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제4장. 르베이나 (12)
루드바하는 누구보다 예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저에게만 향했으면 하는 마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랑해요, 르베나.”
한 번만 뱉어도 좋겠다 생각한 그 말은 막상 뱉어보니 묘하게 허전한 마음을 남겼다.
“그대의 곁에 있고 싶어요.”
조금 다르게 뱉어보아도,
“그대의 사람이, 그대의 남자가 되고 싶어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뱉어보아도,
“하… 그 마음이 이젠… 조절이 안 돼요.”
도무지 채워 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루드바하는 다가갔다. 놀란 듯 그리고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르베나의 얼굴에.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마주하며 가깝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어느새 파르르 떨리는 르베나의 속눈썹이 보였고 이어 그녀의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사랑합니다, 르베나.”
다시 한번 내뱉은 말의 갈증을 채우고자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싫으면, 피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엔 더 이상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 *
사나와 후벤, 그리고 가스트와 아한은 회귀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르베나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다.
“르베나님. 그 딱딱한 말투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요.”
“누나, 막 그냥 대해 주면 안 돼?”
언제나 르베나가 그들에게 조금은 친근하게 말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회귀 전 사나가 죽은 그 순간부터 르베나는 누구도 제 안 깊숙이 들이지 않았다.
그래야 누군가를 잃었을 때 크게 아프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연합군과의 전쟁을 맞닥들이고 후벤과 가스트의 위험을 깨닫고서야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리고 회귀 후에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했지만 오랫동안 지속한 습관은, 특히 말투만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노력을 해서 분명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마디.
“르베나, 괜찮다면 아빠… 한테는 편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아! 지금 말투가 싫거나 한 건 절대 아니란다! 다 좋지만, 괜히 거리감이 느껴져서 말이지. 이것도 내 괜한 생각이겠지만…….”
슬쩍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하는 칸의 소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비록 지금의 나이에 어린 시절에 본 많은 아이들처럼 그를 살갑게 아빠라고 부르고 칭얼거릴 순 없겠지만, 다 해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라는 존재를 원망했던 회귀 전 그리고 그런것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회귀 후의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래서 르베나는 스스로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칸에게 쉽게 말투를 바꿔썼다.
“네, 그럴게요. 아버… 지.”
조금은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그런 저를 누구보다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보는 칸이 좋았다.
그런 아버지라는 존재가 좋았다.
그런데.
“사랑합니다, 르베나.”
갑작스러운 루드바하의 말은. 르베나의 생각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조금은 어려운 그 단어는. 그녀를 다시 한번 멈칫하게 만들었다.
“사랑해요, 르베나.”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도 잠시. 또 한 번 그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을 땐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생소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대의 곁에 있고 싶어요.”
다른 식의 말을 들어도,
“그대의 사람이, 그대의 남자가 되고 싶어요.”
어제 들은 이후 그 뜻을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또다시 들어도,
“하… 그 마음이 이젠… 조절이 안 돼요.”
조금 더 직접적인 그의 마음을 들어도 온몸을 가득 채운 긴장감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 심장을 두드리는 낯선 감정에 어떠한 의미를 붙이기도 전, 언제나 그림같이 완벽하다 생각한 그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경종이 울렸고 마음속에선 너의 마음을 어서 결정하라 아우성을 쳐 댔지만 르베나의 눈에는 오직 다가오는 그의 얼굴만이 보였다.
흰 얼굴, 긴 속눈썹, 그 아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짙은 벽안. 그리고 그 벽안 속에서 분명 무엇인가가 보였지만 르베나는 아직 그게 뭔지 몰랐다.
곧게 뻗은 그의 콧날 아래 자리잡은 적당히 붉은 입술이 이윽고 열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합니다, 르베나.”
다시 한번 뱉어진 그 말에 르베나는 순간 제 손을 꽉 쥐었다. 온 얼굴이, 온몸이 불에 타듯 뜨거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은은하게 전해져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향이 느껴진 순간,
뜨거운 그의 숨결이 조금 식은 그녀의 얼굴에 닿은 순간,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의 오른손이 제 옆을 짚은 순간.
“싫으면, 피하세요.”
그 말조차 듣지 못한 르베나의 붉은 눈에는 짙은 벽안을 천천히 감추는 그만이 보였기 때문에.
이윽고 뜨거운 그의 숨결이 지척에 닿았다.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머릿속에 떠오른 강렬한 생각에 르베나의 눈이 곧 제 입술에 닿아오는 그를 향했다.
하지만 닿아오는 그의 입술이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익숙한 듯 다가오는 그의 몸이 생각보다 떨고 있어서. 르베나의 목과 얼굴을 한 번에 감싼 그의 손이 너무 뜨겁고 커서.
르베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조차 그들을 배려해 구름 뒤로 숨어 버린 루드바하의 어느 생일날이었다.
* * *
“그럼 보토니에의 진짜 목적이 ‘다니아’라는 겁니까?”
