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제4장. 르베이나 (22)
“르베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때때로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단다. 그래서 고민했다. 디오니스의 왕으로서 계속 ‘다니아’의 존재를 숨겨야 할지 아니면 선대들과는 다른 결정을 해야 할지 말이다. 그리고 내 결정은…….”
제노스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제 앞에 자리한 손녀를 향했다.
“바로 너다, 르베나.”
분명 쉽지 않았을 결심과 함께 제노스가 전한 그것, ‘다니아’를 본 르베나의 눈이 떨려 왔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것을 거절하거나 겸손으로 물리지 않았다.
“폐하, 모든 걸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약속드릴게요.”
제노스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이 더없이 형형하게 빛났다.
“결코 어느 누구도 ‘다니아’를 사용해 디오니스를 무너뜨릴 순 없게 할게요. 제 모든 걸 걸고 그렇게 할게요.”
절대로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제 입에 담은 약속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는 사람. 그것이 이 나라의 왕녀라는 것이 하염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이 제 하나뿐인 손녀라 제노스는 마음 한구석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마음 같아선 너의 모든 것을 걸지 말아라. 너부터 챙기거라. 네가 제일 소중하다. 그리 말하고 싶구나.”
차분히 가라앉은 왕의 눈은 진심을 뱉어냈다. 하지만 이내 그 녹안은 따뜻하고 진한 어떤 것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말하지 않으마. 그것이 적을 베어내는 너의 검에 망설임이란 무게를 더하고. 디오니스의 적을 향하는 네 마력에 주저함으로 더해져선 안 되니. 또한 애초에 디오니스의 왕녀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니 말이다.”
더 이상 제노스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르베나의 얼굴엔 여느 때와는 다른 느긋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래서 르베나의 얼굴을 본 제노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언제나 네 뒤엔 내가 있음을 잊지 말 거라. 나 또한 내 모든 것을 걸고 이 디오니스를 지켜내고 있음 또한 잊지 말 거라. 내 손녀, 우리 왕녀, 르베나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에 이제 곧 다가올 전쟁에 대한 각오와 함께 핏줄의 진한 애정과 신뢰가 깊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근데… 제노스 전하께서 주신 건 고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금테를 두른 달걀 모양의 보석, 디오니스의 누구나가 알고 있는 국보를 바라보며 다한 경이 물었다. 이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하지만 그 고서에 쓰인 고어를 잘 해석해 보면 결국 ‘다니아’의 힘은 ‘금빛 광영에 둘러싸인 생명의 시작’에 있다고 적혀 있지.”
르베나의 말에 가만히 눈앞의 국보를 바라보던 아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이걸 가리킨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사실상 디오니스의 고어는 전부 없어지지 않았어? 신마 전쟁 이후 처분한 디오니스의 자료에 베이라들의 고어도 포함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누나는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거야?”
단순히 ‘다니아’의 존재보다는 학문적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아한을 보고 설핏 웃은 르베나가 말했다.
“디오니스는 그럼에도 디오니스라.”
“응?”
되묻는 아한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오래된 추억에 잠기듯 말했다.
“폐하께서… 아무도 몰래 디오니스의 오래된 고서며 고어가 담긴 자료들을 간직하고 계셨어. 아무리 신마 전쟁에서 디오니스가 패했다고 해도 디오니스의 근간을 없앨 수는 없다고.”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모인 모두의 얼굴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겨 들었다.
베이라들의 성지로 수백 년을 군림했던 왕국의 몰락. 더불어 주변국들의 눈치를 보며 나라의 근간을 없애야 했던 왕. 그럼에도 왕으로서 자국의 역사를 홀로 간직해야 했던 제노스 왕의 마음이 그들에게도 닿은 것이리라.
르베나 또한 이번 생에선 제노스가 ‘다니아’와 함께 전해 준 서적들로 그 존재를 알았지만 이전 생엔 달랐다. 제노스가 죽고 나서 처음 들어가 본 그의 방에서 그것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이란. 꽤 오랫동안 르베나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었던 것이다.
