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94화 (194/276)

194화

제4장. 르베이나 (14)

모두의 시선이 서로 다른 불안을 가지고 쿠키에 집중하는 아이에게 향한 순간이었다.

똑똑. 가볍고 정중한 노크와 함께 젠의 시녀가 들어와 루드바하의 방문을 알렸다.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유안과 라웅을 대동한 그가 방에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르베나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전한 루드바하가 자리에 앉아 말했다.

“조사결과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했던 여인은 실제로 아이가 없더군요. 하지만 어디에서 독을 먹었는지, 왜 아이를 납치하려 했던 것인지는 현재까지 도저히 단서가 없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놀란 사나가 안쓰러운 눈을 가지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동정 어린 분위기를 깨어 버린 것은 여태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바라보던 아를이었다.

“안 됐네. 하지만 르베나가 무사히 구해 왔으니 이 뒤는 젠에서 잘 처리할 거야.”

아를의 금안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헬리오… 라고 했나? 네 옆에 앉아 계신 분이 젠의 유파시드시다. 아마 앞으로 너의 거처 등에 대해 잘 살펴주실 테니… 르베나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그 손은 이제 좀 치우지그래?”

아이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싸늘한 아를의 말에 아이가 흠칫 놀랐다가는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르베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무감각한 눈으로 아이의 눈을 한 번, 이곳에 온 후로 내내 제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곧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는 이곳에 온 이후 계속 르베나의 치마를 잡던 작은 손을 놓은 아이를 보며 루드바하가 말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 알아보고 너의 거처와 후견인을 알아보마. 그러니 걱정 말고 저기 있는 사람을 따라가거라.”

루드바하가 문가에서 대기중인 시녀를 가리키며 말하는 순간,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도도 르베나의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

“젠은 싫어요!! 저, 저는 이, 누나를 따라갈래요.”

“감히 어디다 대고 누나 운운하는 거지?”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를의 싸늘한 금안이 빛을 냈다. 이를 본 르베나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아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야. 너무 다그치지 마.”

르베나의 말에 아이가 르베나의 뒤로 더 숨어들자 아를이 문 앞에 대기한 시녀를 보며 말했다.

“일단 아이를 좀 데려가지. 아이가 있으니 대화가 불편해.”

아를의 말에 시녀가 허락을 구하듯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곧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작은 꼬마 도련님, 저와 함께 가서 맛있는 걸 먹을까… 앗!!”

말을 하며 손을 내밀던 시녀의 손을 매섭게 쳐낸 아이, 헬리오가 곧장 르베나의 옆에 서있던 사나의 품으로 안겨들며 말했다.

“저 사람은 싫어!! 꼭 가야 한다면 이, 이 사람이랑 갈래……. 제발… 이요.”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가 얘기하자 사나가 오래 씻지 않아 더러운 아이를 제 품에 꼬옥 안으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데려갈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사나의 간곡한 청에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곧 건너편에 자리한 후벤을 보며 말했다.

“후벤, 괜찮다면 사나와 함께 가 주겠나? 아이가 아직 거칠어 사나 혼자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르베나의 말에 후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르베나의 허락이라 생각한 사나가 아이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자 르베나가 잠시 후벤을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그리고 후벤에게 조용히 말을 전한 르베나가 스윽 고개를 끄덕이자 후벤이 곧바로 사나와 아이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아이가 떠나고 나자 르베나가 머무는 방의 응접실에는 디오니스의 가스트와 다한, 아를이. 젠의 루드바하와 유안, 라웅이 적막과 함께 남아있었다. 곧 르베나를 바라본 아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아이일 뿐이긴 하지만 너에게 너무 붙는 것도 이상해. 젠에 맡기고 관심 끄자.”

아를의 말에 언제나 말수가 적은 다한 경도 모처럼 입을 열었다.

“성급하다 하실 수 있지만 저 역시 아를 경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곳이 디오니스면 모를까 젠이 아닙니까. 유파시드 님의 나라이니 젠에 맡기시죠, 단장님.”

하지만 이어진 아를과 다한의 말에도 르베나가 선뜻 답을 하지 않자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저들과 같은 생각입니다, 르베나. 아까는 말을 아꼈지만 아이를 납치하려던 여성의 최근 행적이 묘연합니다. 무엇보다 근방에서는 아이를 아는 이들 역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아이에게서 신력이나 마력 그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더불어 아이의 신변은 젠에서 책임질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앞선 이들과 같은 의견을 비춘 루드바하의 말. 하지만 이 모든 만류에도 잠시 말이 없던 르베나가 잠시 아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러다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결심이 선 듯 붉은 입술을 열었다.

* * *

며칠 새 부쩍 서늘해진 바람은 어느새 여름의 끝을 모두에게 알리듯 시원스레 제 몸집을 불리고 있었고 통통한 아기 천사가 입으로 뿜어 내는 물의 기운은 별빛이 가득한 밤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 르베나가 있었다.

마지막 연회를 위해 입은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가 그녀를 밤의 여신처럼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 르베나는 연회의 시작에만 얼굴을 잠시 비췄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검기 훈련 이후 부쩍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아진 아벨디온을 위해 자리를 비켜 준 것이기도 했다.

순간 분수대에 걸터앉은 그녀의 작은 고갯짓에 흔들린 다이아 귀걸이가 밤하늘의 별같이 반짝였다.

“하-.”

