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제4장. 르베이나 (19)
르베나와 적당히 담소를 나누며 어느새 마지막 찻잔을 비워 냈을 때 칸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현재 다니아와 아벨디온의 훈련 상황은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니?”
칸의 말에 순간 멈칫한 르베나가 말했다.
“당장 전장에 투입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될 정도예요. 애초에 기본기가 탄탄한 이들만 뽑았으니까요.”
말을 끝낸 르베나의 붉은 눈이 칸을 직시하자 칸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보토니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날이… 곧 다가올 듯하구나.”
어딘가 이날만을 기다려온 듯 칸의 말끝은 오히려 흥분으로 살짝 떨려왔다.
그를 포섭하지 못하자 분풀이처럼 루아나를 죽이고 줄곧 르베나를 노린 놈들.
르베나에게 칸과 루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무너져 울던 제노스 왕에게 차마 미안하단 말조차
전하지 못한 칸의 심장은 오직 이날만을 위해 뛰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르베나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이 지켜주지 못한 딸의 그림자가 된 것이라면 아버지라는 부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다시 루아나의 복수만을 다짐했다.
격한 감정에 감응한 것인지 어느새 마법이 풀려 붉게 변한 칸의 눈이 저를 똑 닮은 르베나를 향했다. 검붉은 눈의 깊은 곳을 어둡게 일렁이는 르베나를.
루아나의 미소를 닮은 제 아이의 얼굴에서 저런 어둠을 몰아내고 싶어서, 사랑스러운 얼굴에 머무는 과거의 아픔과 고통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서, 더 이상 이 아이가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상처받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가 않아서.
칸의 심장은 지금 더없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르베나에게 그들과의 결전이 힘든 일이 될 것임을 알기에 걱정부터 하게 되는 제 모습이 칸은 조금 낯설고도 반가웠다.
하지만 그 순간 칸의 눈이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으로 인해 세차게 흔들렸다.
‘아아… 그렇구나. 그들과의 결전을 이토록 기다린 게 결코 나 하나만은 아니었구나.’
혼자만 느끼던 묘한 흥분이 이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그 때문일까. 칸이 왔다는 소식에 막 온실로 들어서던 아를의 금안이 그 여느 때보다 싸늘하게 빛나며 그의 검에서 미미한 검기를 피워냈다. 마찬가지로 아를과 온실로 들어서던 아한의 녹안은 내내 차분했던 빛이 거짓이었던 듯 어느새 날카로운 예기가 어려있었다.
그리고. 칸의 눈이 제 앞에 앉은 딸, 르베나의 전신을 향했다. 차마 조절하지 못한 감정에 반응해 검붉은 마력들이 르베나의 주위를 잘게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칸의 눈을 꼭 빼어닮은 르베나의 눈이 적을 향한 흥분으로 떨려 왔다.
“다행이네요. 기다림이 더 길어지지 않아서.”
눈을 빛내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전하는 르베나의 말이 모두에게 선명하게 전해진 순간이었다.
* * *
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곧이어 마를한과 자칸, 켄느에 이어 젠에서도 연락이 왔다.
각지에서 ‘보토니에’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디오니스 외곽에도 보토니에 힘의 흔적이 있어요. 사라진 정도를 예측했을 때 오래되지 않았어요.”
아한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들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제 목숨을 담보로 디오니스를 구한 게 고작 2년 전. 다행히 그때는 젠과 켄느 그리고 칸의 지원으로 목숨을 잃은 이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분명 다를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가 ‘다니아’로 알려진 이상 디오니스에 가장 큰 공격이 집중될 겁니다. 각국의 지원군들이 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두운 표정을 한 후벤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고수했다. 각국에서 지원을 보낸다 해도 누구든 자국의 피해 예방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상황. 여기서 지난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공격을 막는 건 결국 디오니스만의 자력으로 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겨우내 안도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네벨 상회의 모두가 그동안 디오니스의 지원을 위해 준비해 왔으니. 용병들의 숫자도 세 배 이상으로 늘렸고 일 년은 너끈히 버틸 만큼의 물자와 식량도 준비되었습니다.”
디오니스가 큰 전쟁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해도 모두가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구석. 그건 바로 전쟁 시 가장 피해를 입을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고 지킬 자원. 그리고 디오니스에는 그것을 지원해줄 가장 강력한 아군, 아네벨 상회가 있었다.
“처음에 아네벨 상회를 거꾸로 하면 르베나 님의 이름이 된다는 랄프의 말을 모두가 믿지 않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칸 님.”
작은 미소를 달고 얘기하는 다한 경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번져갔다.
덩달아 칸의 얼굴에도.
아네벨(ANEVEL) 상회.
그곳의 상단주가 르베나의 친부라는 놀라운 소식은 이제 르베나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잠시, 칸은 지난 시간 동안 한시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디오니스의 전쟁을 대비하는 데 모든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러다 아네벨 상회가 파산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어마어마한 자원을 퍼부어 각지의 고급 용병들을 사 모았고 수많은 물자와 식량을 사들여 보존 마법을 걸었다.
