가 디오니스의 모든 땅과 하늘을 감쌌고 동시에 아를과 다한, 후벤이 모두 검을 든 채로 르베나와 제노스 왕의 주위를 둘러쌌다.

타다다닥. 알현실을 향해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벌컥 열린 문의 틈새로 들어온 기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 공격입니다! 성문 앞에 있는 베이라들의 공격입니다!!”

* * *

르베나가 곧바로 아를과 후벤, 다한을 데리고 디오니스의 국경 입구로 이동했다. 제노스 왕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원했으나 왕이 위험한 곳에 함부로 걸음을 옮길 순 없다며 르베나가 기를 쓰고 만류했다.

“한 번만 더 마법을 쓰거나 거기서 조금 더 다가온다면 두고 보지 않겠다.”

수백의 '다니아'들이 제 검을 들고 국경의 초입을 지키고 섰다. 동시에 수백의 아벨디온이 매서운 검기를 뿜어내며 '다니아'들의 앞에 선 채 국경의 입구를 빠짐없이 메꿨다. 보토니에가 디오니스를 모두 삼키려 했음에도 무력하게 하늘만 봐야 했던 과거를 청산하고자 왕국의 기사들이 된 그들은 무례한 베이라들을 단 한 명도 통과시키지 않겠다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라들 역시 색색으로 물든 아벨디온의 검기를 보고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화악-- 순간 그들의 사이로 검붉은 마력이 순식간에 솟아오르더니 곧 그곳에서 아를과 다한 그리고 짙은 녹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은 르베나가 나타났다.

르베나가 나타나자 베이라들은 잠시 본 그녀의 마력과 텔레포트에 기가 죽은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고 아벨디온과 '다니아'들의 기세는 반대로 살아났다.

“아벨기사단 대기한다.”

“디온기사단 대기.”

“'다니아' 전원 발검 상태로 대기한다.”

각각 아를과 다한, 후벤이 자신의 기사단에 명을 전달함과 동시에 수백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들은 명을 따랐다. 그 절도 있는 모습에 베이라들은 한 층 더 긴장된 얼굴을 굳혀 보였다.

그중 제일 앞에 선 사람이 르베나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왕녀님, 저는 이들을 대표하는 맥스라 합니다. 저희 모두 곧 다가올 보토니에와의 전쟁에 모국인 디오니스를 돕고 싶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저희를 막아서 홧김에 그만… 하지만 하늘로 쏘아 올린 거지 결코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삼십 대 정도의 외모에 꽤 건장해 보이는 사내는 구릿빛 피부에 어두운 적갈색 머리칼을 지녔다. 얼굴에 상처가 많은 걸로 보아 꽤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산 듯도 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맥스란 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뒤로 선 수백의 베이라들을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첫째, 디오니스 내에서 마력 사용은 금지다.”

갑작스러운 르베나의 말에 베이라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둘째, 그대들은 아벨디온에 소속될 것이니 아한 단장과 다한 단장의 말에 충성해야 한다.

셋째, 그대들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다수로부터 감시받을 것이다.”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모두가 두리번거리다가는 곧 그 뜻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디오니스의 기사들은 모두 얼굴을 어둡게 물들였고 베이라들은 신난 듯 기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르베나가 마지막으로 눈을 매섭게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검사에 통과된 이들만 디오니스의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아한.”

르베나의 말과 동시에 아한이 국경을 막는 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연락을 취해둔 덕에 알맞게 도착한 아한을 보며 르베나가 물었다.

“하루에 몇 명이나 가능해? 네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르베나의 말에 베이라들을 쭉 둘러본 아한이 말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략 50명 정도? 허투루 할 수 없으니까.”

아한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이라들을 보며 말했다.

“보토니에의 잔당들이 숨어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아한에게 검사가 통과된 사람만 디오니스로 들어올 수 있으니 모두 검사를 받도록.”

르베나의 말을 듣고 그 옆에 선 소년을 바라본 베이라들이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맥스의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나섰다. 새하얀 피부와 갈색 눈의 조화가 꽤 인상적인 외모의 사내였다.

