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제4장. 르베이나 (23)
폭신한 러그가 넓게 깔린 방 안. 티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르베나의 눈이 생각에 잠긴 듯 고요했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어느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왕녀님, 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어요.”
시녀 루의 말에 르베나가 조용히 답했다.
“안으로 모시고 주위를 물리도록 해.”
“네, 왕녀님.”
르베나의 말에 즉각적으로 답한 루가 뒤로 돌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내 한 남자가 그녀의 응접실로 발을 들였다.
“왕녀님께서 텔레포트를 모두 막아 놓는 바람에 국경에서 여기까지 말 타고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오자마자 투덜거리듯 말하는 그의 모습이 이 순간조차도 우스워 르베나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그, 레턴이 길게 늘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웃는 게 예뻐! 갑자기 불러서 엄청 긴장하면서 왔단 말이에요!”
레턴의 말에 르베나가 다시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대꾸했다.
“또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나 보지?”
르베나의 말에 잠시 멈칫한 레턴이 화사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와 르베나의 앞에 앉으며 물었다.
“짓이라뇨, 큼.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저도 지금 마를한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느라 바쁜데 말이죠, 후후.”
레턴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가만히 그를 향했다. 세츠임에도 정의가 아닌 일에 힘을 쓰는 마를한의 왕. 일국의 왕녀 따위가 반말을 해도 꼬박꼬박 웃으며 존대를 하는 속 모를 인간.
그리고 한 왕국의 왕임에도 보토니에와 손을 잡았던 세츠.
“너는 왜 왕이라는 자가 보토니에와 손을 잡고 그딴 짓을 했던 거지? 아무리 자칸에 스릴 공주의 납치를 미리 예고해 줬다 해도 그건 범죄다.”
르베나의 말에 잠시 움찔한 레턴이 길고 하얀 검지로 성의 없이 관자놀이를 슥슥 긁더니 말했다.
“음…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우리 그때 적당히 넘어가기로 한 거 아니에요? 왕녀님이 그거 물어볼까 봐 내가 이렇게 꼬박꼬박 반말도 받아 주고 있는 건데.”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이 싸하게 가라앉은 레턴의 얼굴을 본 르베나가 말했다.
“헬리오가 약하지만 광범위한 공격 마법을 썼다. 그것도 신력을 이용해서. 본인도 꽤 놀란 걸 보면 모르고 있다가 본능적으로 나온 거 같아. 하지만 문제는.”
르베나의 말에 어느새 심각한 표정을 한 레턴이 말을 받았다.
“아한조차 판별할 수 없는 힘이 숨겨져 있던 거군요.”
레턴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아이가 훔친 '다니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에… 묘한 신력의 흔적이 남았어. 하지만 신력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한…….아한조차 감별을 하지 못하더군.”
그녀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보며 레턴이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르베나도 예상한 듯 그의 침묵을 기다리며 어느새 방 안에 놓아둔 찻주전자로 따뜻한 차를 내렸다. 둘 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증기를 바라보면 레턴의 입이 열린 것은 르베나가 자신의 찻잔을 반 정도 비워 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일국의 왕으로서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최악인 사람이었다.
부인만 해도 셀 수가 없었고 자식은 알려진 것보다도 더 많았다. 오직 그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왕자와 공주만 열세 명이었으니. 그리고 레턴, 그의 어머니는 시녀로 일하던 중 아버지의 눈에 띄어 자신을 낳은 가엽고 가여운 여인이었다.
원치 않는 혼인이었고, 바라지 않았던 아이였음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레턴을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
“레턴, 욕심내지 말렴. 그저 이 엄마와 이렇게 웃으며 살면 그게 행복이란다.”
언제나 수많은 왕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일 아들이 걱정되었던 어머님의 말에 레턴은 조용히 미소 짓는 착한 아들이었을 뿐이다. 아주 만약 성인이 된 왕자들이 왕위 계승을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전쟁에 제 어머니가 희생되지만 않았다면. 자신을 향하던 독을 대신 마시고 앓던 어머니에게 의원조차 붙여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없었다면. 죽음을 맞이할 그 날까지 레턴은 순한 미소를 짓는 아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일어나 보세요. 제발, 제발…….”