그것도 모자라 수원을 정화하고 식량의 보존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마석이나 신석 또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보토니에’의 패배가 결정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딸과 나라를 위하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감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놀라움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칸의 정체를 르베나에게 들은 제노스 왕이 오랜 고민 끝에 그를 디오니스의 왕궁으로 불러들인 그날. 그 자리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함께 자리했다. 르베나는 그의 자식이므로, 또 루드바하는 그를 통해 생명을 얻고 유파시드가 된 사람으로서.
“…….”
“…….”
“그렇군. 그놈들이 감히… 내 궁에서… 내 집에서 우리 루아나를……!”
칸의 설명이 이어지자 곧 제노스의 마력이 분노로 피어올랐다. 마력이 없는 시종 시녀들의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퍼져나가는 제노스의 마력은 강한 슬픔과 분노로 쉬이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내 주변을 환기하듯 따뜻하게 감싸오는 르베나의 마력을 느끼자 제노스 왕의 마력은 기다렸다는 듯 사그라들었다. 제 분노를 가까스로 제어한 제노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르베나의 마력은 자네에게서 온 건가?”
제노스의 물음에 칸의 따뜻한 시선이 잠시 르베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네. 르베나는 루아나, 그녀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마력의 양이 상당했습니다. 아이의 성별을 가리는 데에만 꽤 긴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으니까요”
칸의 말에 제노스 왕의 녹안이 가만히 그를 향했다. 그는 일국의 왕이었다. 그만큼 함부로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고, 함부로 의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지금 그는 오직 눈을 감는 순간 어린 르베나를 품에 안고 한마디만을 남긴 루아나의 말을 신뢰할 뿐이었다.
“아… 빠의 눈을… 닮았구나, 우리 르… 베나…….”
끝까지 오지 않은 그 사내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말간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잠깐 뜬 르베나의 눈을 마주하던 루아나. 그때 루아나의 눈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버렸을 거라는,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마저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던 루아나를 떠올리며 제노스는 르베나의 아버지가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칸의 마력을 보며. 또 위장 마법을 풀고 르베나와 완전히 같은 얼굴을 한 그의 모습을 보며 제노스의 늙은 손은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떨려왔다. 이를 본 칸의 얼굴도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저를 때리고 욕하셔도 됩니다, 폐하.”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요동치는 제노스의 마력을 보며 칸은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만약 르베나가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의 아이를 가진 채.”
칸은 잠시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는 겨우내 다시 이어갔다.
“그렇게 홀로 죽어 갔다면… 그 자식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저를 보시는 폐하의 심정도. 또 앞으로의 태도도 전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감히… 용서를 입에 담지도 않겠습니다.”
르베나의 이야기를 하며 잠시 살기가 묻어나던 칸의 말에 괜히 움찔한 루드바하가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마셨다. 그들의 모습을 본 르베나는 제가 그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막연히 고개만 갸웃했지만. 곧 칸의 말을 들은 제노스의 녹안이 르베나를 향했다가는 다시 칸을 바라보며 찬찬히 원래의 차분함으로 돌아갔다.
“그러려고 했네. 그게 누구든 루아나가 사랑했던 놈이 나타나면 내 남은 명줄을 모두 걸고서라도 그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우리 루아나가 느꼈을 마지막 순간의 외로움만큼, 아비 없이 커야 했던 르베나의 아픔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려 했네.”
순간 제노스 왕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뻗어 나와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제노스의 말과 함께 그의 기운은 곧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없음 또한 잘 알고 있네.”
순간 칸의 놀란 눈이 제노스를 향했다. 동시에 제노스의 입에서 켜켜이 묵은 오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리라 다짐했는데. 루아나를 혼자 죽게 한, 죽어서까지 외롭게 만든 그놈을 만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리라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는데.
제노스는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칸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그가 밉지조차 않았다.
루아나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사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는 저 표정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보토니에’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분노와 광기로 일렁이는 그의 마력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곧 슬픈 미소를 베어 문 제노스가 말했다.
“르베나를 지키지 못한 건 죽어 버린 루아나 그 아이도, 그 아이를 두고 마법에 당해 버린 자네도 아니니 말일세.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어리석은 자세로 일관했던 나의 잘못인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지. 무엇보다 무력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자네의 그 시간은 얼마나… 얼마나 길고 어두웠겠나.”
제노스의 말에 칸의 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리고는 동시에 차오르는 물기에 칸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베어 문 제노스가 조금은 아련한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또한 벨모린 공작가는 생전 누구보다 디오니스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이네. 나는 루아나의 아비이기 전에 디오니스의 왕으로서 그들의 마지막 핏줄인 자네를 품어야 할 의무 또한 있음을 잊지 않았네.”
이어진 제노스의 말에 이번에는 칸뿐만 아니라 르베나와 루드바하마저도 놀란 듯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