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98화 (198/276)

198화

제4장. 르베이나 (18)

“좀 더 높이!”

몇백 명이 도열한 큰 연무장을 가득 울리는 소리에 기사들이 좀 더 높이 검을 치켜들었다.

삼 백여 명의 기사들이 흰색의 제복을 입고 피처럼 붉은색의 망토를 두른 채 높이 치켜든 검에서는 색색의 검기들이 피어올랐다.

단상 앞에서 큰 장검을 높이 들어 올린 아를이 그들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외쳤다.

“준비!”

아를의 외침과 동시에 수백의 검기가 금방이라도 쏘아 오를 것처럼 팽팽해졌다.

“발도!!”

아를이 제 환한 금색의 검기를 하늘로 쏘아 올리며 말하자 수백의 검기가 모두 동시에 하늘로 치솟으며 맑고 푸른 하늘을 색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큰 연례 행사의 시작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지켜보던 르베나의 옆에 제법 뿌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2년, 아벨디온에 지원한 기사들은 모두 순조롭게 검기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젠에서 만들어오던 무기를 현재 디오니스의 공방에서 기술 전수 받게 된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한 경의 말에 르베나 역시 조금은 뿌듯한 눈으로 연무장을 가득 채운 수백의 아벨디온을 바라보았다. 과거 ‘보토니에’와의 충돌 당시 디오니스를 목숨받쳐 구한 아벨디온의 일화가 알려지자 디오니스 전역의 기사들이 검기 가능성을 테스트받고 아벨디온에 입단하길 소망했다.

첫해 신청자만 천여 명.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단한 삼백여 명의 아벨디온은 신분과 성별의 구분 없이 누구보다 디오니스와 약자들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강한 이들로 구성되었다.

“‘아벨’은 아를 경과 휘하 1대 아벨디온, 그리고 베이라들의 지도로 검기의 숙련도가 월등히 성장하였고 ‘디온’의 경우 저와 1대 아벨디온들이 꾸준히 지도해 검술 실력이 월등히 향상되었습니다. 아벨디온을 이렇게 둘로 나눈 총단장님의 생각이 적중했습니다.”

다한 경의 말이 단순한 사탕발림이 아닌 진심임을 알기에 르베나도 옅은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왼쪽의 대 연무장을 향했다. 후벤이 이끄는 왕궁기사단 역시 결전 당시 보인 큰 저력이 높게 평가되어 수많은 자원자들이 몰려들었고 지금은 ‘다니아’라는 이름의 10개 기사단으로 증축되어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이다. 르베나는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직을 아한과 다한에게 준 후 디오니스 전역의 모든 기사단을 통솔하는 총 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단 한 명의 반대도 없는 전원 찬성의 압도적 결과였다.

왼쪽에서는 검을 든 천여 명의 다니아가, 오른쪽 연무장에선 검기를 연마하는 삼백여 명의 아벨디온이 저마다 굵은 땀을 흘리며 디오니스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붉은 눈은 앞으로 다가올 어떤 폭풍의 핵을 예상하듯 고요했다.

곧 훈련을 어느 정도 지휘한 후 르베나를 발견하고 달려온 후벤이 묵례를 하자 르베나가 고개를 까닥하며 물었다.

“사나는… 괜찮은가?”

르베나의 물음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후벤이 답했다.

“르베나 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많이 자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잘 털어낼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사나를 대신해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깊게 고개 숙인 후벤을 본 르베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후벤. 그리고 이 또한 사나를 질책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함을 알고 있잖아.”

르베나의 말에 후벤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알기에 사나도 저도 더 죄송한 마음인 겁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에게 가장 먼저 당부를 하셨음에도 지키지 못했으니.”

“사나가 아이에게 너무 정을 주지 않게 주시해, 후벤.”

젠에서 사나가 처음 본 헬리오를 데려가던 그때, 자신에게 따로 당부하던 르베나의 말을 후벤은 아직까지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키지 못했다. 후벤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좀 더 가라앉았다.

“저희가 아이를 잃고 누구보다 신경을 썼던 게 르베나 님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후벤의 말에 르베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사나가 갑작스레 아이를 잃을 조짐을 보인 날 르베나는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아이의 생명을 유지시켰다. 궁의가 올 때까지 수많은 마력을 사나와 아이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마저도 흡수하지 못하고 곧 그들을 떠나 버렸다.

아이의 호흡을 마력으로 누구보다 생생히 느꼈던 르베나는 사나를 배려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꽤 큰 충격을 받았고 강제로라도 사나를 쉬게 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그런 르베나이기에, 그런 주군이기에, 후벤도 사나도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녀의 결정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후벤의 얼굴에 스친 여러 감정의 편린을 본 르베나가 잠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다가는 다시 입을 다물며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후벤은 그 순간 저를 향하던 르베나의 검붉은 눈동자를 익히 보았다. 그 안에 어린 짙은 걱정과 염려가 누구를 향하는지 또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이유 모를 찝찝함이 달갑지 않은 오후였다.

“어미를 죽일 셈이니, 헬리오!”

“내 말을 들어, 헬리오! 죽고 싶지 않다면!!”

“엄마, 제발 때리지 마세요. 엄마!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손을 더 조심히 하라 그랬지, 헬리오!!”

“엄마… 흑… 엄마 그만… 이요……. 흑.”

“으, 흑. 제발… 요… 엄마… 흑…….”

르베나의 반지를 훔치다 걸린 헬리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 날부터 앓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신체적 문제가 없다며 큰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 했다.