이제 갓 스물이 되었던 레턴은 세상 물정도, 왕궁의 사정에도 밝지 않았다. 그저 어둡고 작은 궁에서 어머니와 둘이 행복해하던 순진하고 착한 아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눈도 채 감지 못한 모습으로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주 만약 그때 그를 방문했던, 조롱했던 그들의 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레턴은 가끔 생각했다.
“뭐야, 자기 자식 죽으라고 넣은 걸 왜 지가 처먹고 난리야.”
수습해 줄 사람조차 오지 않아 며칠을 죽은 채 누워 있던 제 어머니에게 쏟아지던 조롱이 레턴의 안에서 그조차 몰랐던 분노를 피워 냈다. 그리고 어머니의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장례가 끝난 그날. 여전히 제 어머니를 조롱하던 제1왕자에게 레턴의 몸에서 나온 아주 신비로운 빛이 맹렬히 쏘아졌다. 그리고 그 일의 결말은 제1왕자의 죽음이었다.
“나쁘지 않았어요, 그때 그 느낌. 그때는 그게 신력이라는 것도. 내 힘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적어도 내 어머니를 차디찬 궁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죽게 한 이의 마지막으로는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감정의 한 올조차 읽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는 르베나의 방 안을 고요히 적셔나갔다.
“그때부터였어요. 제1왕자가 죽자 남은 왕자들은 더 맹렬히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고,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자 왕궁에 저주가 들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죠. 이에 공주의 엄마들까지 세력 다툼에 끼고 또 죽어 나가고… 마를한의 왕가는 그렇게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레턴은 순간 시린 눈을 한번 빛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이라는 작자는 제 자식들이 서로를 죽일 동안 새로운 여자를 들이며 자식을 늘릴 궁리나 하고 있었죠. 그렇게 몇 안 남은 왕자와 공주들은 가장 힘이 약한 나를 먼저 없애기로 했고. 난… 드디어 깨닫게 된 신력이라는 힘으로 그들 모두를 죽였어요.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내 힘을 알게 된 그… 아버지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알아서 죽더라고요.”
조금은 예상했지만 실제로 들은 그의 이야기는 르베나의 생각보다 더 끔찍했고 아팠다.
아마도 어딘가 르베나의 회귀 전과 비슷한 이야기여서일까. 순간 가라앉은 르베나의 얼굴을 한번 본 레턴이 항상 짓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왕위를 차지하고 나자 궁금하지 뭐예요. 나는 세츠인데 그건 분명한데, 왜 이런 힘을 갖게 된 걸까. 세츠들은 원래 정의로운 일에만 힘을 쓸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 힘이 클 수록 말이죠. 근데 저는 제가 미워하는 모두를 죽이는데 힘을 쓸 수 있어서…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어느새 식은 그의 찻잔을 덜어내고 새로 뜨거운 차를 부어주자 레턴이 르베나를 보고 한번 씨익 웃으며 차로 잠시 제 목을 적셨다.
“그런데 알아보다 보니 보토니에라는 조직 안에 악행을 위해 힘쓰는 세츠들이 있다지 뭐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래도 전… 마를한이 좋았거든요. 우습지만. 그래서 가담은 못 하고 있었는데 우연이 어느 책에 대해 듣게 됐어요.”
레턴의 말에 르베나가 처음으로 궁금한 얼굴을 내보이며 물었다.
“책?”
르베나의 표정을 보고 한번 웃어 보인 레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토니에에 있던 어느 세츠가 그 책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세츠들이 정의 같은 게 아니라 원하는 걸 위해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세츠들을 위한 해방이라나 뭐라나.그 말을 우연히 엿듣고 자드런과 일종의 교환을 약속한 거죠. 당시 자드런은 본인의 기술을 보토니에가 빼먹기만 한다고 불만에 차 있었거든요.”
순간 자칸에서 자드런에게 어느 고서를 빼앗아 달아나던 그가 생각났다. 이에 르베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걸 찾은 건가?”
