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95화 (195/276)

195화

제4장. 르베이나 (15)

“헬리오! 감기 걸리니 밖에 오래 있지 말라고 했잖니!!”

애정 어린 잔소리와 함께 금방 따뜻한 우유를 내어 주는 사나에게 씨익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인 헬리오가 조용히 구석에서 책을 읽는 이를 보며 소리쳤다.

“아한 형! 함께 놀아요, 네?”

어느덧 해가 바뀌어 키가 훌쩍 큰 열일곱 살의 아한이 무감각한 녹안을 책에 고정하며 말했다.

“유치한 눈싸움은 너나 해. 그리고 이 책 다 읽기 전까지는 말 걸지 마.”

조금은 낮아진 아한의 목소리에 사나의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아한의 말에 헬리오는 칫, 하고 혀를 한 번 굴릴 뿐이었다. 이내 헬리오는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다시 온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사나가 헬리오가 놓고 나간 장갑을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그 익숙한 모습의 뒤로 르베나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디오니스에서 격전이 일어난 지도 벌써 두 해.

겨울의 끝자락에서 어느새 23살이 된 르베나는 누가 뭐라 해도 그녀만의 아름다움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왕녀가 되었다.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차를 마시는 르베나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우아함이 물씬 풍겼지만 조금 더 깊어진 눈빛과 표정은 그녀를 마냥 아름다운 여자로만 보이게 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더 자란 머리를 옆으로 땋아 하나로 내린 르베나의 옆얼굴엔 누구도 쉬이 접근하기 힘든 왕족의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르베나의 손은 제 앞에 놓인 뜨거운 밀크티를 무리 없이 감쌀 정도의 굳은 살이 더해졌고 한층 더 깊어진 붉은 눈에는 어느새 다양한 감정의 편린들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두 해, ‘보토니에’와의 일전을 준비하며 모든 나라가 긴장의 촉을 세웠지만 ‘보토니에’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홀연히 모습을 감춰 버렸다. 디오니스와 젠이 주축이 되어 ‘보토니에’를 추적했지만 놀랍도록 그들의 힘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는 결코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해서 모든 나라는 국력에 총력을 기울여 언제라도 나타날 그들과의 전쟁에 모든 노력과 시간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르베나 또한 후벤과 함께 디오니스의 기사들을 더욱 강하게 양성했고 디오니스 내 베이라의 자질을 조금이라도 갖춘 아이들을 모두 젠의 마법학원으로 보내 일체의 비용을 모두 지원하며 그들의 성장을 도왔다.

“대체 저 녀석은 언제까지 여기 둘 거야, 누나?”

어느새 부쩍 낮아진 목소리와 깊어진 녹안. 어느샌가 읽던 책을 덮고 르베나의 앞에 앉은 아한에게 르베나의 부드러운 시선이 닿았다.

르베나에게 있어 지난 시간의 소중한 변화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아한이었다. 아한은 작년 디오니스의 격전 이후 곧바로 젠의 마법학원으로 돌아가 단 한 번도 디오니스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마력에 대한 연구와 실전 연습으로 밤을 새기가 일쑤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웬만해선 티를 내지 않는 가스트의 걱정이 대단할 정도로 아한은 마법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열일곱이 되어 처음 디오니스로 돌아온 아한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뿐이랴.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에 냉정해진 태도가 모두에게 사뭇 낯선 느낌까지 주었다.

하지만 르베나만큼은 그런 아한의 성장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야, 아한.”

부드러운 르베나의 답변이 흘러나왔지만 아한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말했잖아. 불쾌한 느낌이 나.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다고.”

마법학원의 교수들이 먼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탐지마법에선 대륙 최고라고 알려진 아한. 하지만 아한마저 헬리오에게만은 미묘한 불쾌감을 느낄 뿐 그것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짚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한은 더욱 헬리오에게 예민했다. 곧 아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듣자 하니 저 녀석 벌써 여러 번이나……!”

“그 얘기는 그만, 아한.”

아한의 말을 부드럽고 깔끔하게 끊어낸 르베나의 눈이 시녀들과 눈싸움 중인 헬리오를 향했다. 이에 아한 또한 작은 한숨을 삼키며 온실 밖의 헬리오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려온 헬리오는 몰라보게 키가 컸고 보기 좋게 살도 올랐다. 올해 열한 살이 된 아이, 헬리오.

결 좋은 옅은 은발과 레몬빛의 투명한 눈은 누가 보아도 헬리오를 귀여운 소년으로 보이게 했고 아이의 밝은 얼굴은 스쳐간 과거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곧 헬리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느낌만으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순 없어, 아한. 그건 옳지 않은 일이야.”

르베나의 말을 들은 아한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느낌으로, 단지 그것만으로 르베나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아는 아한으로서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한의 맑고 깊은 녹안이 싸늘한 기운을 담고 정원을 뛰어노는 헬리오에게로 향했다.

분명 생명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신력이나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아이.

그럼에도 처음 본 순간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을 아한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보토니에’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 그 무언가가 헬리오에게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아한으로서도 그게 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아 답답할 뿐.

“게다가.”

순간 르베나의 말이 조금은 망설임을 담은 채 이어졌다.