모든 것에 무관심했고 그래서 모든 걸 놓아 버린 채 죽어 갔다고 생각했던 그의 할아버지이자 디오니스의 왕인 그의 침실. 그곳엔 몇 겹의 마력으로 걸어 놓은 실드를 해제해야만 열 수 있는 방이 있었고, 그 방 안에는 전부 태웠다고 알려진 디오니스의 오랜 고서와 국보, 그리고 르베나의 어린 시절 그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이걸로 뭘 할 거지.”
순간 들려온 아를의 목소리에 오랜 기억에서 깨어난 르베나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다한 경과 아를, 아한과 후벤. 그리고 조금 긴장된 듯한 얼굴의 사나.
이 자리에 없는 가스트까지 모두 그녀의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이들. 르베나가 곧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누군가의 눈은 짙은 호승심으로 빛났고 누군가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으며 어느 다정한 갈색 눈은 슬픔과 주저함으로 빛나는 이야기. 그들만의 작전이었다.
* * *
그때를 떠올린 사나의 슬픈 눈이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다니아’가 있었던 자리와 밝은 빛을 뿜어낸 후 지쳐 허덕이는 헬리오를 향했다.
결코 바라지 않았다, 이런 건.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헬리오는 이번에도 사나를 배신했다. 그 아픔이 너무 선명해서 갈기갈기 찢겨 버린 마음이 너무 아파서. 사나는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 알 수가 없네.”
어느새 일어나 ‘다니아’가 있던 자리로 다가간 아한이 눈을 감고 힘을 집중하다가는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곧이어 자신을 바라보는 르베나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헬리오의 힘은 신력이 맞는데 ‘다니아’를 옮긴 힘은 여전히 이상해.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달까. 근데 확실한 건 예전부터 헬리오에게서 받았던 불쾌한 감각과 굉장히 비슷하단 거야.”
아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헬리오에게 향했다. 그러자 힘들어하면서도 놀란 듯한 헬리오의 눈이 불안으로 떨려왔다.
“저, 저 아니에요. 전 이런 힘 같은 거 없어요. 전, 전 몰라요!”
얼핏 두려워까지 하는 헬리오를 보며 르베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헬리오는 ‘다니아’가 사라진 자리와 갑작스레 힘이 폭사한 제 손을 번갈아 보며 이내 울기 시작했다.
“무, 무서워요… 이런 거 무서워요. 흑흑… 전 진짜 아니에요. 흑… 믿어 주세요……. 사나 님… 후벤 님… 제발…….”
헬리오의 울음소리가 어느새 가라앉은 회의장의 공기를 채우다가는 이내 뚝 끊겨 버렸다.
“맙소사, 헬리오!!”
어느새 울다 기절해 버린 헬리오를 본 사나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그 발길은 누군가로 인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당신!”
사나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자신의 길을 막은 이, 후벤을 바라보자 후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이상 헬리오에게 간섭하지 말아요, 사나.”
후벤의 말에 사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직 아이잖아요! 게다가 정신을 잃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매몰차게……!”
“당신의 눈에 이제 르베나 님은 안 보이는 겁니까.”
하지만 이내 들려온 후벤의 말에 사나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리고 이내 돌려진 사나의 눈에 가만히 저를 향하는 어느 적안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사랑스럽고 소중했던 르베나, 그녀의 눈.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나는 제게 향하는 르베나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눈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만히 들여다봤는지, 그 눈이 무얼 얘기하고 있는지 고민해 본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든 신경과 마음이 헬리오에게 가 있었기 때문에.
“…아.”
순간 스스로 깨달은 것에 대한 충격으로 떨리는 사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조용히 시선을 돌리며 다한 경에게 명했다.
“다한 경, 헬리오를 손님방에 감금하도록. 이 시간 이후 나와 그대, 그리고 아를을 제외한 누구의 면회도 금지시킨다.”
