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제4장. 르베이나 (16)
“에취!”
제대로 크게 뱉어진 재채기 소리에 사나가 발을 동동 굴리며 뜨거운 생강레몬차를 건네주었다.
“그러게 어제 조금만 놀라고 했지!”
사나의 엄한 소리에 불쌍한 듯 눈꼬리를 끌어내린 헬리오의 모습에 사나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따뜻한 수프를 달라고 할 테니 기다리렴.”
이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사나의 손길을 느끼며 헬리오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져갔다. 타닷타닷. 벽난로에서 나는 불티 소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방 안의 공기.
제 손에 담긴 차의 온기. 제 머리를 만져 주던 사나의 다정한 손길. 헬리오는 이 순간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큰 응접실 한켠에서 그런 헬리오를 보고 있던 아한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헬리오는 그런 아한을 보면서 묘한 눈을 빛냈다. 그때 다시 돌아온 사나를 보며 헬리오가 조금 뾰로통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한 형은 제가 싫은가 봐요. 말도 한번 안 걸어주고. 뭐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주고.”
헬리오의 시무룩한 얼굴에 사나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감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 아한 님은 어려서부터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 헬리오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사나의 말에 헬리오가 삐죽이며 말했다.
“사나 님 이제 아한 형한테 존대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헬리오의 말에 사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헬리오는 그런 사나를 보며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을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이곳 르베나 왕녀님의 궁에도 있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이상한 건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아한만은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굳이 자신과 응접실을 공유하는 방에서 지낸다는 거였다.
다시 한번 무뚝뚝한 얼굴의 아한을 떠올린 헬리오가 곧 작은 고개를 흔들며 제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는 사나를 보았다. 어느새 헬리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헬리오가 보이던 응접실을 벗어나 얼마간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지는 않지만 어딘가 온기가 가득한 소리들. 듣기만 해도 아한의 입가를 미소 짓게 하는 익숙한 소리.
아한은 그곳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감기에 걸린 헬리오와 헬리오의 식사를 따로 챙기는 사나를 제외한 모두가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방학에도 마법학원을 지켜야 하는 가스트를 제외하고 후벤 경과 아를 그리고 아한과 르베나가함께하는 아침 시간은 아한이 디오니스로 다시 돌아온 이후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식사 시간의 말미, 세공이 멋진 흰색 잔에 나온 따뜻한 퐁당 쇼콜라를 먹으며 아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슬슬 헬리오의 거처를 옮겨야 하지 않겠어?”
몇 년 새 더욱 시니컬한 면모를 풍기게 된 아를의 금안은 이전보다 더 짙고 황홀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아를의 눈은 유독 헬리오에 대해 얘기할 때 더 서늘하게 빛났다.
그가 굳이 메이슨 공작가를 두고 왕궁 기사단의 숙소에 머무르는 것도. 매일 아침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모두 헬리오 때문임을 다들 알고 있기에 이젠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아직 아이야. 그래서 헬리오가 원할 때까지는 이곳에 두기로 했어.”
이어진 르베나의 답변에 아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굳게 입을 닫았다.
벌써 몇 년째 이어지는 헬리오 공방에 후벤이 불편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르베나 님 혹시.. 사나 때문이라면 더 이상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벤의 무거운 음성에 순간 아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아를의 무겁던 입이 곧바로 곤란한 듯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음…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후작님.”
미안함이 가득 담긴 그의 말에 후벤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를 경의 마음을 잘 아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르베나 님. 저도 사나도 무엇보다 르베나 님의 안위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아이가 떠난 지도 벌써 5개월이나 지났는 걸요.”
후벤의 말에 르베나가 조용히 들고 있던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미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듯 온화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제가 잘 지켜보고 있어요. 헬리오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말씀 드릴게요. 그러니 모두들 너무 염려 마세요.”
모두를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전한 아한의 말에 후벤이 조용한 감사의 눈인사를 전했다. 모두가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언제나처럼 기쁜 마음으로 시작되어 헬리오로 인해 조금은 무겁게 막을 내렸다.
* * *
젠에 다녀온 후 르베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그녀가 목숨보다 아끼는 두 사람, 후벤과 사나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르베나 님, 저희… 결혼을 하려고 해요. 제가 시녀장이라 르베나 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젠에 다녀온 후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둘의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르베나는 당시 꽤 많이 놀랐었다. 당시 후벤의 나이가 벌써 40대 초반이었고 사나는 30대 초중반. 하지만 르베나는 두 사람의 나이 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아끼는 두 사람이 결혼으로 묶인다는 것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충격도 잠시였을 뿐. 르베나는 그 누구보다 둘의 결합을 축하하며 성대한 결혼을 열어 주었다.
“왕궁에서 제일 큰 루아나홀에서 결혼이라뇨!!”
“이렇게 성대한 결혼식은 필요 없습니다, 르베나 님!”
그리고 곧이어 두 사람은 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나, 당분간 시녀장 일은 쉬어. 아니다, 후작 부인이 되었으니 아예 그만두는 건 어때?”
