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제4장. 르베이나 (1)
훌쩍훌쩍. 덥석 제 품에 안기더니 엉엉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던 루안 공녀의 눈물샘이 어느새 말라가고 있었다. 순간 분명 눈물이 멎었음에도 훌쩍이는 소리만 내고 있는 루안 공녀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본 유안이 조심스레 그녀를 저에게서 밀어냈다.
잔뜩 붉게 물든 눈가와 촉촉하게 적셔진 옅은 보랏빛의 눈가가 아련하다.
“유안… 나랑 도망가자. 아니, 날 데리고 도망가 줘.”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공녀를 가만히 보던 유안이 언제나처럼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룩센 공작님은 야망이 있는 분이기는 하나 자신만의 선도 확실한 분입니다. 고귀한 가문의 여식을, 게다가 본인의 따님을 마르망 같은 작자한테 보낼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유안의 말에 루안 공녀가 소리쳤다.
“상관없어, 그따위 건. 내가 원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인 거 잘 알잖아.”
강하게 빛나는 루안 공녀의 자안을 보며 유안이 조금은 냉정하게 답했다.
“잘 압니다. 공녀님께서 유파시드의 반려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신다는 사실을요.”
유안의 대답에 루안 공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알잖아. 내가 유파시드께는 관심없다는 거. 그거 그냥 전부 유안의 시선을 끌기 위한 거였단 거. 아주 조금은 아버님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한 그냥 보여 주기 식이었다는 거! 다 알고 있잖아!!”
루안 공녀의 외침에 유안이 피곤하다는 듯 제 외알 안경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가 눈을 비비는 모습이 정말로 꽤 피곤해 보였다.
“유파시드와 혼인하고자 무릎까지 꿇는 여성을 보며 제 관심을 끌기 위해 저러는군, 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꽤나 단호한 그의 말에 루안 공녀가 무언가 말을 보태려 하였으나 유안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혹여나, 그게 사실이라 해도. 저는 루안 공녀님께 마음이 없습니다.”
순간 들린 그의 말에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충격으로 굳어진 공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제 눈에 똑똑히 새긴 유안이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룩센 공작께서는 세츠로서의 능력이 없는 외동딸이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을만한 위치를 원하시는 겁니다. 다소 강압적인 면이 있기는 하나 분명 공녀님께 어울리는 신랑감을 따로 구해 놓으셨을 겁니다”
말을 끝낸 유안이 지체 없이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제 등에 강하게 닿아 오는 여리고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 이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순간 날카롭게 인상을 구긴 유안이 놀라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가지 마, 유안.”
하지만 그의 강한 항의는 더 강한 그녀의 고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잠시 멈춘 유안의 등을 더 세게 그러안으며 루안 공녀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 그란델과 우리 집에 들어 온 그날도, 그란델이 우리 아버지 대신… 죽은 그날도… 우리 아버지를 원망하며 네가 떠난 그날도… 난 널 사랑했어. 또 내가 울 때마다 포근히 안아 주던 어린 너도. 비밀이던 신력으로 작은 토끼를 만들어 주던… 흑, 너도.”
실낱같은 바람과 오래 묵힌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유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유파시드의 곁으로 가 우리 집안을 견제하는 너도, 그리고 나를 본체만체하는 냉정한 너조차 다 사랑해, 유안. 그러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마. 날 떠나지 마. 부탁이야 제발…….”
애절하리만치 진심이 가득한 루안 공녀의 말. 그럼에도 유안의 새파란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흔들림이 없었다. 곧 유안이 그대로 뒤로 돌며 루안 공녀에게서 한 발자국 벗어났다.
순간 그의 새파란 안광이 달빛에 시리게 빛났다.
“딱 이 만큼. 딱 이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좁혀지지 않을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입니다. 룩센 공작의 사무관으로 일하며 아무런 힘도 지위도 없던 나의 아버지가 공작을 대신해 죽었을 때도. 내가 당신을 안으며 당신의 슬픔을 위로할 때도. 언제나 당신과 나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안의 말에 루안 공녀가 말하지 말라는 듯.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유안은 그런 루안 공녀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룩센 공작가는 어떠한 신분도 지위도 명예도 없는 저따위를 절대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만해!!”
듣기 싫다는 듯 소리치는 루안을 보며 유안이 여지없이 말을 이었다.
“공작을 대신해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죽은 우둔한 아버지가 충성을 맹세한 가문 따위엔 제가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진 유안의 말에 놀란 공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듯 제 눈에 가만히 새긴 유안이 이내 뒤로 돌아 걸어갔다. 그의 모습을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바라보는 공녀에게서 이윽고 그가 점점 멀어졌다.
“바보!! 바보 같은 유안! 날 사랑한다며! 나밖에 없다… 흑, 며!! 그랬잖아. 흑… 그랬잖아 이 나쁜 놈아!!!!”
작은 정원 가득 루안 공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그에게도 고스란히 닿았는지 문득 유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습에 루안 공녀 역시 기대가 듬뿍 담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이 차니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십시오.”
하지만 건조한 말만 뱉어낸 그의 모습은 다시 멀어지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루안 공녀가 더 소리 내어 울어보아도, 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그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유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풀썩, 자리에 주저앉은 루안 공녀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 같은 유안……!! 갈 거면 그냥 가! 걱정같은 건… 흐흑, 개나 줘 버리라고!! 흐흑…….”
늦은 밤 새어 나오는 루안 공녀의 울음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이윽고 달이 기울어 몸에 오싹 한기가 들고도 한참. 루안 공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에선 이 밤의 추위마저 물리칠 더위가 느껴졌다. 루안 공녀는 제 얼굴에 남은 눈물을 손으로 박박 문지르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냈다.
