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93화 (193/276)

193화

제4장. 르베이나 (13)

“…아버지? 칸 님이? 마력 색이 비슷해서 의심은 했지만 정말로 르베나 네 아버지라고?”

긴 르베나의 말을 들은 아를이 놀란 금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러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차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르베나의 요청으로 둘은 작은 정원에 차려진 티 테이블로 이동했고 칸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르베나는 주변을 모두 물렸다. 그리고 아를에게 단 하나도 빠짐없이 칸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놀란 얼굴로 계속 같은 말을 되묻던 아를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공백이 왜인지 조금 불안해 르베나가 입을 열 찰나 아를이 먼저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야? 네 말투. 요즘 많이 노력하긴 했지만 힘들어했잖아. 그런데 아까 회의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던데.”

왜인지 많이 긴장한 듯한 아를의 질문에 르베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칸이… 아버지가 그렇게 해달라고 울면서 부탁하니까.”

짧은 말이지만 수많은 감정이 깃든 르베나의 대답에 이제껏 쌓인 긴장이 탁 풀어지듯 크게 숨을 내쉰 아를이 의자에 제 몸을 기대었다.

“…하아, 진짜 다행이다. 진짜, 진짜!!”

르베나가 아버지를 찾아 다행이라기엔 무언가 더 크게 안심한 것 같은 아를의 표정이 미묘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를이 르베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르베나가 당황해할 찰나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한껏 미소지은 아를이 르베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축하해, 르베나. 너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겨서.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정말 기쁘다.”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 눈을 마주보며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뜻 제 앞에 무릎 꿇은 아를의 미소가 높이 떠오른 해처럼 빛났다. 그 모습이 참 고마워서. 참 행복해서. 덩달아 르베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순간 아를이 깜짝 놀라며 물어왔다.

“혹시… 가스트 님께는?”

아를의 질문에 르베나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가스트는. 그리고 지금은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 켄느에서 처음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같이 들은 게 너이기도 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용기를 준 것도 아를, 너니까.”

불어오는 바람에의해 흩날린 머리카락을 피하려 르베나가 순간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제 눈에 담은 아를의 입가에 저도 모르는 미소가 번져나갔다.

처음. 누군가에게 처음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오전에 보았던 루드바하의 모습에 지옥까지 떨어졌던 아를의 마음이 다시 하늘 위를 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도, 한순간에 지옥으로 처박을 사람도.’

“오직 너뿐이야, 르베나.”

아를의 작은 뒷말을 듣지 못한 르베나가 가볍게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보자 아를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얼핏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이 정오의 햇살만큼으나 뜨거웠다.

* * *

깨끗한 대로 가득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는 상인의 큰 목소리, 가격을 가지고 흥정하는 손님의 고집스런 소리, 여기저기서 빈 공기를 채우고자 뿜어져 나오는 음식의 냄새들, 뛰는 아이를 부르는 부모의 소리와 꺄르르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수수한 옷을 걸치고 머리끝까지 로브를 둘러쓴 르베나가 제 눈에 담긴 모든 것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표정이 그 나라를 보여준다는 말처럼 젠은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편안함이 가득 느껴지는 곳이었다.

“같이 못 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함께하기로 했던 루드바하는 조금 전 일정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침통한 사과를 전해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옆에 있는 유안을 노려보는 벽안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르베나의 입가에 가만히 미소가 맴돌았다. 그렇게 르베나는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맛있는 식당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하고 활기찬 거리를 구경하고. 마법 용품점, 장인이 만드는 검을 파는 가게,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드레스 숍 등을 전전하며 생각나는 이들의 선물을 사기도 했다.

사다 보니 양이 많아 결국은 모두 배송으로 부탁했지만. 이윽고 모든 쇼핑을 끝낸 르베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태어나 누구의 선물을 직접 사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쓸데없이 모아만 둔 보석들이 처음으로 기특해 보였다. 그중 유일하게 손에 든 선물, 아를에게 줄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검은 좋아하겠지?’

아주 옅게 미소 지은 르베나의 눈이 문득 점점 붉어지는 오후의 태양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르베나의 걸음이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젠의 황궁 앞까지 텔레포트로 이동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내를 벗어나 조금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의 비명이 르베나의 귀를 때려왔다.

“살려주세요!!!”

비명소리에 놀란 르베나의 몸이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달리는 마차 앞에 멍하니 선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 어느새 그 앞에 선 르베나의 손이 검붉은 마력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달려오는 말이 치켜든 앞굽에 망설임없이 작은 마력을 흘려보냈다.

“히히힝~!”

순간 잔뜩 흥분했던 말이 르베나의 마력을 받더니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조용히 발을 내려놓고는 다그닥다그닥 우회하기 시작했다. 놀란 마차의 주인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쓰러진 이들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리던 르베나가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손에서 나온 마법, 성난 말을 잠재우는 힘, 그리고 조금은 딱딱한 말투.

눈앞의 사람이 입은 옷은 평민의 것 같았으나 지나치고 좋은 원단을 썼다. 르베나가 변복을 한 귀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아이를 안은 엄마가 꾸벅 땅에 대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모자 목숨을 살려 주시다니……!”

