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제4장. 르베이나 (20)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칸이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말에, 칸은 제 정체를 이미 아는 제노스의 말에 놀란 것이었다.
곧 한 번 옅게 웃은 제노스가 무엇인가를 칸의 앞에 놓았다.
벨모린의 시조였다고 알려진 드래곤 두 마리가 엑스 자 형태로 그려진 회중시계.
초대 왕실에서 하사한 고대의 유물을 가문의 증명으로 삼는 공작가. 보통 고귀한 보석을 가공한 것을 하사받은 다른 공작가와는 달리 벨모린 공작가는 바로 이 회중시계를 하사받았다.
전대 벨모린 공작이 죽고 그 후계가 사라진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던 그것. 그걸 본 칸의 눈이 거센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칸의 말에 제노스가 먼 언젠가를 떠올리듯 말했다.
“루아나 그 아이가 마지막 순간 내게 넘겨준 것이네. 도대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네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 순간 이걸 주더군. 이걸 보고 대강 르베나의 아빠가 누구인지 유추는 할 수 있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네. 무엇보다 아무리 사람을 풀어도 자네를 찾을 수가 없더군. 하지만 이제는 알겠네. 루아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수없이 만져 닳아버린 벨모린 공작가의 회중시계를 보며 제노스의 녹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왔다.
“그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그는 디오니스의 충신, 벨모린가의 마지막 핏줄이에요.”
“가엾은 그를 부디 품어 주세요.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순간 생전 맑고 다정했던 루아나의 목소리가, 그 따뜻한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들린다고 느껴진 건 그만의 착각일까. 디오니스의 왕이 품어야 할 벨모린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 그를 품어야 르베나 또한 고귀한 핏줄의 자손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들린 루아나의 목소리는 그저 그가 만들어낸 허상일까.
툭.
순간 제노스의 눈에서 아주 오래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것은 고작 한 방울이었으나 그 한 방울은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의 오랜 슬픔과 고통이 진득이 베어 있었다.
곧 칸의 떨리는 손이 회중시계로 향했다. 루아나에게 주었던 그들의 징표. 그 또한 힘겹게 눈물을 참으며 낡은 회중시계 위의 붉은 보석을 눌렀다. 루아나의 생전 유명한 화가에게 부탁했던 웃는 그녀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달칵. 오랫동안 쓰지 않은 물건치고는 부드럽게 열린 펜던트. 그리고 그 안을 본 칸의 눈이 순간 놀라움으로 치켜떠지더니 곧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노스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제 자네에게 가족은 루아나뿐만이 아니네. 나와 르베나가 이제 자네의 가족이네. 그러니 그것만 기억하게.”
이내 제노스가 떠났음에도,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함께 있음에도, 칸은 그만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어 버리고 말았다. 작은 펜던트 속엔 기억 속 젊은 날의 루아나와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린 아기였던 르베나의 모습과 디오니스의 왕가의 표식이 그들과 함께 덧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흐흑… 루아나… 루, 아나…….”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루아나를 찾던 그날 칸의 눈물은 아주 오래도록 멈추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2년 전의 일을 잠시 회상한 칸의 얼굴이 천천히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르베나를 향해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벨모린 공작가의 재건이 시작될 거란다. 그러면 르베나… 너는 결정만 하면 된다. 지금처럼 디오니스의 왕녀로 있을지. 벨모린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 어떤 결정이든 제노스 폐하와 나는 너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했으니.”
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의 표정은 여전히 조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어린 시절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가족과의 소속감이 두 개나 생겼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르베나가 가장 기뻐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입가의 끝이 살짝 올라간 르베나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눈동자에 담는 아를을 역시나 제 눈에 새긴 칸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전쟁 준비를 마치면 말해 주거라. 아네벨 상회에서의 물자를 모두 이곳으로 모으고 상회의 사람들과 용병들까지 모두 불러들이려면 적어도 보름은 필요하니.”
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어느새 기쁜 마음을 감추고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바로 시작해 주세요. 제 예감에도 그들과의 만남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진 않거든요.”
말을 끝낸 르베나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조금 전 기쁨을 느끼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미소.
그녀의 조금 어두운 눈이 저 멀리 디오니스의 본궁을 향하고 있었다.
* * *
달칵.
여느 때보다 오래 앓았기 때문일까. 방문을 닫고 제 방으로 들어선 헬리오의 얼굴이 유독 핼쑥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무감각한 얼굴로 조심히 뒤로 돈 헬리오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진 것은 그때였다.
“헬리오.”
헬리오의 침대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그녀, 사나가 보였기 때문에. 순간 사나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제 손에 있는 것을 방문 바로 옆에 있던 세탁함에 던진 헬리오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사나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사나의 기분 좋은 향을 맡은 헬리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헬리오… 많이 아팠니?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따뜻한 사나의 손이 제 얼굴을 어루만진다. 걱정으로 가득한 다정한 갈색 눈이 자꾸만 흐리게 보였다.
“사나 님!!”
저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사나가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새 아이의 몸은 더 말라 있었다. 제 허리께에 오는 헬리오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던 사나가 쓴 목소리로 말했다.
“헬리오, 많이 힘들었지?”
사나의 물음에 헬리오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사나 님이……!! 흑…….”
가만히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던 사나가 아이를 달래 주며 말했다.