하지만 아이는 유독 그 여느 때보다 독하고 심하게 앓았다. 벌써 일주일이 다 되도록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어 쉬는 아이를 보며 루가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조심히 헬리오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헬리오, 사나 님이 아시면 마음 아프실 거야. 그러니 얼른 일어나렴.”

사나가 아끼는 아이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이기에 정성스레 헬리오의 이마를 닦아 주며 다정히 소곤거렸다. 그 순간 내내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빌던 헬리오의 눈에서 이윽고 눈물이 떨어지더니 이내 다른 이를 찾기 시작했다.

“사나 님……. 사나… 흑, 흑… 님.”

사나를 찾으며 우는 헬리오의 모습이 안쓰러워 루가 한숨을 내어 쉬며 수건을 거둬들였다. 해열제도 듣지 않을 정도로 높은 열이 계속이라 어느새 떠온 물조차 미지근해진 순간.

루는 계속 사나를 찾는 헬리오를 안쓰러운 눈으로 한 번 더 보고는 말했다.

“휴, 얼음을 더 가득 담아와야겠다. 헬리오 잠시만 기다리렴.”

곧 대야를 들고 루가 방을 나서자 벽난로만 켜진 어두운 방 안, 헬리오의 소리만이 외로이 그곳을 부유했다. 그렇게 연신 떨어지지 않는 열에도 몸이 상하지 않고 고통만 있는 이상한 병증을 앓는 헬리오의 입에서는 계속해 사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흑, 무… 서워… 사나 님… 흑흑…….”

끊임없이 사나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의 어두운 은발은 여기저기 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고 밝은 레몬색 눈은 열에 들떠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부들부들 떠는 오한에 사나를 찾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서글펐다.

“사나… 님, 손… 잡아줘요……. 흐흑. 무서… 워요… 흑…….”

언제나처럼 손을 잡아주며 제 이마를 따뜻한 손으로 걱정스레 짚어 줄 사나가 없다는 것도 모른 채 사나를 찾는 헬리오의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싸아. 순간 기분 좋은 시원함이 몰려오며 아이는 순식간에 고통을 잊은 얼굴로 곧 깊은 수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되었는지 땀에 젖은 채 살며시 미소 짓는 아이의 손에는 어느샌가 다른 사람의 손이 잡혀 있었다.

화악— 그 손의 주인인 누군가의 몸에서 한 차례 더 기분 좋은 힘이 개방되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헬리오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잠에 빠져 있음에도 미소가 배어 나올 만큼 좋은 기분.

사나와 후벤의 아이가 되어 후작저에서 뛰어다니는 자신. 행복하고 따뜻한 꿈속에서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검붉은 마력이 그들 세 사람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헬리오는 밤새 기분 좋은 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의 꿈속은 한동안 잠든 헬리오의 미소를 확인하던 누군가가 방을 나서기 무섭게 다시 변해버렸다.

“으..으..!”

기분좋은 미소가 베어있던 헬리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안..돼!!”

헬리오의 꿈속, 세 사람을 지키던 검붉은 마력은 어느새 기분 나쁜 힘에 잡아먹혀 버렸고, 크고 고풍스러운 후작저는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두려움에 찬 헬리오를 감싸는 사나와 그런 둘의 앞에 서서 검을 치켜든 후벤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순간 제 꿈속에 갇혀 덜덜 떠는 헬리오의 귀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이구나, 네 어미보다 소중한 이가. 헬리오… 크크크. 마지막 경고다. ---를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며 이들이…….’

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사나와 헬리오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후벤이 온몸 가득 피를 흩뿌리며 죽어 버렸고 헬리오를 감싸던 사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검에 꿰뚫려 피를 토해 냈다.

“안 돼!!”

그런 두 사람을 본 헬리오의 처절한 비명이 무너진 후적저를 감싼 순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헬리오의 귓가를 선명하게 두드렸다.

‘키키키키키. 마… 지막, 치칙. 경고, 야… 여자… 와 남자를 지키기 위… 한… 키키키, 마지… 막, 경고…….’

“헉……!”

벌떡. 으스스한 목소리의 경고를 들은 헬리오가 순간 잠에서 깨 벌떡 일이어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뜬 헬리오의 눈은 어느새 밝은 레몬색 곳곳, 검은색 잉크를 떨어트린 듯 지저분해져 있었다.

새벽녘의 동이 터오는 어느 시간이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외궁의 온실. 마주 앉은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만난 아한에게 그동안의 일을 전해 들은 그는 서둘러 르베나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언뜻 담담해 보이는 딸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웠다. 이를 알아본 칸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담긴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건 르베나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르베나 님은 사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썼을 뿐입니다.”

하지만 칸의 말에 뭔가 불만이라도 생긴 듯 붉은 눈에 순간 언짢음이 비쳤다. 그 눈빛에 칸이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너의 잘못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거란다, 르베나. 음.”

디저트와 차를 내오던 시녀를 의식해 말을 높이던 칸은 시녀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말을 놓았다.

어색하게 웃는 미소가 따뜻했다. 르베나 역시 칸의 말투가 변하자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칸이 가져온 쿠키를 입에 담으며 오물거렸다. 분명 사나의 일로 마음이 좋지 않았음에도 저를 찾아온 칸을 보고 마음이 풀어진 것이 어색하고도 좋았으리라.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어진 르베나를 보며 칸의 눈가가 얼핏 어둡게 물든 것은 그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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