“사나가 좋아하잖아. 저 아이…….”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순간 아한은 울컥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참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디오니스의 누구도 아직 그 아픔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르베나, 접니다.”

짙은 미드나잇 블루의 나이트 가운을 입고 살짝 젖은 머리의 루드바하가 푸스스 미소를 띠었다. 마력으로 띄운 화면에서 나온 그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르베나가 애써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씻고 나온 줄 몰랐어요. 이따가 다시 하죠.”

금방 마력을 회수하려는 르베나에게 루드바하가 서둘러 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이 딱 좋아요.”

조금은 단호하게 제 뜻을 전한 루드바하가 자신의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단하고 긴 목으로 뚝뚝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피곤으로 조금은 풀어진 짙은 푸른 눈과 붉은 입술. 모두가 지나치게 선명한 화면을 통해 르베나의 눈에 고스란히 담겨 왔다.

“르베나, 오늘은 어떤…….”

뚝.

웃으며 말을 잇는 도중 사라져 버린 통신 화면의 빈자리를 멍하니 보던 루드바하가 다시 한번 반지에 신력을 흘려 넣었다.

뚝.

하지만 화면은 연결되지 않았다. 순간 차갑게 언 루드바하가 제 붉은 입술을 열었다.

“키세.”

그와 동시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키세가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키세를 보며 루드바하가 한 손으로 제 턱을 괴며 말했다.

“샤워 직후, 젖은 머리. 쓸어올리며 떨어지는 물기. 이걸로 루사랑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나?”

늦겨울의 추위가 방안에도 기승을 부리는지 부쩍 오싹해진 팔뚝을 문지르며 키세가 답했다.

“네, 네!! 부, 분명 루사가 제 그런 모습에 반했다고 했습니다. 제 고백을 내내 거절하다 제가 연무장에서 씻고 나온 모습에 반했다… 고.”

키세는 제 앞에서 조용히 저를 노려보는 루드바하를 보며 울고 싶어졌다.

감정의 기복이 없고 언제나 단호함만을 지녔던 제 폐하는 몇 해 전부터 자꾸 이상한 질문을 던지며 따뜻한 봄날과 한겨울의 북풍을 오락가락했다.

유안이 르베나 왕녀님과 얼른 혼인을 하셔야 안정이 되실 거라고 했지만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보토니에와’의 일전이 계속 미뤄지면서 루드바하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지기만 했다.

“하… 됐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오늘은 이만 퇴근하지.”

얼굴이 파랗게 질린 키세를 본 루드바하가 서늘한 시선을 거두고는 그를 내보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 아이가 눈에 아른거릴 키세를 붙잡고 뭐 하는 짓인지.

속으로 ‘타도,‘보토니에!’를 뜨겁게 외치던 키세가 금세 사라지자 루드바하가 가볍게 신력을 흘려 제 머리를 말렸다.

재작년 생일, 르베나가 다녀간 후로 갑자기 궁 안 시녀랑 결혼을 하고 깨를 볶으며 사는 키세. 요즘 따라 유난히 부러운 그를 내보낸 루드바하가 조금은 우울한 눈으로 제 뒤에 놓여 있는 그릇을 보았다.

르베나에게 통신구가 오면 바로 머리를 적실 요량으로 물을 받아 기다리길 30분.

그녀가 자신을 보고 조금이라도 설레었길 바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르베나는 루드바하의 이런 모습이 무례하다고 여겼을 거라 생각하니 그는 이대로 깊게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계속되는 전쟁 준비로 작년의 생일은 제국 내로 한정해 진행되었고, 간신히 여유 시간에나 그나마도 통신으로 르베나를 본 지 어느덧 2년.

루드바하는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이젠 빨리 ‘보토니에’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에게 온전한 제 맘을 전할 수 있을 테니.

사실 몇 번 억지스러운 핑계로 르베나를 찾아간 적은 있지만 그런 짧은 만남은 루드바하에게 더 진한 아쉬움만 남길 뿐이었다.

곧 축 처진 그의 눈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루비 반지로 향했다. 몇 겹의 실드로 감싼 반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순도 높은 루비는 물방울 모양을 따라 몇 겹의 작은 다이아 알맹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게 정밀하게 세공된 세련되고 우아한 반지는 왜인지 오늘도 조금 외로워 보였다. 허망한 눈으로 통신구만 바라보는 저처럼.

뚝 떨어진 물이 긴 목을 흘렀다. 굵고 긴 손가락은 은발의 사이사이를 파고들었고, 그 아래 조금 치켜떠진 눈은 짙은 바다의 심해같이…….

“미친 거야.”

조금 전 루드바하의 모습을 떠올리던 르베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그냥 가장 편한 모습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리다니.

그럼에도 붉게 물든 촉촉한 입술과 밤하늘을 닮은 눈은…….

“정말 미친 거야.”

다시 이어지는 생각에 고개를 세게 저은 르베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편한 바지로 갈아입은 그녀는 따뜻한 방을 벗어나 연무장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흡사 전쟁이 난 것처럼 온통 헤집어진 연무장을 마주한 아벨디온만이 영문을 모른 채 하루 종일 구덩이를 메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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