“자국을 위해 싸우러 몇십 년 만에 용기를 낸 저희들에게 꼭 이런 수모를 주셔야 합니까? 베이라로써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왕녀님이라면 저희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알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한데 어찌 저런 아이에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의 장검이 그의 목울대에 차갑고 싸늘하게 닿았다.

“입조심 해라. 감히 네 놈의 입에 올릴 왕녀님의 이야기가 아니니.”

매서운 금안이 곧이라도 저를 벨 듯 향하자 그가 조심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둘 사이를 감도는 싸한 긴장을 끊어 놓는 말이 르베나에게서 나왔다.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을 안 해 봤나? 신마 전쟁에서 패한 후 설 자리를 잃었다는 핑계로 떠난 너희의 고국은 모두의 손에 엉망이 되어갔다. 그때 너희는 어디 있었나?

불과 몇 년 전 보토니에가 너희의 고국을 짓밟으려 발악한 하루 동안 너희는 어디에서 뭘 했나?”

르베나의 싸늘한 눈이 수백의 베이라들에게로 향했다.

“그런 주제에 감히 고국을 들먹이며 면책받으려 하지 마라. 너희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서서히 망해 가는 고국을 버린 겁쟁이들일 뿐이니. 그럼에도 너희를 받아 주겠다는 내 말을 따르지 못한다면 돌아가라.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다.”

르베나의 말은 높은 어조가 아니었다. 결코 흥분이나 분노가 배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베이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배어 있었다. 경멸. 모두의 패배였음에도 왕국과 힘없는 일반인들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숨어 버린 힘 있는 자들에 대한 경멸. 그 뚜렷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 낸 베이라들은 더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휙. 뒤로 돌아선 르베나가 아한에게 말했다.

“칸 님께 이들이 검사받을 동안 지낼 야영지를 부탁할게. 그리고 아한 네가 편하게 검사할 장소도. 그리고 아를 단장, 다한 단장.”

르베나의 부름에 그들의 눈이 곧바로 그녀를 향했다.

“룬을 비롯한 아벨디온을 데리고 아한의 곁을 지켜라.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는 자는 망설임 없이 베어 버려라.”

르베나의 선연한 말은 곧바로 후벤에게까지 이어졌다.

“후벤 경, '다니아'를 국경의 안쪽에 빠짐없이 배치하도록. 국경 밖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부터 '다니아'는 이유 불문 국경을 걸어 잠그고 사수한다.”

르베나의 말에 베이라들이 모인 곳에서는 이제 눈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스스로가 환영받는 영웅이 아닌 하급 용병들의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해가 어느덧 붉은 잔상을 빛내며 지고 있었다.

* * *

넓은 복도에 홀로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조금은 무거웠다. 피곤한 듯 제 눈가를 문지르는 그, 유안이 곧 제 앞에 나타난 큰 문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신력을 흘려 넣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열리는 문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유안이 한숨 섞인 소리를 내었다.

“폐하, 아무리 제가 여기서 살펴보시라 했다해도 어떻게 하루를 꼬박 이곳에 계십니……!”

여느 때처럼 잔소리를 하며 걸음을 옮기던 유안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그의 전신에서 찌릿할 정도의 신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방금까지 투덜대던 목소리가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날카롭게 벼린 유안의 목소리가 공간을 꿰뚫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 그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역대 유파시드들의 일기.

“…루드바하 님.”

다시 한번 유안의 목소리가 울리자 빛을 잃은 그, 루드바하의 시선이 가만히 유안에게로 향했다. 이를 본 유안의 시선이 한번 잘게 떨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일단 일어나십시오. 유파시드께서 그렇게 앉아 계시다니요.”

다행히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유안이 원래 자신의 느긋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루드바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걸음은 루드바하에게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나 이제 어떡하지, 유안… 어떡해.”

갑자기 들려온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너무 괴로워서. 한 사람이 뱉어낼 수 있는 괴로움과 고통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신음을 낸 사람이 바로. 언제나 흔들림 없던 그들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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