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9화 (189/276)

189화

제4장. 르베이나 (9)

그날 저녁 젠의 황궁에서는 둘째 날의 연회가 열렸다. 전날보다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참석한 모두의 마음이 색색의 설렘과 흥분으로 점철된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어제 만난 이를 다시 만난다는 흥분과 설렘으로. 누군가는 오늘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보겠다는 다짐으로. 또 누군가는 어제 마저 하지 못한 사업 얘기를 마무리하겠단 의지로.

그리고 늦은 저녁. 자신의 옆에 자리한 남자의 말을 듣는 르베나의 마음은 그 순간의 누구보다도 큰 울렁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밀 빛 머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언제나 절로 눈을 못 뜨게 했어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자꾸 걱정할 때는 귀를 막기도 했죠.

조잘조잘 쉬지 않는 입이 내뱉는 잔소리가 아주 조금 지루하다 느낄 때도 있었어요.“

그의 말이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이어질수록, 그가 설명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르베나의 머릿속 가득 채워질수록 자꾸만 드는 아찔한 느낌에

르베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지. 르베나의 친부가 그날 밤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대의 남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정중히 취소합니다. 대신 저는 당신의 남자, 당신의 검, 당신의 미소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은… 그대의 의상 담당이 되겠습니다. 이런 제가 싫지 않으시다면 푸른색 드레스를 착용해 주세요.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그날 저녁 르베나는 연회 전 도착한 루드바하의 선물과 함께 동봉된 쪽지를 받고 다시 한번 이상한 심장께를 만졌다. 동시에 루드바하가 어떤 세력으로부터 혼인에 대한 압박을 받고있나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루드바하 님께서… 아주 적극적이시네요.”

르베나의 손에 들린 쪽지를 본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다소 민망해하며 얼른 쪽지를 내려놓았다.

그런 르베나를 보며 순간 사나는 행복하고도 소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연애 쪽에는 통 관심이 없는 분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매일같이 주변의 연애사를 풀어 놓고 얘기하기를 즐기는 시녀 루 덕분에. 또 돌리기 따윈 없이 무조건 직진으로 밀고 가는 루드바하 덕분에.

르베나는 이제 그의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걱정이 어려있는듯 한 르베나의 얼굴을 본 사나가 주변을 정리하는 척하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그 사람의 마음이 무겁다고 받는 사람까지 무겁게 시작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르베나 님.”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말에 르베나가 조금은 놀란 듯 사나를 돌아보았다.

사실 루드바하의 이런 태도와 마음이 싫지는 않지만 르베나는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는 몰랐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그의 마음에 응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나 덕분에 르베나의 고민은 길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살기로 했으니까. 적어도 제 마음에 솔직하게 진실하게. 또 후회 없이 살아보기로 했으니까.

“사나.”

“네, 왕녀님.”

조금은 무뚝뚝하게 들리는 르베나의 음성에 사나가 놀란 듯 답했다. 혹시라도 방금의 제 말에

르베나가 언짢았을까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나의 대답에 잠시 말을 멈춘 르베나는 이내 한 마디를 톡 내뱉고 서둘러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이 드레스로 준비해 줘.”

뒤돌아선 르베나의 얼굴에 여느 때보다 수줍은 미소가 가득 번져 갔다. 연회의 두 번째 밤이었다.

“예쁘다, 르베나.”

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 르베나가 제 뒤에 선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검은색의 연미복에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그래서 유독 더 눈길을 사로잡는 금안.

“아를, 고맙다. 아니, 고마워.”

같은 기사단이라서인지 원래의 말투로 답하려던 르베나가 서둘러 고쳐 말하자 아를의 눈이 곱게 접혔다. 그 순간 미리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영애들의 앓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하아, 저 미소 좀 봐.”

“기사복일 때도 미쳤는데 오늘은 더 미쳤네.”