가스트의 물음에 칸이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 보토니에의 일로 소집된 회의에 모인 각국 대표들의 얼굴이 무거웠다. 칸의 말을 전해들은 레턴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르베나에게 물었다.
“근데 왕녀님, 진짜 디오니스에 ‘다니아’라는 게 있긴 해요?”
레턴의 질문에 모두의 눈이 르베나에게로 향했다. 르베나는 그 질문에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그녀가 사용해 버린 ‘다니아’. 시간이 돌려지면서 그것마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르베나가 입을 열었다.
“‘다니아’는 디오니스의 왕위로만 계승되는 전설이라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자세한 건 제노스 전하께 여쭤봐야 하겠지만 디오니스에서도 구전으로 전해진 만큼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계실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르베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답을 했다. 하지만 그에 무슨 의견을 더해야 할 주위가 조용했다. 뒤늦게 그 고요를 눈치챈 르베나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르베나의 눈에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레턴과 자칸의 대표 바흐란, 아사드와 루시드 등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지만, 특히 가스트는 거의 넋이 나간 듯 보였고 아를은 르베나를 가만히 보면서도 놀라움보다는 사뭇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칸과 루드바하만이 그런 르베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르베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루드바하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하며 말했다.
“그럼 일단 이 안건은 제노스 전하께 여쭤본 후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 싶군요. 이른 오전부터 오랜시간 모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준비하라 일렀으니 모두 가시죠.”
루드바하의 말에 다들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이동했다. 논의해야 할 안건이 매일같이 너무 많아 새벽에 모집된 모두는 사실 배가 꽤 고프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들어선 곳에서는 어느새 손님들이 여유롭게 자리할 만큼의 백색 대리석 식탁이 화려한 금테를 자랑하며 놓여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간단한 식전 빵과 샐러드, 각종 애피타이저와 주스, 우유, 차, 커피 등이 기호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젠의 시종, 시녀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각각의 앞에 따뜻한 수프를 내왔다.
그 비싼 요정들의 열매, 그레이풀을 사용한 수프는 냄새만으로도 그들의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레이풀 수프라니 훌륭합니다. 유파시드 님.”
일행은 칸의 칭찬 같은 인사와 동시에 식사를 시작했다. 풍미가 깊은 그레이풀 수프에 이어 연어 카나페, 시금치와 치커리 같은 야채를 삶아 모양을 낸 후 고소하고 짭짤한 마요네즈 소스를 올려 낸 애피타이저들이 줄 이어 나왔다.
기호에 따라 육류, 생선, 채소 등의 애피타이저를 즐기고 난 후에는 작은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저 멀고 깊은 해변에서만 잡을 수 있다는 갑각류의 여린 속살로 한 요리 등이 줄지어 나왔다.
하나같이 젠의 수준을 보여주듯 훌륭하고 성대한 아침임에도 모두는 식사에 쉬이 집중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당황스러움으로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르베나 님, 송아지 고기가 참 부드럽습니다.”
르베나의 모든 식사에 말을 곁들이며 살갑게 챙기는 칸과,
“르베나, 이것도 좀 먹어보십시오.”
“르베나 이건 제가 잘라 드리겠습니다.”
“르베나! 이렇게 많이 남기다니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다시 내오라 할까요?”
그보다 더한 루드바하의 모습에 모두가 심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루시드는 당황과 웃음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관리하느라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고, 가스트는 칸을 유심히 살피기 바빠 보였다.
스윽. 그리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를에게 문득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끊임없이 르베나의 접시에 각종 디저트를 나르는 루드바하를 한번 싸늘한 금안으로 훑은 아를이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아를을 바라보았다.
스윽.
“르베나는 레몬 타르트보다 우유푸딩을 더 좋아합니다.”
이내 르베나의 접시에 세 개의 우유푸딩을 놓은 아를의 금안과 레몬타르트를 든 손을 수치스럽게 바라보던 루드바하의 벽안이 세차게 부딪혔다.
“하아… 하…….”
온몸이 땀으로 뒤덮이도록 작은 연무장 가득 검기를 날린 아를이 상의를 벗은 채 털썩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실 만한데도 아를은 그대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변해 버린 르베나의 말투. 아를의 온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제 곁에 다가오는 것조차 기감이 좋은 아를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무리하면 안 좋아, 아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역광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바라본 그곳에는 그녀, 르베나가 있었다.
“르베나.”
왜인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그러자 르베나가 시종이 준비해 놓고 간 아를의 뽀송한 새 옷을 건네며 말했다.
“감기 걸려, 어서 입어.”
여전히 르베나의 말투가 조금 어색한 아를이 제 맨몸을 한번 보고는 서둘러 르베나에게 건네받은 옷을 걸쳤다. 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은 아를의 머리카락을 한차례 살랑였다.
“아를,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르베나의 말에 끊임없이 르베나를 챙기며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던 루드바하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순간 아를이 르베나의 말을 거절하려다가는 무언가 조금은 기뻐 보이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