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01화 (201/276)

201화

제4장. 르베이나 (21)

큰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는 르베나의 눈에 디오니스의 궁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짐마차와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루아나 꽃이 그려진 상회의 표식을 큼직하게 박아 넣은 아네벨 상회의 마차 행렬에 디오니스의 백성들이 모여 환호하고 있었다.

“준비가 잘 되고 있나 보구나.”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르베나가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덕분입니다, 폐하.”

르베나의 작은 미소를 가만히 마주보다가는 함께 웃어 버리는 디오니스의 왕, 제노스가 손녀의 방으로 들어서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로로 음각이 들어간 크림 베이지의 깔끔한 벽지, 붉은색의 폭신한 러그와 화이트톤으로 맞춘 가구. 원색으로 곳곳에 포인트를 준 르베나의 방.

“여전히 깔끔하구나.”

손녀의 방을 돌아본 할아버지의 감상은 간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노스 눈에 비친 손녀의 방은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욕심을 내 좀 더 멋지고 비싼 가구들로 방을 가득 채워 주고 싶었고 여느 왕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아주 크고 좋은 궁을 하나 더 지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제노스의 눈이 뜻하는 바를 익히 아는 르베나는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아네벨 상회의 모든 물자가 디오니스로 들어올 거예요. 디오니스 시내에 있던 상회의 사람들도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될 거고요.”

르베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노스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제 손녀를 보다가는 저도 모르게 르베나의 머리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에 따라 어쩌면 지금과는 달라질지도 모를 미지의 운명 앞.

그는 어린 손녀를 그저 한번 쓰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색해 르베나의 머리카락에 채 닿지도 못한 제노스의 손이 갈 길을 잃고 내려오려는 찰나 따뜻한 온기가 닿아왔다. 제노스의 놀란 눈이 온기의 주인, 르베나를 향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향하다가는 조심스레 다시 내리는 제노스의 손. 그 주름진 손을 꼬옥 붙잡은 르베나가 말했다.

“궁을 지켜 주세요, 폐하. 디오니스는 제가 반드시 지킬게요.”

지난번 전투 이후 건강이 많이 약해진 저를 걱정하는 손녀의 마음. 제노스가 곧 제 눈엔 여전히 어리고 작게만 보이는 르베나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디오니스뿐만 아니라 너도 지키거라, 르베나. 네가 없는 디오니스는 이제…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르베나가 이번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는 것과는 달리 하나남은 혈육의 정은 하염없는 걱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런 제노스의 마음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디오니스도. 할아버지의 앞에 온전히 가져다 놓을게요.”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가 언뜻 눈물이 고여버린 눈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눈가를 훔치며 다시 크론이 서 있는 방문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곧 문 앞에 선 제노스가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눈으로 르베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르베나, 그것이 없어졌단다.”

순간 제노스의 말에 흠칫한 르베나가 곧 놀라움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제 눈을 꼬옥 감았다 떴다. 그사이 제노스는 이미 크론과 함께 모습을 감춘 후였다. 대신 다른 이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르베나처럼 얼굴을 차갑게 굳힌 그, 아를이었다.

“사나와 후벤을 부를게.”

바로 뒤돌아선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급히 그를 만류하며 소리쳤다.

“아를……!”

하지만 아를은 르베나가 말을 이어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진실이 뭔지 보여 줘야지. 그게 그들을 위한 거야.”

자신의 말에 순간 멈칫하는 르베나를 본 아를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 덩달아 르베나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후.”

깊게 한숨을 내쉰 르베나의 눈이 궁 밖 후벤과 사나의 후작저가 있는 방향을 향해 어둡게 가라앉았다.

“헬리오가 온 이후로 두 분 사이가 계속 안 좋아 걱정이네.”

제노스 왕의 방문에 차를 준비해 내오던 시녀 루가 화난 얼굴로 르베나의 궁을 벗어나는 아를과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갈 곳을 잃은 따듯한 차는 곧 제 주인을 잃은 채 서서히 식어 갔다.

* * *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거친 아이의 발버둥이 저를 안고 걸어가는 이의 허벅지와 배를 마구 찼지만 그, 아를의 단단한 몸은 조금의 타격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의 발만 아플 뿐.

헬리오가 아를을 걷어차던 발에 통증을 느낄 찰나. 눈앞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큰 회의장이 드러났다. 그리고 맨 앞에 홀로 놓인 의자에 아이, 헬리오를 내려놓은 아를이 건너편에 있는 회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싸늘한 표정의 아한. 잔뜩 놀라 헬리오를 걱정하는 사나와 침통한 표정의 후벤, 무표정한 다한과 르베나가 직사각형 테이블의 양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헬리오가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검붉은 마력의 줄이 헬리오의 몸을 너무 세지 않게 구속한 것도 그때였다.

“윽……!”

마력의 힘에 의해 부드럽게 다시 의자에 앉혀진 헬리오의 눈에 순간 두려움이 가득 차며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쯤이면 언제나 자신을 부르며 달려와 하염없는 걱정을 하던 사람,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감싸주던 사람, 사나를.

하지만 사나를 발견한 헬리오의 눈은 이내 놀람과 깨달음, 단념으로 번져갔다. 그녀조차 자신을 더 이상 구해 주지 못함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버린 것이다.

“네가 왜 이곳에 잡혀 왔는지 아나?”