“아직 미혼이라고 하셨지?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세요, 아버지 사위가 저기 있어요.”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겠지만 르베나와 아를의 귀에는 너무 선명하게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풋.”

“…하아.”

르베나의 웃음에 아를이 민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그의 금안 속. 미소 짓는 르베나의 눈과 입술이 아주 오랫동안 머무르며 그의 더 자연스러운 미소를 불러냈다.

“아를 경,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예쁜 레이디의 시간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남성의 목소리에 아를의 금안은 순식간에 맹수처럼 사납게 돌변해 버렸다.

“루시드 님.”

르베나가 부르는 그 이름이 누구의 아버지 이름인지를 떠올리자 아를의 얼굴이 더 냉랭하게 변해 갔다.

“아를.”

그럼에도 제일 먼저 자신을 부르며 양해를 구하는 르베나의 곤란한 얼굴에 아를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와서는 통 너랑 시간을 보낼 수가 없네. 명색의 네 호위인데.”

통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아를이 그런 말을 하자 르베나의 눈이 아주 조금 놀라 떠졌다.

그 모습을 보고 한번 작은 웃음을 흘린 아를이 르베나의 뺨에 붙은 잔머리를 부드럽게 떼어주며 말했다.

“그래도 양보해야겠지? 네가 원하니까.”

아를의 큰 손이 제 뺨을 살짝 스쳐 가는 느낌과 아주 조금은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에 르베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제가 방해한 걸까요?”

하지만 정말 미안함을 가득 담은 루시드의 말에 르베나가 아를을 다시 바라보자 어느새 아를은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녀와. 어차피 저기서 붕 떠 있는 녀석들도 처리해야 하니까.”

아를의 눈이 향한 곳에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잔뜩 굳은 채 몰려있는 아벨디온이 보이자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베나가 조금은 가벼운 표정으로 루시드를 돌아보자 그가 루드바하와 똑 닮은 미소로 그레이풀 칵테일을 건넸다. 루드바하의 세심함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걸까, 르베나는 순간 드는 실없는 생각과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시드의 손에서 칵테일을 건네받은 르베나는 연회장을 나와 어제보다 더 밝고 아름다워 보이는 중앙정원의 어느 벤츠에 앉았다. 그리고 신력으로 밝힌 조명 아래, 루드바하와 놀랍도록 닮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르베나의 시선을 받은 루시드가 말했다.

“많이 닮았죠?”

루시드의 말에 순간 르베나가 놀라 답했다.

“죄송합니다,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당황해하는 르베나를 보며 보기 좋게 웃은 루시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어려서부터 유파시드께서 저를 닮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거든요.”

루시드의 말에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통의 아이들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니까요.”

말을 하며 루시드가 건넨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담는 르베나의 옆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루드바하의 눈을 그대로 옮긴 듯 진하고 깊은 푸른색의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흐드러진 웨이브 머리를 푼 채로 붉은 루비로 검은 머리를 장식한 오늘의 르베나는 전설 속의 님프 같았다. 오늘만큼은, 아니 루시드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만큼은 르베나만의 도도한 표정도 사라져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님프의 전설이 생각나게 했으니.

그에 무언가를 떠올린 루시드가 조심스레 르베나에게 물었다.

“혹시… 디오니스의 일이 정리된 후 칸 님을 뵌 적이 있습니까?”

루시드의 물음에 순간 눈이 잘게 떨린 르베나가 곧 평소대로의 표정을 하며 답했다.

“칸 님께서는 자칸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러 가셔서… 뵌 적이 없습니다.”

르베나의 짧은 답에 담긴 여러 감정을 루시드는 느낄 수 있었다.

씁쓸함, 그리고 아쉬움 또 곳곳에 배어 나오는 혼란스러움마저도.

신마전쟁에서 무수한 죽음을 보고 살아온 그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삼키던 루시드가 순간 어딘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 뵈면 되겠군요.”

