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제4장. 르베이나 (17)
“켁!! 케케켁!! 아… 아, 를… 경… 큭!!”
제 손에 잡힌 헬리오의 부름에도 아를은 멱살 쥔 손을 결코 느슨하게 고쳐 쥐지 않았다. 곧 숨에 차 허공에서 발을 구르던 헬리오가 힘겨운지 손을 주먹처럼 말아쥔 순간이었다.
“맙소사… 아를 경! 헬리오!!”
둘의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사나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녀의 여린 손이 단단한 아를의 팔에 닿았다. 하지만 있는 힘껏 헬리오의 멱살을 쥔 아를의 팔을 떼어내려 사나가 소리치며 안간힘을 다했음에도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를 경!! 제발 이것 좀!! 아를 경!!!”
비명 같은 사나의 외침에도 아를의 싸늘한 금안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는 헬리오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를, 그만.”
하지만 단 한 번 들려온 소리에 무엇에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던 아를의 단단한 팔은 거짓말처럼 헬리오를 놓았다.
퍽.
“크흑! 컥컥!! 하아하아.”
거칠게 땅으로 떨어진 헬리오가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싸며 막힌 숨을 몰아쉬자 눈가가 벌게진 사나가 다가가 헬리오를 제 품에 안았다. 사나와 함께 외궁에서 나오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아를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직 아이인데 너무 과격하잖아, 아를!”
아를답지 않은 모습에 르베나가 화가 난 어조로 말하자 아를이 땅에 구르는 무엇인가를 보며 말했다.
“나도 제발 누가 저것 좀 버려 줬으면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누가 그걸 가져가게 둘 순 없잖아. 게다가 이게 한 번도 아니고. 하아.”
조금 짜증 어린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파란 물체를 향했다.
정교한 블루 다이아에 투명하고 작은 수많은 다이아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반지.
바로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주었던 것.
순간 르베나가 어제 저녁의 일 때문에 잠시 놓고 나왔던 반지를 상기해 냈다. 동시에 아를의 말을 듣고 바닥에 구르는 르베나의 반지를 알아 본 사나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디오니스 유일의 후계자, 르베나.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녀가 아끼는 보석을 훔친 죄. 헬리오는 그것만으로도 사형감이었다. 게다가 헬리오가 르베나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아를의 말처럼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는 더 심각했다. 이를 떠올린 사나가 헬리오를 떨리는 손으로 붙잡으며 물었다.
“헤, 헬리오 네가, 네가, 어째서… 또……!”
콜록콜록. 여전히 힘겨운 듯 기침을 뱉던 헬리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제발이요!!!”
울며 엎드려 비는 헬리오를 가만히 바라보며 르베나가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지금 너는 딱히 부족한 거 없이 모두 지원받고 있을 텐데. 게다가 최근에는 사나가 후작가의 내탕금에서 따로 여분의 용돈을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화들짝 놀라며 제 눈을 떨었다. 그러고는 왜인지 뭔가 찔리는 마음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헬리오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사나, 사나 님은 잘못이 없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크, 큰 보석을 팔아 사나 님께 뭔가를 사드리고 싶었어요... 흑.. 그냥 갑자기 너무 그러고 싶었어요. 흑.. 저도..흑..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르베나 왕녀님. 허엉!”
사나에게 무엇인가를 보답하고 싶어 왕녀의 물건, 그것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보석을 훔쳤다는 헬리오의 말에 아를의 조각같은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졌다. 동시에 소란을 듣고 나온 아한 역시 싸늘한 낯을 구기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사나한테 보답을 하고 싶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르베나 누나의 물건을 훔쳤다고? 이건 사형감이야, 헬리오!”
차갑고 날카로운 아한의 말에 헬리오가 겁에 질려 울며 사나의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런 헬리오를 보며 아를이 말했다.
“지난 번 르베나의 검을 훔쳤을 때는 그 검을 들면 강해질 것 같다 했었나? 또 그 전, 르베나의 일반 통신구를 훔쳤을 때는 그냥 한번 써 보고 싶었다 했었지? 그 외에도 다른 르베나의 장신구는 그냥 예뻐서, 칸 님이 보내신 포션은 먹어 보고 싶어서. 정말이지 이유마저 각양각색이군.”
냉기가 흐르는 아를의 말을 듣던 사나가 조심스레 아를에게 말했다.
“그때마다 죗값을 치렀잖아요, 아를 경.”
순간 사나의 말에 아를이 짜증 난다는 듯 되물었다.
“자기 혼자 죄책감에 앓아눕는 게 죗값입니까? 그리고 사나님은 르베나의 시녀장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르베나의 물건을 훔쳐대는 저런 놈을 매번 비호하고 계신 겁니까!!”
아를의 말에 사나가 치부를 찔린 듯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헬리오가 벌떡 일어나며 아를에게 소리쳤다.
“사나 님한테 소리치지 말아요! 사나 님은 아무런 죄도 없다구요! 왜 우리 사나 님한테 뭐라고 해요! 네?”
헬리오의 외침에 아를이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나가 조심스레 르베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르베나 님. 제발 저를 봐서라도 헬리오를… 이 아이를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단단히 혼을 낼게요, 네? 제발 온정을 베풀어 주세요…….”
“사나.”
하지만 사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딱딱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나가 곧 얼굴을 들어 그, 후벤을 바라보았다.