그리고 한껏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람에 몸을 맡긴 르베나의 입에서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젠에서의 마지막 날. 칸은 아네벨 상회의 일로 어제저녁 마를한으로 떠났다.

떠나면서도 르베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담아내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 르베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순간 슬그머니 미소가 번지는 제 입가가 아직은 어색했지만 누구도 없는 넓은 정원의 분수대는 그 미소를 애써 숨기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아까 전 헬리오의 일로 기분이 상해버린 아를을 떠올린 르베나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지긴 했지만 르베나는 이마저도 날려 버리듯 어두운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아찔함이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과 떨어지는 분수대의 물소리, 일대를 기분 좋은 신력으로 감싸는 힘조차.

“르베나.”

곧 듣기 좋은 음성과 함께 편안하고 기분 좋은, 조금은 익숙해진 그의 향이 르베나의 머리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따듯하고 보드라운 어떤 것이 달빛에 훤히 드러난 르베나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르베나의 눈이 어느새 제 앞에 선 그, 루드바하를 향했다. 언제나 입던 흰색의 정복이 아닌짙고 어두운 푸른색의 정복. 그리고 그의 머리칼을 담은 은색의 단추와 푸라제르(제복에 두르는 휘장)를 단 그는 유난히 밤과 어울려 보였다.

르베나를 내려다보며 흘러내린 그의 머리가 달빛에 비쳐 금발로 보였다.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죠.”

르베나의 타박 아닌 타박에 루드바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는 르베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르베나가 없으면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어느새 조금은 편해진 루드바하의 말투조차 르베나는 느끼지 못했다. 그의 존재처럼 그의 모든 것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둘 사이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오늘이 당분간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밤임을 알아도 두 사람은 구태여 다른 말들을 꺼내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에.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여름의 끝을 소란스레 알려왔고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오가는 사이, 따뜻한 온기가 르베나의 한쪽 손을 온전히 덮어왔다. 그렇게 나란히 닿아있는 손 사이로 두 사람의 설렘도 바쁘게 오고갔다. 주위로 나뿌끼는 바람도, 아기 천사의 입을 통해 떨어지는 물도 그들의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는 밤이었다. 움찔, 순간 손에서 느껴진 차가운 감촉에 르베나의 눈이 루드바하의 손 아래에 있는 제 손을 향했다. 그리고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 왼 손을 보여 주었다. 방금 르베나의 손에 끼워준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 그것이 그의 긴 손가락에 껴져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르베나의 반지는 그의 눈을 담은 짙은 푸른색의 다이아가, 루드바하의 반지에는 르베나의 눈을 담은 붉은 색의 루비가 있다는 것 정도랄까.

“저처럼 손에 하는게 불편하시면 목에 걸어도 좋습니다. 다만 르베나의 목소리가, 얼굴이 보고 싶을까 봐.. 준비한 거거든요.”

조금은 변명 같은 그의 말에 르베나는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정한 마력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마력으로 하는 게 충전하기 좋을 것 같아 가스트 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력을 넣으면 언제든 서로 대화가 가능하고 큰 마력을 넣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제가 르베나 그대 옆으로 갈 겁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어색하게 보던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인가가 생겼다는 것은 알지만, 맞추어 끼는 반지나 수도의 저택 하나와 맞먹는 가격의 보석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거절이 맞았다.

“목에… 걸죠.”

하지만 제 생각과는 다르게 나온 말에 르베나의 귀가 그만 붉어지고 말았다. 촉. 곧 그 붉어진 귀에 더 뜨거운 누군가의 숨결이 보태어졌다. 놀란 르베나의 눈이 옆을 향하자 부드러운 밤하늘처럼 환한 미소를 지은 루드바하의 얼굴이 보였다. 촉. 한번 더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르베나의 귓가에 닿아왔다. 차가운 가을의 시작이 더없이 뜨거운 어느 밤이었다.

* * *

착.

“꺄아!!”

착, 착!! 저마다 하얗게 쌓인 눈을 손안에 굴려 던지는 시녀들의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르베나의 작은 외궁을 가득 채웠다. 사나가 가져온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얼굴에는 어느새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 티 타임을 즐기는 정원 한쪽, 겨우내 계속 티를 마시기 위해 설치된 온실 안팎에 따뜻한 여유로움이 가득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왕녀님 드리라고 주신 티를 넣은 건데… 어때요?”

맞은 편에 앉아 르베나의 평을 기다리는 사나의 다정한 갈색 눈이 반짝거렸다.

이에 조용히 밀크티를 한 번 더 음미한 르베나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님의 선택다워, 좋아.”

르베나의 대답에 제가 선물한 차인 양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 사나가 이번엔 보기 힘든 모양과 색의 쿠키들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건 칸님께서 보내온 쿠키들이에요. 멀리 요정들의 숲에서 얻은 것들인데 르베나 님의 티 타임에 꼭 내어 달라고 하셨어요.”

르베나가 사나가 내어 준 쿠키 중 하나를 입에 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악. 그 순간 온실의 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안으로 듬뿍 들어왔다.

“사나 님! 저도 따뜻한 우유요!!”

후다닥 르베나의 앞에 앉아 사나에게 티를 외치는 소년, 헬리오가 르베나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덧 두 해. 헬리오를 디오니스로 데려온 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디오니스에도 봄을 앞둔 어느 느지막한 겨울의 한 페이지가 다음 장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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