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90화 (190/276)

190화

제4장. 르베이나 (10)

말을 하던 르베나가 범람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후두둑, 후두둑.

자신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눈물이 숨 막히게 아파 왔다. 고운 얼굴을 괴로움으로 한껏 찡그린 그 모습이 칸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한순간에 끄집어내 세차게 난도질했다.

“그… 걸 어떻게……?”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많이 놀라서. 그 모든 일을 도대체 이 아이가 어떻게 아는 것인지. 그 아픈 일들을 도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지… 오로지 그것만 신경 쓰여 칸은 이 순간조차도 제 아픔을 외면해 버렸다.

그런 칸의 모습에 제 입술을 꽉 깨문 르베나가 소리쳤다. 순간 터져 나온 감정은 끝을 모르고 질주했다.

“그게 중요해요?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그것도 모르고 원망만 했는데… 내 삶이 끝나는 순간조차 오지 않는 당신을 원망하고! 내 앞에 제발 영원히 나타나지 말라 애원했는데……!!”

외로웠던 영혼의 한 켠. 그곳에 남아 있던 과거가 되심새김질하듯 전력을 다해 뿜어지고 있었다.

“어린 날의 내 폭주로… 그 폭주의 반동을 대신해 당신이… 당, 신이… 흑… 죽은 줄도 모르고 그렇게 오래… 당신을 원… 망했는데, 왜!!”

르베나가 더 이상 나오지 못하는 말을 눈물로 전했다.

죽도록 원망했다. 나타나면 망설임도 없이 죽일 거라 수없이 다짐했다.

나를 태어나게 한 당신을, 나를 불행 속으로 던져 버린 당신을, 그래서 결국 후회만으로 점철된 삶만 살다 죽게 한 당신을 죽이리라. 수백 번 수천 번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아주 초라한 어느 공간, 그곳에서 일어난 사나의 죽음으로 폭주한 내 마력의 반동을 모두 대신 받고 쓸쓸히 죽어갔을 당신을 몰라서. 반동조차 없는 내 폭주는 모두 내가 잘난 탓인 줄만 알아서.

죽어 가면서도 딸을 위해 느끼는 고통조차 행복으로 받아들였을 미련한 당신을 몰라서.

그래서 나는 그렇게 당신을 원망했는데.

“왜… 왜 날 이렇게… 비참하고 못난 사람으로, 흑… 만들어, 왜……!!”

르베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울음으로 많이 뭉개져, 칸은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아이가, 남들의 눈엔 아벨디온의 단장, 디오니스의 왕녀, 최강의 베이라라 불릴지언정 내 눈에는 한없이 작고 소중하기만 한 내 아이가 울고 있으니.

그래서 다른 이유 따윈 필요 없었다.

스윽. 순간 울고 있는 르베나의 몸이 아주 넓은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아주 따뜻하고, 아주 슬프고 아주 든든한 품에.

“흑, 흑… 으흑…….”

더욱 서럽게 우는 아이가 너무 아파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르베나를 안은 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미안하다, 혼자 두어서. 그 모든 고통에 널 홀로 두어서. 그리고… 루아나를 지키지 못해서. 그녀라면 나보다 훨씬 좋은 부모가 되어주었을 텐데. 그녀라면 절대 널… 이렇게 울리지 않았을 텐데.”

그녀라면 지금 이 순간 그냥 품을 내어 주는 일 말고 더 확실한 위로를 주었을 텐데. 진작에 이 품에 널 소중히 놓아두고 널 향한 모든 상처를 막아 주었을 텐데.

“미안… 하다, 르베나.”

칸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르베나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흑… 으흑……!!”

사실은 누구보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빠라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내 이름을 불러주며 날 안아주기를, 내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여주기를.

수많은 낮에, 또 그보다 많은 수많은 밤에 당신을 그리고 또 그렸어요. 뿌연 먼지 속 홀로 그려낸 당신의 모습을 어린 날 모든 눈물로 그리워했어요. 그리고 이전 생의 마지막 순간, 눈을 감는 그 순간조차 내 머릿속 잠시 스쳐 간 당신의 존재를… 얼굴도 모른 채 그리워했어요.