“이는 당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헬리오의 후견인은 엄연히 르베나 왕녀님이시고 그 아이는 지금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것도 이미 한 번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요. 그런데 그런 부탁을 시녀장인 당신이 왕녀님께 전하는 건 매우 불충한 일입니다.”
후벤의 단호한 말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겁에 질린 헬리오를 본 사나가 다시 간절하게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르베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헬리오와 사나를 번갈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헬리오의 울음소리와 아한의 짜증 섞인 한숨 소리. 그리고 애가 닳아 눈가가 벌게진 사나의 눈에 이윽고 눈물이 가득 고여갈 때쯤. 르베나가 입을 열었다.
“사나를 봐서 이번은 용서해 주지.”
르베나의 말에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쉰 사나가 하염없는 감사를 전했다.
“르베나 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아를과 아한은 이를 반대하듯 인상을 쓰며 그녀를 불렀다.
“르베나!!”
“누나!!”
하지만 르베나는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다만 헬리오를 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사나와 그런 사나의 품에 안겨 천사 같은 미소를 짓는 헬리오를 보았을 뿐이다.
이내 르베나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처벌이 아예 없을 수는 없는바. 앞으로… 사나의 왕궁 출입을 금한다.”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이번엔 사나뿐만이 아니라 아를과 아한, 후벤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르, 르베나 님……!”
순간 누구보다 놀란 사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제까지 르베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나를 제 옆에 두었다. 그것이 사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잘못은 분명 헬리오가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나의 왕궁 출입을 금하다니.
방금까지 르베나가 지나치게 관대하다 생각하던 아를과 아한까지도 조금은 당황스러워 눈치를 봤고 후벤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아… 르베나 님.”
사나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르베나를 불렀다. 하지만 르베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사나를 한번 바라본 후 뒤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늦겨울의 한기를 담고 전해질 뿐이었다.
“내 명령을 더 이상 무시하지 마라, 사나.”
다시 언젠가처럼 딱딱한 음성으로 제 사람들에게 절대로 붙이지 않던 명령이란 단어를 붙인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얼어붙듯 멈추었다.
“사나, 그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너무 곁을 주지는 마.”
2년 전 젠에서 돌아온 르베나는 다정한 성정탓에 헬리오를 살뜰히 보살피는 사나에게 여러 번 같은 말을 당부했다. 아이가 르베나와 함께 가기를 너무도 원해 데려오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만류하는 만큼 제 몸을 지킬 수단이 없는 사나만은 헬리오와 가깝게 지내기 않길 바랐음을 사나 또한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헬리오가 사나에게 친근하게 치대자 르베나는 헬리오의 전담으로 루를 붙여 주었다. 하지만 헬리오는 언제나 귀신같이 사나를 찾아내어 그녀와 시간을 보내길 즐겼다. 그때마다 르베나는 조용히 사나에게 당부했다.
“헬리오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사나.”
좀처럼 그런 당부를 한 적이 없는 르베나임에도 사나는 그 당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아이를 잃기 전까지는 그나마 잘 지켰던 것도 같다.
헬리오를 보며 진심으로 상대하고 보살폈지만 딱 거기까지, 사나는 나름 선을 잘 지켰다.
헬리오의 서운한 눈빛이 가슴 아파도 사나에겐 르베나의 말 한마디가 더 소중했기에.
하지만 늦은 나이의 결혼으로 포기했던 아이가 선물처럼 찾아오고, 또 신기루처럼 가 버리자 사나는 아이와 후벤에 대한 미안함에 매일매일 시들어 갔다.
“무리를 해서 아이를 잃으신 것은 아닙니다. 뚜렷한 원인이 없이도… 곧잘 일어나는 불운일 뿐입니다.”
궁의는 분명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은 모두 제 탓만 같았다.
그럼에도 르베나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어 매일 외궁으로 향했을 뿐인데. 오랜만에 만난 헬리오는 그런 사나의 곁을 살갑게도 파고들었다. 다정함과 순수함으로. 매일같이.
아이를 잃은 깊은 슬픔을 뽀얀 미소로 다정하게 위로하는 그 아이를 사나를 더 이상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르베나의 당부를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해 버린 것은.
자꾸만 르베나의 물건을 훔치는 아이의 행실이 어린 시절의 부족함 때문일까 싶어 후벤과 상의해 후작저에서 사나에게 들어오는 내탕금 일부마저 아이에게 용돈으로 주었다.
그런데 르베나는 그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번번이 헬리오를 용서하고 사나를 걱정하여 더한 당부를 하지 않은 르베나의 마음을, 사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겼다. 목숨보다 귀한 르베나의 말을, 그 당부를. 그게 모두 저를 위해서임을 알고도.
다그닥 다그닥, 후작가의 마차에 몸을 실은 채 점점 멀어지는 외궁을 바라보는 사나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사나에게 매달리던 헬리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전… 이미 사나에게 가장 소중한 공주님이자 아이가 되어 버린 르베나.
그 둘을 두고 후작저로 떠나는 사나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나갈듯 아팠다.
르베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미안해서, 자신이 없는 공백이 불안하고 르베나의 물건을 훔친 죄책감에 또 며칠을 앓을 헬리오가 안쓰러워서.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위로 떠오르는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사나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그래서 몰랐다.
오늘의 일을, 르베나의 당부를 저버린 이 모든 일들을, 훗날 사나가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