“유안… 후회하게 할 거야, 흐흑… 내 남편으로 만들어서 애를… 흑, 열 명 나아서…죽도록… 흑, 육아만 시킬 거야! 흐윽…….”
끅끅거리면서도 끝내 포기를 말하지 않는 루안 공녀의 모습이 이내 흐느낌과 함께 정원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루안 공녀가 사라진 작은 정원의 어느 나무 뒤, 한 인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늦은 밤엔 혼자 있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순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는 그, 유안의 눈이 피로에 깊게 잠겨 들었다. 유난히도 길고 유난히도 지독한 밤이라는 생각과 함께.
* * *
“들어가 보세요.”
어느새 눈물을 닦은 르베나가 칸을 보며 말했다. 그런 르베나의 남은 눈물을 조금은 어색한 손길로 닦아낸 칸이 말했다.
“저한텐, 아니 나한텐 별로 중요한 연회가 아니야, 내 딸하고 있는 게 더 좋아.”
존대는 불편하다며 말을 놓으라는 르베나와의 실랑이 끝에 겨우 말을 놓은 칸이 어색하게 말하자 르베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마를한, 자칸과 지원 물품에 대한 회의가 있다면서요.”
아주 혹시라도 기사의 말투 대신 좀 더 친근하게 말해줄 수 있냐는 칸의 눈물 어린 부탁에 르베나 역시 조금은 어색한 말투로 말을 했다. 사실 말이 눈물 어린이었지 그야말로 폭포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부탁했다.
“풋.”
“푸핫!”
순간 서로의 어색한 말투에 그만 둘이 함께 웃고 말았다.
후련한 듯, 그리고 조금은 생각에 잠긴 듯 웃음을 내뱉는 르베나의 옆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루아나의 딸이라서 더 예쁜 것 같다고 칸은 문득 생각했다.
“앞으로 루아나에 대한 모든 얘기를 빠짐없이 들려줄 테니 가끔은… 얼굴을 꼭 보여 주렴.”
아직도 조금은 머뭇거리는 칸의 말에 르베나가 용기를 내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놀란 그의 눈이 저를 향하자 르베나가 귓가의 홧홧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자주 봬요. 그러고… 싶어요.”
‘이럴 때 보면 르베나는 루아나의 성격도 닮은 건가?’
기분 좋은 생각에 칸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를 찾으러 다니는 어느 시종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아쉬운 듯, 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을 한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칸의 모습이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소리를 내었다.
“아… 버지.”
너무나 생소하고 어색한 단어. 하지만 그래서 더 잘 부르고 싶은 단어. 그럼에도 내뱉을 때마다 어색한 단어라 르베나는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어느새 밤바람이 조금은 차갑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어쩐지 뜨거운 제 눈가를 식혀주는 찬바람이 기분 좋았다. 이 바람에 그동안의 절망과 원망, 그리움 등이 깨끗하게 날아가는 느낌이라 더 좋았다. 곧 가만히 눈을 감은 르베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생겼다.
“나도 생겼어요, 아버지가.”
아주 작게,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게 속삭이는 르베나의 중얼거림이 이 밤의 바람처럼 가벼웠다. 또 무언가 아주 큰 덩어리가 아주 잘 녹아버린 느낌이 시원했다. 그리고 곧 눈을 뜬 르베나의 앞에는 여느 때보다 편안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루드바하가 있었다.
“미안해요, 르베나의 아버지가 어린 날의 저 때문에 그대에게 가지 못해.”
조금은 칸의 사정을 전해 들었던 루드바하의 얼굴에 속상함과 미안함,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때 르베나가 조심히 손을 들어 루드바하의 얼굴로 가져갔다. 처음 받아본 르베나의 터치에 놀란 루드바하의 눈이 엄청난 기세로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한번 작게 웃은 르베나가 조금은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건 꼭 루드 당신이나 저를 위한 게 아니었대요. 루아나… 내 어… 머니를 위한 일이었데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자 르베나가 민망한지 약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칸이, 아니 아버지가 이 말투가 더 좋다고 해서 서로 노력하기로 했는데……. 사실 사나도 가스트도 또 후벤도 언제나 이런 말투를 좋아하길래… 소중한 사람들에겐 모두 노력해 보기로 했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이젠 루드바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르베나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촉촉하게 젖은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저도입니까?… 르베나의 소중한 사람… 그중에 저도 있습니까?”
루드바하의 질문에 이번에는 르베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입을 꾹 닫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보는 루드바하의 마음이 순간 이상하리만치 요동치기 시작했다. 첫 만남부터 나이답지 않게 큰 짐을 짊어진 소녀. 거친 손마디가, 또 딱딱한 말투가 그녀의 것이라 좋으면서도 그녀의 외로웠던 시절을 대변하는 듯해 언제나 아팠다. 거리를 좁히려 해도 금방 벌어지는 간격에 마음이 시렸고 그래도 한 번씩 작게 지어주는 미소에 행복해했다.
칸, 그녀의 아버지. 그는 이 모든 걸, 이 모든 아픔을 한순간에 녹여 버렸다.
언제나 간격을 벌리던 그녀의 딱딱한 말투도, 누구보다 잘 어울리지만 잘 지어주지 않던 미소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던 마음까지도.
아버지란 단어는 존재만으로 이렇게나 많은 일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루드바하는 그의 존재에, 또 그의 사랑과 헌신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앞에서 부끄러운 얼굴을 감춘 채 귀가 빨개진 한 여자의 존재가 감사했다.
“사랑합니다, 르베나.”
그래서 루드바하는 또 참지 못했다. 아니, 이제는 참을 생각조차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