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제4장. 르베이나 (8)
“이쪽은 아벨디온 기사단의 아를 드 메이슨 부단장과 휘하의 기사들이다. 가능성은 이미 유파시드께서 검증을 거치셨으니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도전하자!!”
“와아!!”
“감사합니다, 르베나 왕녀님!!”
“감사합니다, 아벨디온!!”
라옹의 외침에 앞에 도열한 오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라웅이 옆에 선 아를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 부탁해, 아벨디온의 부단장!!”
쾌활한 그의 인사에 아를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일명 성기사단의 검기 배우기. 수십 명의 성기사단이 다른 기사단, 그것도 디오니스의 기사단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모습은 전날 연회장에서 이미 큰 화제가 된 바 있어 수많은 구경꾼들도 덩달아 모여들었다. 르베나와 루드바하 또한 모여드는 이들을 막지 않고 훈련 장면을 공개키로 했다.
“성기사단이 디오니스 기사단에게 기술을 배우다니 수치야.”
“아벨디온의 검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우리 성기사단이……!”
“유파시드의 모든 의견을 존중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아?”
구경으로 몰린 대부분 성기사들의 반응을 이미 예측했기 때문이다. 실상 아벨디온의 검기 훈련을 전수한다는 소식에 모여든 건 얼마 전 디오니스의 전투에 차출되었던 성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도 많은 성기사들은 원초적으로 그들과 적대관계였던 디오니스에 대한 적개심에 쉬이 검기 훈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를과 룬, 또 다른 아벨디온은 들려오는 소리에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 성기사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성기사들의 대부분이 약간의 방어, 치유 등이 가능한 세츠 중 신력이 크지 않아 기사로 전향한 이들이기에 방법만 알려주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벨디온을 구하고 디오니스를 도와준 그들의 은혜를 아벨디온은 절대 잊지 않았다.
“오……!!”
“대단하군.”
“역시 성기사……!!”
호기심 반, 못마땅한 마음 반으로 구경하던 이들의 입에서 금방 환호가 터질 만큼 신력을 다루는데 익숙한 성기사들은 쉽게 검기의 원리를 파악해냈다.
하지만 이내
“으악!! 조심해!!”
콰광……!! 여기저기서 검기가 튀어 오르거나 폭발하는 현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언덕 위, 넓은 티 테이블에 앉아있던 루드바하가 앞에 자리한 르베나를 향해 말했다.
“저도 콘트롤이 힘들었던지라 예상은 했지만… 르베나의 말대로 성기사들은 확실히 더 힘들어하는 군요.”
이미 르베나에게 검기를 배운 루드바하가 마치 다른 나라 기사들을 대하듯 무심히 말하자 그를 한번 흘끗 본 르베나가 말했다.
“원래 치유나 방어의 마법을 정해진 신력 내 자유롭게 쓰던 이들이라 콘트롤이 더 힘들겁니다. 하지만 뛰어난 기사들인만큼 금방 방법을 익히겠죠.”
“르베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만개한 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성의 없는 대답을 전하던 루드바하는 문득 어젯밤 연회장을 나서려는 그에게 아버지, 루시드가 한 말을 떠올렸다.
“표정 관리 좀 하시죠, 유파시드 님, 항상 만개하는 꽃은 매력이 떨어지는 법이니.”
그 말을 하자마자 언제나 짓던 환한 미소로 대기실에서 나온 어머니에게 달려가던 아버지의 말이라 조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했다.
“르베나 님은 아벨디온을 목숨처럼 아끼시던데. 유파시드께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면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언젠가 그에게 전하던 유안의 말도 덩달아 생각나자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다.
르베나의 뭐든게 다 좋은 스스로가 진짜 매력이 없을까, 성기사단을 무심히 말하는 나는 진짜 별로일까. 조금 걱정되었던 것이다.
“흠,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조금 짤막하게 대답을 정정했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재차 답하는 루드바하의 얼굴을 보고 르베나가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루드바하의 어투가 뭔가 조금 달라진 거 같은데 하는 순수한 의문의 표시였다.
하지만 그마저 루드바하에겐 사랑스러운 요정의 고갯짓으로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래서였을까. 루드바하는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해 버렸다. 지금 순간 이 말이 어울리지 않음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르베나. 그대의 모든 게 진짜 미친 사람처럼 다 좋은 저는… 정말 매력이 떨어지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 고개를 돌린 르베나의 눈에 눈꼬리가 처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루드바하가 보였다.
정말 대답이 궁금한지 르베나의 입에 시선을 모은 채 조금은 촉촉해진 파란 눈.
뭐가 두려운지 조금은 긴장한 것처럼 꼼지락거리는 기다란 손.
그러면서도 르베나의 밀크티 속 얼음이 녹을까 신력으로 온도를 유지하는 잠깐의 모습까지.
순간 르베나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햇살보다 반짝이는 그녀의 붉은 눈이 얇게 휘어지고 붉은 입술이 호선을 따라 길게 올라가는 그 순간, 루드바하의 시간도 함께 멈춰 버렸다.