나오지 못한 말은 많았다. 지금 제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들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을 지금 할 수가 없어 르베나는 그에게 단 하나의 진심만을 전하기로 했다.

“이… 젠… 가지… 말아요. 흑, 있어요, 내 옆에… 아… 버지…….”

그리고 그 한마디에 겨우 참아내던 칸의 눈이 크게 떠짐과 동시에 후두둑, 그의 수많은 말이 흘러내렸다.

미안한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싶었어. 루아나의 미소를 닮은 너의 미소를 본 순간 행복했단다.

힘든 과정에도 바르게 자라주어 고마웠단다. 못된 이들이 너를 괴롭혔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너보다 더 많이 아프고 힘들었단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다른 이들을 지켜내고, 쓰러질지언정 무릎을 모두 꿇지 않는 네가… 그런 네가… 루아나와 나의 아이라서. 진심으로 행복했단다.

흐르는 모든 눈물이 하염없이 번져 갔다.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가 전하지 못한 말이 되어 흘렀고 적셔지는 서로의 어깨가 떨어져 있던 오랜 시간의 공백을 메우듯 데워졌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모든 생명이 숨을 죽이고 모든 기지개가 움츠림으로 변하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안고 수많은 공백을 눈물로 채워가는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을 계절이 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모든 생명을 찬란한 색으로 물들이는 그 계절이 오고 있었다.

* * *

저벅저벅.

조용한 발걸음으로 밤의 정원을 거니는 루드바하의 신력에 두 사람의 기척이 잡혀 왔다.

“지금쯤 두 사람이 만났을 겁니다. 아니, 이런 부탁을 왜 저한테 하시는 겁니까? 바보 같은 아들내미 구경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제게 말입니다, 유파시드 님.”

싱글벙글 웃으며 소식을 전한 루시드의 모습을 떠올린 루드바하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어렸다. 동시에 두 사람의 기척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슬픔, 죄책감,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더없는 아련함.

‘항상 평온하던 르베나와 칸 님의 마력이 저렇게 여러 감정을 담고 들썩이다니.’

생생한 그들의 감정이 반가워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루드바하가 조금은 후련한 미소를 얼굴에 담아냈다.

그녀가 조금 더 행복해지길. 그녀가 조금 더 웃을 수 있길. 그리고 그녀의 모든 웃음과 행복 이 담기는 모든 순간에 이제는 칸도 함께이길.

간절한 염원을 담은 루드바하의 신력이 순간 두 부녀의 주위로 날아가 투명한 막을 형성했다.

이 정도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오래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동시에 언제나 버겁던 르베나의 짐이, 그리고 홀로 희생의 길을 걷던 칸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루드바하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곳이니 이 작은 정원에 루아나 꽃을 잔뜩 심으라고 얘기해 둬야겠군.

아예 두 사람만 출입하도록 만들어 버릴까?’

유안이 듣는다면 또다시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내쉴 생각들을 잔뜩 하며 걷던 루드바하의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휙. 갑자기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도 놀라지 않은 루드바하의 차가운 시선이 감히 제 앞을 막아선 작은 인영에게로 향했다.

“그대는 정말 내가 우습나 보군.”

순간 루드바하의 몸에서 뻗어나간 신력이 눈앞에 있는 이를 순식간에 덮쳐 버렸다. 농도 깊은 신력에 의해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본능적인 위협에 눈물을 흘리는 이를 바라보며 루드바하가 다시 짓씹듯 말했다.

“다음번엔 그대가 그 숨을 계속 쉴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네, 루안 공녀.”

공포에 질린 루안 공녀를 한번 보고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력을 풀어낸 루드바하가 그녀의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났다.

순간 루드바하를 향해 악에 받친 눈을 한 루안 공녀가 그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루드바하가 이에 작게 한숨을 내쉬기도 전, 루안 공녀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유안을, 그를 만나게 해 주세요, 폐하!!”

루안 공녀의 말에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내려다본 루드바하의 눈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워졌다.