르베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제게 닿자 헬리오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나와 차마 헬리오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후벤을 한 번씩 보고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르베나 왕녀님.”

헬리오의 뻔뻔한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잠시 기울여 아이를 바라보다가는 문밖을 향해 말했다.

“가지고 들어오지.”

르베나의 말에 닫혔던 회의장의 문이 다시 열리며 아를 휘하의 아벨디온 기사 룬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들어서는 그의 표정이 상당히 굳어져 있는 걸로 보아 심상치 않은 물건인 듯했다. 타악. 그가 테이블 위로 무엇인가를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말했다.

“헬리오의 방에서 이것을 찾았습니다. 하… '다니아'입니다.”

그리고 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다니아'.

지금은 디오니스 기사단의 이름이 된 디오니스 전설 속 무기. 제노스 왕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 빛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띠며 금테를 두른 달걀만 한 보석으로 수많은 전설이 깃든 디오니스 왕국의 국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회의장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것이다. 본궁의 가장 깊은 곳, 디오니스의 결계를 유지하는 가장 큰 마석이 자리 잡은 방. 그 안에 겹겹의 실드를 두른 채 놓여 있던 '다니아'가 왜 이곳에 있는지. 선뜻 믿을 수 없다는 듯 '다니아'를 보던 사나의 눈이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없나, 헬리오?”

무감각한 시선으로 '다니아'를 본 르베나의 질문에 헬리오가 힘껏 소리쳤다.

“없어요!! 전 저거 훔친 적 없어요!! 저게 왜 제 방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헬리오의 큰 소리에 사나와 후벤이 충격을 받은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마주한 헬리오가 순간 이를 앙다물며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흔들리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이걸 어떻게, 왜 훔쳤지.”

르베나의 물음에 헬리오의 눈이 충격으로 떨리는 사나를 잠시 향했다가는 조금은 진정된 어투로 다시 결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정말 안 훔쳤어요. 진짜라고요! 사나 님, 후벤 님! 저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고요!!”

헬리오의 말에 사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헬리오 저게 뭔 줄 아니? '다니아'라는 거야. 저거 때문에 지금 모든 나라들이… 전쟁을 준비 중이란다. 근데 저걸… 저걸 훔치면 그건 정말…….”

사나의 말에 헬리오가 온몸을 버둥거리며 다시 한번 외쳤다.

“진짜에요, 사나 님!! 이번에는 진짜로 제가 안 훔쳤어요!! 진짜라고요, 믿어 주세요!!”

헬리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지만 이곳에 아이를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헬리오는 언제나 제가 훔친 것을 누군가 목격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핑계만 대왔기 때문이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모두를 둘러본 헬리오의 얼굴도 조금 다르게 변해갔다. 싸늘한 눈초리. 언제나 따뜻했던 사나와 후벤조차 고개를 돌려 버린 상황. 이제 자신을 믿어 줄 사람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헬리오의 얼굴이 순간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증, 증거도 없잖아요! 제가 훔쳤다는 증거도……!”

헬리오가 증거에 대해 얘기하자 르베나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헬리오. 난 네가 자잘한 것들을 훔쳤을 때 단 한 번도 널 질책하는 마음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결국 뚜렷한 증거를 내놓으면 이어진 말도 안되는 이유들도, 어쩌면 네 나이 대에 가질 수도 있는 치기 같은 것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베나가 조금 더 어두워진 시선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내 방에서 물건을 훔친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넌 일국의 왕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곳, 그것도 침실에 숨어들어 몇 겹의 마법 실드가 쳐진 국보를 훔친 거다. 게다가 이건 겉으로는 그냥 국보지만 사실 전설로, 구전으로 이어져 온 '다니아'라는 무기고. 이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겠나?”

르베나의 말을 모두 들은 헬리오가 사뭇 간절한 눈으로 사나를 보았지만 사나는 선뜻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자 헬리오가 다시 한번 르베나와 아를을 비롯한 사람들을 한 번씩 노려보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증거를 대세요, 왕녀님. 어느 뒷골목에서도 증거 없이는 함부로 누구를 소매치기로 몰지 않아요.”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낮고 차분한 아이의 음성이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헬리오의 눈이 점점 밝은색을 잃기 시작했고 가느다란 신음이 퍼져 나왔다.

“윽.. 왜...이러지”

헬리오가 제 머리께를 붙잡고 신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헬리오의 손에서 환한 빛의 파장이 퍼져나오더니 온 회의실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동시에 나직한 음성과 함께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주변의 모든 이들을 보호하듯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헬리오의 손에서 뻗어 나오던 빛의 줄기가 사라지고 르베나의 마력도 서서히 그 빛을 줄여갈 때였다.

“모두 괜찮아요?”

놀란 아한의 눈이 회의장의 모두를 훑었다. 그리고 모두가 무사함을 확인한 안도의 빛이 맑은 녹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헬리오의 힘이 모두가 놀라긴 했지만 르베나의 마력 덕분에 다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괜찮은 것 같군.”

덩달아 들려오는 아를의 말에 아한의 얼굴에 서린 긴장이 모두 풀어졌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뒤이어 들려온 아를의 뒷말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다니아’는 안 괜찮은 것 같아.”

모두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던 그것, 디오니스의 국보이자 숨겨진 무기인 '다니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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