조금은 나이가 있는 사나의 첫 임신에 르베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마세요. 루가 이제 일을 잘 해서 저는 일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시녀장 일은 절대 그만 둘 수 없어요!”
사나는 끝끝내 시녀의 업무를 병행했고 얼마 안 가 아이를 잃고 말았다. 당시 디오니스 궁의 모두가 사나와 후벤의 아이를 생각하며 한마음으로 아파했다. 특히 르베나는 괜히 제 탓인 것만 같아 한동안 사나를 잘 보지도 못했다.
“아직도 그게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어느새 르베나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선명한 금안에 조금의 염려를 담은 아를이었다. 아침 식사 후 아벨디온의 일로 르베나의 응접실에서 함께 티타임을 나누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걱정 어린 그의 얼굴에 르베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나도 후벤도 절대 아니라고 하니까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책임이 아예 없다고도 생각하기는 힘드네. 그만큼 사나와 후벤에게는 많이 힘든 일이니까.”
옅은 죄책감이 깔린 르베나의 얼굴을 아를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 르베나는 자연스럽게 웃기도 했고 찡그리기도 했으며 조금 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다.
어느새 부드러워진 말투와 분위기가 그것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나와 헬리오의 일 이후 조금씩 느껴지는 벽이 최근 아를은 르베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으면서도 조금 불편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서서히 열려 가는 르베나의 마음을 놓치는 건 불편한 것보다 더 싫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궁의도 그랬잖아. 단순히 과로의 문제가 아니라고.”
재차 강조하는 아를의 말이 고마워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르베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찻잔을 들던 아를의 눈에 순간 응접실 벽난로 위에 놓여 있던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블루 다이아를 박은 통신구 겸 장신구.
‘유파시드가 준 것… 아니, 나눈 것인가.’
아를은 문득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부쩍 가까워진 루드바하와 르베나를 떠올렸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그래서 아벨디온과 성기사들의 합동훈련은 언제라고 했지?”
그래서일까. 르베나의 입에서 성기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를의 어딘가가 고장이라도 난 듯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듯하더니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주 뒤로 라웅 경과 얘기하고 있어. 그것보다 르베나, 하루라도 빨리 헬리오를 내보내. 아까는 후벤 경 때문에 얘기를 끝까지 못했지만 가스트 님도, 아한도 그리고 다한 경까지 모두가 걱정하고 있어. 이건 너답지 않은 결정이야.”
또다시 불거진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어둡게 침잠되었다. 그리고 르베나는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얘긴 끝났어, 아를. 이건 내 결정이야. 단순히 헬리오에게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해서 애를 갑자기 어디로 내칠 순 없어. 사나와 후벤의 집이라면 더더욱.”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조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누가 내치자고 하는 거야? 메이슨 가로 보내자고 했잖아! 아버지나 형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실 거고, 누구 못지않게 잘 보살펴 줄 거라고. 도대체 왜 이렇게 걔를 여기 못 둬 안달이야?”
아를의 감정적인 목소리에 르베나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아를이 뒤이어 말했다.
“언제까지 불쌍한 애들만 보면 네가 다 구하려고 할 건데? 너는 디오니스의 왕녀고 아벨디온의 단장이야!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너와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아를의 외침에 순간 르베나의 눈이 약간의 충격을 담고 그를 향했다. 그 눈빛에 아를이 순간 멈칫했다가는 서둘러 표정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르베나, 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합동 훈련 일정이 잡히면 다시 얘기하자, 아를.”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르베나의 단호한 축객령에 아를은 이내 포기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베나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굳어진 탓이었다.
탁.
어느새 문을 닫고 나온 아를이 제 몸을 르베나의 방문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하아, 머저리 같은 놈.”
조금 전의 자신을 질책하는 아를의 낮은 목소리에 깃든 후회의 감정이 주위의 공기가 녹아들었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르베나의 눈은 여전히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여태 내가 헬리오를 그런 마음으로 곁에 둔다고 생각한 건가…….”
서로 다른 마음은 이 순간 얇은 문을 사이에 놓고도 전해지지 못했다.
* * *
달칵. 큰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방에 약간의 빛이 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발자국 소리조차 남기지 않은 채 스윽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들어왔을 때보다 더 조심스러운 소리와 함께 어느덧 방문이 닫혔고 커튼 때문에 온통 어두운 방 안에 스며든 작은 그림자는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서랍을 여닫는 조심스러운 소리와 어딘가를 뒤적이는 인기척이 꽤나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곧 바깥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자 작은 그림자는 조용히 창을 열어 몸을 빼냈다.
어둠이 가득하던 방과는 상이하게 한낮의 태양이 높게 떠 있는 밖으로 나오자 작은 그림자의 눈이 순간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결코 손안에 쥔 어떤 것을 놓치지는 않았다.
퍽!
“커… 흑!!”
아마 갑작스레 나타난 큰 그림자가 작은 그림자의 멱살을 잡아올려 벽에 밀어붙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땡그랑. 금속성의 물건이 딱딱한 바닥에 구르는 작은 소리와 함께 낮고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감히 왕녀님의 방에서 뭘 하는 거지, 헬리오?”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의 그, 아를의 말에 헬리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