르베나는 잠시 충격으로 굳어진 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를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아를, 다한 경이 헬리오를 감금하고 나면 아한과 따로 모이도록 하자.”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베나가 후벤과 사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후 헬리오와 관련된 모든 회의에서 후벤과 사나를 제외한다. 이의 있나?”
딱딱하게 바뀐 르베나의 말에 사나의 몸이 충격으로 한 번 더 떨려왔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후벤이 사나를 제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의 없습니다, 왕녀님.”
후벤의 품에 안겨 시선을 떠는 사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본 르베나의 등이 이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순간이었다.
* * *
“유안,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정말 이 안에 있는 건 모두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읽은 것이라 그렇게 말했는데.”
항의하듯 말하는 루드바하를 보며 유안이 제 외알 안경을 치켜들며 말했다.
“루드바하 님,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 또 젠은 제쳐두고 디오니스로 가시겠죠. 하… 그러니 확실히 이길 방법이라도 강구한 뒤에 가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모든 유파시드들의 기록, 그것에 답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건 루드바하 님이시니 꼭 그 해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탕, 유안의 말을 마지막으로 여러 겹의 실드로 둘러싸인 문은 결국 닫히고야 말았다. 물론 루드바하는 언제든 여길 나갈 수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자신이 디오니스로 갈 거라는 유안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한동안 이곳에 갇혀 있기로 했다.
수백 년의 기록. 역대 유파시드들의 일상과 전쟁 등의 기록이 가득한 이곳 서고에는 수천 권에 달하는 자료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유파시드가 된 그는 다른 세력이 그를 조정하지 못하게 루시드와 가문이 그를 지켜내는 동안 이곳의 모든 서적을 읽고 기억했다. 아버지 루시드와 그의 가문은 혹시나 어린 유파시드를 노리는 세력이 있을까 정치적인 일들을 대신 처리하면서도 루드바하가 자리를 잃지 않게 그를 보호했고 훌륭한 세츠가 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그를 교육했다.
“하투라스, 어비스, 로핀두라.”
그의 긴 손가락이 책장에 새겨진 역대 유파시드의 이름을 가볍게 지나쳤고 성의 없는 루드바하의 목소리는 그들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 그에게 어떤 유파시드가 되고 싶은지 그 길을 제시하고 수없이 다양한 미래를 꿈꾸고 기대하게 만들었던 역대 유파시드들. 그리고 그들의 기록. 그때의 설렘과 두근거림이 생각나 루드바하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툭.
그때 그의 손가락이 어느 유파시드의 이름 앞에 멈추었다.
“…파벤더.”
그의 입술이 작은 중얼거림을 담은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자연스레 방금 호명한 유파시드의 기록 중 하나를 꺼내었다. 유일하게 제 명이 다하기 전 죽음을 맞이했던 유파시드. 그리고 역대 가장 훌륭한 유파시드로 거론되는 이, 파벤더.
루드바하의 벽안이 그가 남긴 마지막 일기를 따라갔다.
[그들은 오래된 고대의 흑마법까지 사용했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며 유린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내 생명력의 신력까지 다하여 이들을 대륙에서 몰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로 제 명이 다하기 전 죽는 유파시드란 오명을 얻을지언정 나는 결코 이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
그의 마지막 일기, 그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루드바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잉--- 그때 그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짙게 잠겨 있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밝아지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르베나.”
그의 입술이 언제나 그리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건지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파벤더의 일기가 땅으로 떨어졌고 순간 그에게서 나오던 신력의 자락이 일기의 끝에 닿아 버렸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루드바하의 시선도 떨어진 일기장과 함께 멈춰 버렸다.
지잉---지이잉--- 르베나가 보내오는 통신구의 진동이 넓고 밝은 서고의 공기를 크게 울리고 있었지만, 루드바하는 예상치 못한 것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더 이상 반지에 시선을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