아이를 안은 손이 사정없이 떨리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거라면 좀 더 주위를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르베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자와 여자의 손을 잡은 아이가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자 르베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제 팔을 붙잡는 작은 손길만 아니었다면.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마법사님! 제발!”

어느새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그렁거리는 아이의 말이 들려 왔기 때문이다.

아이의 간곡한 외침에 르베나의 눈은 여자가 아닌 아이에게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다.

* * *

“왜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회의를 마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성의 없이 서류를 넘기는 루드바하를 본 유안이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물었다.

“…….”

하지만 대답조차 없는 그의 반응에 유안이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는 제 외알 안경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데이트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르베나 왕녀님께서 폐하가 싫으시답니까, 드디어?”

유안의 고저없는 물음에 루드바하의 새파란 벽안이 시리게 그를 향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유안. 르베나 왕녀와 나에 관해선 어떠한 불길한 말도 불허한다.”

점잖고 그림 같은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제 폐하가 정상인거 같았지만 옆에 쌓인 서류더미를 보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곧 유안이 진심을 다해 루드바하에게 말했다.

“르베나 님을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한다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시던 폐하가 아닙니까. 한데 지금 저 서류들 좀…….”

“기사에게 검이란 뭘까, 유안?”

“그러니까 검이란… 네?”

난데없이 검이라니. 애초에 기사도 아닌 제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언제나 막힘없던 유안의 입이 다물리자 루드바하가 곧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누군가를 불렀다.

“키세.”

그의 부름과 동시에 언제나 지척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 중 하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유파시드만을 보호하며, 그의 명만을 따르는 10명의 최상위급 성기사단, 유파로드. 그들의 단장이 루드바하의 앞에 부복한 것이다.

항상 가장 어렵고도 조심스러운 일들을 주셨던 유파시드이기에 예민한 키세의 감각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기사에게 검이란 뭐지?”

“예! 유파시드! 네……?”

언제나 명령에는 복종, 이라는 일념으로 아무리 어려운 명도 따를 각오가 되어 있던 키세의 대답은 바람 빠진 소리로 마무리되어 버렸다.

“기사에게 검이란 뭔지 물었다.”

항상 짓던 미소도 없이 무표정하게 묻는 루드바하의 벽안이 제게 닿자 키세가 슬며시 유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폐하께서 뭘 물어보시는 거지?’

‘미안하다, 키세. 나도 몰라.’

오래된 친구, 유안마저도 그를 외면하자 키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사에게 검은 목숨 그 자체입니다, 폐하.”

키세의 답에 순간 움찔한 루드바하가 다시 물어왔다.

“그렇다면 너에게 완벽한 검을 선물한 이는 어떤 존재일 것 같나?”

더 어려워진 루드바하의 질문에 키세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차라리 적진에 가서 누구의 목을 베어오라 하면 나을 것인데 왜 이런 걸 물으시는지.

당황한 키세가 식은땀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는 순간 눈을 빛냈다.

‘내게 완벽한 검을 주신 분은? 유파시드 님이다!!’

키세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히 제 목숨 그 자체이십니다! 완벽한 검을 주신 분은 제 안전과 안위를 가장 많이 염려하시는 분일 터, 어찌 목숨을 바쳐 지키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키세!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저에게 완벽한 검을 내려주신… 폐하를 위하여……!!”

말을 하던 키세가 입을 벌린 채 끝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살기를 담은 신력이 루드바하에게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퍼져 나왔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키세의 눈이 또다시 유안을 향하자 그는 넌 이미 끝났어, 라는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키세.”

부드러운 미풍과도 같은 목소리. 그리고 여느 눈부신 화폭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미소.

루드바하의 얼굴을 본 키세가 제 등을 온통 적시듯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속으로 외쳤다.

‘루나, 미안해.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인 줄 몰랐어.’

고백조차 해보지 못한 시녀를 떠올리는 키세의 하루가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어둠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후르륵, 후르륵. 와삭와삭, 아그작 아그작.

따뜻한 양송이 수프를 세 그릇이나 비워 내고 곧이어 제 앞에 놓인 간단한 과일칩들을 아작 내더니, 연이어 나온 따뜻한 쿠키를 사정없이 입에 넣는 아이를 보는 사람 중 예의 없다며 얼굴을 찌푸린 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납치당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이에게 우유를 건네주던 가스트의 물음에 제 앞에 놓인 쿠키를 가볍게 한 입 베어 물고 삼킨 르베나가 말했다.

“저 아이의 말로는 그렇다고 해.”

아이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떼어주던 사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럼… 그 엄마라고 자처했던 여성분은요?”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했다.

“죽었어.”

“네?”

르베나의 말에 놀란 사나가 얼른 아이의 귀를 막았다. 하지만 아이는 별 타격이 없는 것처럼 제 앞에 놓인 쿠키만을 먹을 뿐이었다. 그런 아이를 한번 스윽 바라본 르베나가 말했다.

“아이가 내 뒤로 온 순간 피를 토하며 죽더군. 보니까 중독된 지 꽤 오래되어 보였어.”

르베나의 말에 사나와 가스트는 순간 침묵을 지키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납치라고 주장했던 아이, 기다렸다는 듯 죽어 버린 여자. 르베나가 말한 이 모든 일들이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키는 의문의 싹처럼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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