“난 괜찮아 헬리오. 대신… 다신 그러지 말자, 응? 그분이니까. 그분이니까 널 용서해 주시고 또 널 만날 수 있게 날 들여보내 주신 거야. 귀족이나 왕족의 물건을 훔치는 건 정말 큰 죄란다. 그러니 헬리오… 나한테 소중한 네가 더 이상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 믿을게. 응?”
사나의 조용조용한 소리에 헬리오가 그녀의 품에서 얼굴을 떼고 사나를 올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말갛고 예쁜 아이의 얼굴을 본 사나의 얼굴에도 어느새 옅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순간 헬리오가 사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답이 어떨지 알기에, 사나가 이 질문을 들으면 얼마나 곤란해할지 알기에. 절대로 입 밖에 꺼낼 수 없다 생각해 온 질문을 오늘은 꼭 묻고 싶었다.
“사나 님, 저 물어볼 게 있어요”
하얀 얼굴에 잔뜩 흐트러진 회색 머리. 눈물에 젖은 레몬색 눈이 맑은 만큼이나 더 아파보이는 아이. 헬리오의 눈을 보며 사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더 착한 아이가 되면… 다시는 누구의 물건도 훔치지 않고 다시는 잘못하는 일도 하지 않는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되면. 저… 저, 사나 님 아이 할 수 있어요?”
아이의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몸은 크지만 적게 먹을게요. 똑똑하지만 조용한 아이가 될게요. 다시는 누구의 물건도 훔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저… 사나 님하고 후벤 님의 아이 하면 안 돼요? 다른 거 없이 그냥 그 집에 있게만… 아주 가끔, 정말 가끔 기분이 내키실 때만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되는데……,”
동그란 물방울이 아이의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똑똑 떨어져 내렸다.
“언젠가 두 분 사이에 또 예쁜아이가 생기면… 다정하고 멋진 오빠나 형이 되어… 되어… 흑……. 아무것도 욕심 내지 않을게요. 그냥 두 분 곁에 있게만 해 주세요. 흐윽…….”
서툴게, 하지만 막힘없이 오래도록 꿈꿔온 얘기를 내뱉는 헬리오의 얼굴이 어느새 눈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제발… 저한테 엄마가 되어 주세요.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이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런 헬리오를 본 순간 슬픔에 말문이 막힌 사나의 눈에 절벽 끝에 다다른 아이의 작은 한 발자국이 보였다. 저 한 발자국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헬리오의 삶이 달라지리라, 사나는 순간 직감했다.
“…헬리오.”
사나의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헬리오가 잠시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곧 씨익 웃으며 사나에게서 선뜻 멀어졌다. 눈물을 흘리던 아이의 뜨거운 얼굴과 몸이 멀어지자 순간 사나의 몸에 낯선 차가움이 들이닥쳤다. 서늘한 거리감이 주는 씁쓸함이 싫었다.
사나의 단 한 마디. 제 이름을 부른 그 한 마디에 아이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사나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장난이에요! 저처럼 큰 아이를 입양하는 귀족이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거든요. 아니, 평민도 없죠! 헤헷, 그냥 오랜만에… 너무 오랜만에 사나 님을 뵈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혹시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울고불고 매달린 조금 전이 무색하게 아이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는 사나는 제 심장을 꽉 조이듯 들이닥치는 통증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큼성큼 아이에게 다가가 꼬옥 헬리오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러자, 헬리오. 네 말대로 하자.”
갑작스러운 사나의 포옹에 당황하던 헬리오가 이어진 사나의 말에 놀라 토끼처럼 눈을 떴다.
“네?? 그게 무슨 말씀……!!”
“그렇게 하자. 이번 ‘보토니에’와의 전쟁이 끝나면… 르베나 님께 허락을 구해보자. 너의 후견인이 그분인 이상 후작님과 나의 생각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거든. 하지만 그래도. 노력할게. 헬리오가 우리의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꼭 약속할게.”
사나의 말을 들은 헬리오의 눈이 알 수 없는 충격으로 떨려왔다. 곧 아이의 손도 발도 몸도 덩달아 떨려왔다.
‘말도 안 돼. 날 입양한다고? 열한 살이나 된 남자아이인 나를?’
귀족들은 입양을 잘 하지도 않았지만 작위나 재산을 물려줄 아이가 없고 가문의 방계에도 마땅한 아이가 없을 경우에는 간혹 입양을 했다. 하지만 반드시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그리고는 제 입맛에 맞게 교육하고 키워 먼 방계의 아들과 혼인을 시켰다.
그렇게 자식의 혼인으로 가문을 유지하면서 지위와 재산이 결코 다른 가문의 이에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고아원에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들이 많은 이유였다. 그런데 디오니스의 후작가에서, 그것도 사나와 후벤이 자신을 입양하겠다니. 곧 못 믿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아이가 예뻐 사나가 말갛게 웃으며 얘기했다.
“진심이란다. 이미 후작님과는 이야기가 끝났어. 그분도 헬리오가 우리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니 헬리오, 조금만 참으렴. 이번 전쟁만 끝나면. 그러면… 우리 집으로 가자.”
사나의 말에 헬리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헬리오가 다시 사나의 품에 풀썩 안겼다.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사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한순간의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었다.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사나와 후벤이 자신을 입양하려 한다는 거. 딱 그거 하나면. 헬리오는 예전이라면 감격해 눈물을 쏟을 얘기들을 다시 되뇌며 제 레몬빛 눈을 빛냈다. 아직도 눈물이 쏟아지는 아이의 얼굴에는 순간 알 수 없는 빛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