루시드의 말에 답지 않게 번쩍 고개를 든 르베나의 눈이 루시드의 시선이 닿은 곳을 따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몇 개월 동안 한시도 르베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던 한 사람. 그가 있었다.

“칸… 님…….”

자신을 부르는 르베나를 보며 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시원한 밤바람은 어느새 더웠던 여름의 끝을 알리고 있었고 향기롭게 코끝을 어지럽히는 어느 꽃잎의 낙하는 사위를 분주하게 어지럽혔다. 음악 소리와 수많은 이들의 말소리가 배경처럼 깔린 황궁의 어느 작은 정원 안, 르베나와 칸은 한참을 말없이 희고 푹신한 벤치에 앉아 앞을 응시했다. 자신의 울음소리로 마지막 제 짝을 찾는 벌레들의 소리가 제법 선명했다.

“어제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단에 일이 생겨 늦었습니다. 듣자 하니 어제 르베나 님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우셨다고요.”

르베나를 보며 언제나와 같이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칸의 말에도 르베나의 눈은 앞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소를 가득 품은 칸이 가만히 말을 이었다.

“만약 르베나 님의 어머님… 이 보셨다면 너무 예쁘다고 훌쩍이며 알려진 화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을 겁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이어진 칸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하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조금은 고집스러운 르베나, 그런 제 딸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본 칸이 이어 말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밀 빛 머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언제나 절로 눈을 못 뜨게 했어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자꾸 걱정할 때는 잠시 귀를 막기도 했죠. 그렇게 조잘조잘 쉬지 않는 입이 내뱉는 잔소리가 어떤 때는 아주 조금 피곤하다 느낄 때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그의 시선이 순간 어느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해졌다.

“손 안 가득 담기고도 남아 흐트러지는 부드러운 머리의 감촉이, 아무리 봐도 도통 질리지 않는 환한 미소가, 나를 향한 걱정과 애정으로 끊임없이 반짝이는 그 선명한 녹… 안이…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루아나는.”

흠칫.

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르베나의 얼굴이 이윽고 칸의 입에서 나온 한 사람의 이름에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칸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을 잇는 그의 음성이 금방이라도 울 듯 흔들린다고 르베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나를 저주하고… 그녀와 나의… 아… 이를… 지키지 못한 나를 미워하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때는 그 아이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다는 헛된 희망도 가졌으나… 다시 만난 아이가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눈물을 참듯 한껏 힘을 준 눈동자에는 오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루아나, 그녀의 미소를 닮고 그녀가 사랑하던 내 눈을 닮은 그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고마워서…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르베나의 손이 아주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칸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만… 이대로만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아비가 아니라 상인으로. 용서하지도 말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그저… 칸이란 사람으로 그렇게 스치듯 있게만 해 주세요.”

잠시 호흡을 멈추듯 말을 끊은 칸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제 존재조차 거슬린다면 말해 주세요. 그때는 깨끗이 르베나 님의 앞에서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애절하지 않았다. 괴롭지도 않았다. 루아나 공주의 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르베나의 옆에 칸으로서 있겠다는 그의 말에는 정말 어떠한 감정의 실오라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차라리 애원을 하지, 용서를 빌지, 아니면 보고 싶었다 한마디라도 하지. 왜 그렇게 담담하게,

르베나에 대한 마음 같은 건 언제든 저버릴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걸까.

그래서, 그래서 르베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서게 되면 절대 꺼내지 않으리라 수백 번 다짐했던 그 말을 그래서 결국 꺼낼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말하지 않아요. 보토니에 때문에 지킬 수 없었다고. 그들에게 당해서 나 또한 지킬 수 없는 상태였다고!! 원망만 하며 보냈다는 그 오랜 시간을… 오로지 나를 대신할 희생을 준비하며 보냈다는 것도… 왜… 왜 말하지 않냐고요!!“

르베나의 말을 듣던 칸의 눈이 처음으로 충격으로 떨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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