“못 들은 걸로 하지.”

여태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시린 그의 말에 루안 공녀가 그의 옷깃을 한 번 더 거세게 쥐며 말했다.

“이제 당신한테 치대지 않을테니까 제발요!! 유안은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아요!!”

공녀의 외침에 루드바하가 그녀에게 들린 제 옷깃을 신력으로 깨끗히 잘라내며 말했다.

“루안 공녀. 그대는 정말 마르망 백작과 결혼하게 될까 봐 유안을 찾는 건가? 그대의 아비는 제 외동딸을 마르망 백작에게 넘길 만큼 천한 사람이 아니네.”

한숨과 짜증이 뒤섞인 루드바하의 말에 루안 공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누가 그렇데요? 그리고 상관없어요!! 마르망이고 뭐고 이젠 내가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유안 좀 불러 주……!”

“루드바하 님, 죄송합니다.”

있는 힘껏 소리치며 루드바하에게 온갖 무례를 저지르는 루안 공녀의 말이 순간 끊어졌다.

그리고 루드바하는 이미 누가 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의 주인을 보며 말했다.

“유안… 하, 결국은 왔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유안의 얼굴을 본 루드바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유안을 바라보는 루안 공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순간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네는 유안을 보며 많은 말을 삼키는 표정으로 루드바하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그런 루드바하의 뒷모습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유안이 곧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복잡한 눈으로 제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 루안 공녀를 보며 말했다.

“그만 우십시오.”

그의 존재를 못 믿겠다는 듯 껌뻑껌뻑 눈을 감았다 뜨던 루안 공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유안 맞아?”

루드바하의 신력으로 아직도 덜덜 떨리는 몸과 눈물범벅인 얼굴. 조금 전 연회장에서 어제의 일로 떠드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꼿꼿히 고개를 들고 다니던 공녀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그 모습을. 그 격차가 빚어낸 처연함을 제 파란 눈에 한 번 담은 유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전 공녀님과 나눌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식으로 저를 찾지 마십시오.”

유안의 차가운 말에 다시 눈물을 글썽이던 루안 공녀가 그에게 소리쳤다.

“그러게 왜 어제 도와줬어! 사람들 앞에서 펑펑 울게 내버려 두지 왜 나를 가려 줬냐고! 왜 텔레포트로 나를 그곳에서 꺼내 줬냐고! 그리고 왜… 곧바로 사라졌어…….”

루안 공녀의 말에 그녀를 한번 바라본 유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제 외알 안경을 벗었다.

“공녀님이 아니라 누구라도 유파시드 님의 생일연회를 방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감정의 찌꺼기조차 담기지 않은 그의 말에 루안 공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물었다.

“…정말로?”

“네, 정말입니다.”

“정말 정말로?”

“하… 네, 정말입니다.”

마피 어린애처럼 투정이라도 부리듯 던지는 공녀의 물음에도 유안의 대답은 조금도 흔들 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잔뜩 화가 난 듯 씩씩대던 루안 공녀가 소리치듯 물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나 누구 방해도 안 했는데? 근데 왜! 왜 그렇게 급하게 이곳으로 왔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냥 산책을 하다 당신이 루드바하 님을 귀찮게 하시기에…….”

“유안 손에 안경 들려 있잖아.”

“그게 무슨……?”

순간 루안 공녀의 말에 제 손을 보던 유안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유안은 사무를 볼 때는 항상 외알 안경을 쓰지만, 휴식을 취할 땐 안경을 항상 같은 곳에 벗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유안의 업무실로 찾아온 적이 없는 이들은 그가 외알 안경을 쓴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리고 지금 밤 산책을 나왔다는 그의 손에는 완벽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외알 안경이 덜렁 들려 있었다.

“…하.”

그녀와의 오랜 시간이 대체 뭐라고 이런것까지 들키는지.

순간 유안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제 손에 들린 안경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한 마디에, 그 한숨 같은 숨 한 번에. 루안 공녀는 곧장 유안에게 뛰어가 그를 와락 껴안은 채 엉엉 크게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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