르베나의 대답에 레턴이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때 그건 그냥 세츠와 베이라의 기원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였어요. 아무도 모르지만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그의 말에 르베나가 조금 더 큰 호기심을 담은 채 되물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런 르베나의 호기심을 눈치챈 레턴이 작은 미소를 담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베이라와 세츠는 신이 사랑한 두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 이 세상으로 보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내용이요.”
레턴의 말에 짙은 호기심을 느꼈지만 르베나는 그의 무거운 과거를 들은 이 상황에 더한 호기심을 비추는 것은 실례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다시 주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럼 계속 그 고서를 찾고 있는 건가?”
르베나의 물음에 잠시 말을 멈춘 레턴이 순간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제가 원하던 책은… 결코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레턴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의문을 담고 그를 향하자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젠의 유파시드만이 볼 수 있는 곳. 그곳에 그 책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건 이젠 르베나 왕녀가 나를 믿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예요.”
예상치 못한 레턴의 뒷말에 르베나의 얼굴이 설핏 굳어 있는 그 순간. 레턴은 찻잔을 가져와 제 입술을 가렸다. 오래도록 묻어 두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꺼낸 후 조금은 슬픔으로 쳐져 있는 제 입꼬리를 누군가에게 보이기는 싫어서.
* * *
레턴이 마를한으로 돌아가고 난 후 한참 동안 르베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한 고서를 바라보았다.
“아, 안 그래도 궁금해하실 것 같아 가져 왔는데 한번 보세요. 보신 후에는 꼭 반납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비싸게 팔 거라서 말이죠. 젠에다가.”
레턴이 떠나기 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꺼내 놓고 간 고서. 진짜 세츠와 베이라의 기원이 적혀 있다는 책은 아주 오래된 고서답게 헤진 느낌이 물씬 났다.
“이게 진짜일까?”
조금은 미심쩍은 생각에 르베나가 생각 없이 제 손을 작은 고서 위에 올렸다가는 순간 멈칫했다.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고서 안에 흐르는 엄청난 양의 신력과 마력이 순도 높은 힘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먼 고대에는 저자가 자신의 책에 제 힘을 각인시켜 놓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신력과 마력이 함께 깃들어 있다라……!”
순간 르베나는 의심 많은 레턴이 왜 이 책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지, 또 어째서 젠에 비싼 가격에 팔 거라고 다짐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르베나가 나름의 검증을 거친 후 조금은 성의 없는 손길로 책의 중간 부분을 펼쳤다. 그곳에는 오래된 고대어로 써진 수많은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건성으로 읽어 가던 페이지 속 유독 한 부분이 르베나의 시선을 길게 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었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견제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신은 매우 슬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둘 중 하나가 다른 존재의 ‘절제’를 없애는 신의 전능을 훔쳐 쓰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다른 존재 역시 상대방에게 ‘연민’의 감정을 없애는 신의 전능을 훔쳐 쓰게 되었다.
이토록 둘의 미움이 극에 달해 서로를 해할 지경에 이르자, 신은 매우 슬퍼하며 이들을 위한 새로운 세계를 지어 주고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들끼리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던 마지막 배려였다.]
“‘절제’를 없앤다… 베이라. ‘연민’이란 감정이 사라지다… 세츠인가?”
성의 없이 읽어 내리던 중 눈에 띄는 문장을 발견한 르베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문장은 그 뒤로도 조금 더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토록 사랑했던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공허함만이 남게 되었다.
그 감정은 서로에 대한 극한의 미움과 분노를 낳았다. 그렇게 그들은 구멍 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들을 닮은 존재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만들어 낸 존재들은 그들의 마음까지도 빼어 닮아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였으며, 곧 신이 준 사랑과 배려의 공간은 다툼과 전쟁의 공간이 되어갔다.]
조금은 놀라운 세츠와 베이라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어나간 르베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루인 듯했다.
“르베나 왕녀님, 지금 제노스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루의 말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깬 르베나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르베나의 물음에 순간 침묵을 지키던 루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베이라들이… 수많은 베이라들이 지금… 디오니스의 국경에 와 있다고 해요.”
쿵.
루의 말을 듣는 순간 르베나의 심장이 왜인지 깊은 어딘가로 떨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