그들의 더위를 감싸는 조금은 기분 좋은 바람의 느낌도, 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힘찬 기합 소리도, 대답 대신 전해진 온전한 미소의 사랑스러움도, 둘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쌉싸름하고 달콤한 밀크티의 내음도. 루드바하는 이 모든 걸 평생 박제할 사람처럼 제 숨마저 멈추어 버린 것이다.
‘언젠가 그녀가 오롯이 그 눈에 날 담아 주었으면.’
‘나를 질릴 때까지 불러 주었으면.’
‘나를 보고 한 번만 활짝 웃어 주었으면.’
‘내 앞에서만 울어 주었으면.’
수천 수만 번의 바램이었다. 유파시드가 담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그래서 더 간절했던 바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간절한 마음. 그리고 지금. 어렵고 망설여지던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그의 앞에 있었다. 영원히 멈출 수는 없는 장면으로, 순간으로, 그리고 사랑스러움으로.
그래서 루드바하는 의도하지 않은 고백을 해 버렸다. 수백 번 혼자서 되뇌던 그 말을. 수천 번 전하고 싶던 그 말을.
“르베나의 옆에 있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오래. 아니 평생을… 그대의 남자로 살고 싶어요.”
그대의 남자로 살고 싶어요.
그대의 남자로 살고 싶어요.
활짝 웃던 르베나에게 루드바하가 던진 마음이 닿아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루드바하의 얼굴과 르베나의 귀가 동시에 홧홧하게 타올랐다.
“황제 폐하.”
그때 딱딱하게 루드바하를 부르는 유안의 목소리가 다행히도 둘의 심장박동을 조금 늦춰 주었다. 동시에 루드바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 냈다.
“아, 응! 무, 무슨 일이지, 유안!”
서둘러 일어나려던 루드바하가 순간 발을 헛디디는 요상하고도 웃긴 장면이 연출된 순간. 르베나는 빨개진 귀를 옆으로 돌리며 제 앞의 밀크티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나 꾸준히 보존마법을 걸었으면 이 더위에 내온 지 한참 지난 밀크티는 여전히 차가웠고 그보다 더 달콤했다.
그리고 허둥대는 제 모습을 르베나가 봤을까 싶어 얼른 균형을 잡고 작은 미소를 어색하게 떠올린 그에게 유안이 다가와 말했다.
“마를한의 일로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짤막하고 무뚝뚝한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얼른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르베나.”
항상 불렀던 이름인데 왜 지금 제 입에서 나오는 르베나라는 세 글자에 이리도 심장이 뛰는지. 서둘러 양해를 구한 루드바하가 유안과 조금 떨어진 큰 나무 밑 그늘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루드바하를 가만히 보던 유안이 살짝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기사들은 땀을 흘리며 훈련 중인데 그런 멋대가리 없는 청혼이나 하고 계시다니. 정말 유파시드의 참모로서 통탄할 일입니다.”
유안의 말에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는 루드바하가 아주 새로웠다. 그래서 유안은 가져온 서류를 무심히 넘기며 말했다.
“꼭 다시 하십시오. 아무리 겉멋을 싫어하는 왕녀 전하라 해도 그런 청혼을 좋아할 여성분은 안 계시니.”
자신의 말에 놀란 듯 두 눈을 깜빡거리는 루드바하를 보며 유안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 * *
화아악-- 불어오는 바람의 부드러운 살결도, 제 몸을 녹여 보내는 얼음의 차가운 숨결도,
현재 달아오른 르베나의 얼굴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대의 남자… 가 되고 싶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루드바하의 말을 떠올릴수록 체온이 올라가 늦여름의 무더위가 심하다고만 생각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도, 달아오른 얼굴도 모두 그래서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그러기로 했다. 아니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좀 더 생각을 해보라고 소리치는 어느 울림에 귀를 기울일 것만 같아서.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 왕녀 전하!!“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도달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신력을 담은 폭발적인 검기가 르베나가 앉아있는 티 테이블을 덮쳤다.
휘익……! 순간 눈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옆에 놓인 검집에서 뽑아든 르베나의 검에서 검붉은 검기가 터져나왔다.
스르륵----! 주위를 다 폭발시켜버릴 듯 맹렬한 검기를 내뿜던 어느 서툰 성기사의 검기가 르베나의 검붉은 검기에 빠르고 부드럽게 흡수되었다. 동시에 르베나의 검에서 나온 또다른 검기가 연무장을 구경하는 관중들에게로 향하는 다른 성기사의 검기를 가볍게 막아냈다. 순간의 정막이 넓은 공간을 가득 안아버렸다. 그리고,
”검기란 저렇게 쓰는 겁니다.“
무뚝뚝하지만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아를의 말이 조용한 연무장을 채웠다. 동시에 연무장 모든 성기사의 눈에도 선망과 존경의 빛이 가득 베어들고 있었다.
솨아아—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르베나 얼굴의 열기도 사라져있었다.
다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르베나와 그 뒤에서 유안과 대화를 나누는 루드바하를 바라보는 아를의 금안만이 이 순간 누구보다 뜨겁게 벼려져 있음을 그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