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7화 (187/276)

187화

제4장. 르베이나 (7)

“다 왔습니다, 르베나.”

연회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루드바하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르베나가 그의 말과 함께 멈추었다. 연회장 밖, 신력으로 밝힌 조명이 무수히 빛을 내는 중앙정원을 가로질러 얼마나 걸었을까. 외따로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선 르베나의 눈이 기분 좋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여기가 정말 루드의 개인 정원이란 말인가요?”

르베나의 말에 섞인 다분한 놀람과 약간의 설렘을 느낀 루드바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정확히 따지면 황족을 위한 정원이죠. 하지만 젠의 특성상 황제라는 게 세습되지 않다 보니 지금은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뒷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건 르베나만의 착각일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간 르베나가 다시 눈을 돌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집중했다. 그런 르베나를 본 루드바하가 정원의 중앙에 있는 투명한 유리온실 속으로 르베나를 이끌었다.

“황제의 정원은 모두 강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고 밖에서는 제가 여기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온실은.”

르베나를 앞에 세우고 루드바하가 온실의 문을 열자 늦여름 밤의 더위가 한순간에 가시며 시원한 공기와 쾌적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마법으로 항상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게 해 놨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쾌적한 공기를 즐기던 르베나가 다시 눈을 뜨고 온실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엔 곳곳에 심어진 녹색의 크고 작은 나무들과 흰색과 푸른색의 꽃들이 즐비했다. 어떤 꽃은 루드바하가 웃을 때 그의 눈을, 어떤 꽃은 그가 무언가 생각에 잠겼을 때 그의 눈을.

‘이건 가끔 나를 볼 때 루드의 눈을 닮았네.’

꽃을 보며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르베나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건 이겁니다, 르베나.”

자연스레 그가 가리킨 곳을 보자 그곳에는 짙은 붉은 색의 꽃이 풍성히 맺힌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책상 바로 옆에 심으신 건가요?”

온실의 한 부분에는 상아색의 큰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그 옆엔 보기만 해도 편안해 보이는 가죽소파와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티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가끔 고민이 길어지거나 힘들 때 이곳에서 일을 하곤 하는데 저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요.”

루드바하는 도통 저 나무가 뭐가 그렇게 좋지라는 눈빛의 르베나를 보고는 작게 웃었다.

“사실 보통 황제의 개인 정원은 원하는 것들로 채워지는데 저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온통 제 머리색과 눈을 닮은 것들만 심어놨지 뭐예요. 그게 좀 부담스러워서 다른 색의 나무를 찾다가 저걸 발견했어요. 중앙정원의 구석.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 저 나무를요.”

루드바하는 나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화려한 꽃들이 즐비하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중앙정원의 한편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게 꼭… 당신을 닮아서요.”

루드바하의 말을 경청하던 르베나의 눈이 순간 잘게 흔들렸다. 순간 루드바하가 제 옆에 선 채 나무를 바라보는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저 나무는 누구에게 보여 주려 꽃을 피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제 할 일이니까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꽃을 피웠겠죠. 하지만 정원사의 관심도 많이 받지 못한 채 꽃을 피우는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럼에도 저렇게 풍성한 꽃을 피운 저 나무는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 뿌리를 가졌을까요, 르베나.”

루드바하의 말은 단지 저 나무를 가리킨 것인데 왜 자꾸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걸까.

그저 아까는 의미 없이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나무였던 것이 왜 이제는 안쓰럽고 대견스럽고 예뻐 보이는지. 르베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르베나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은 루드바하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이젠 제가 옆에 있으려고요. 저 나무가 말하지 않아도 물을 주고 거름을 주려고요. 꽃을 피우면 장하다 칭찬하고 꽃이 질 때는 슬퍼하지 말라 위로해 주려고요. 그리고 긴 겨울잠에 들 때는 편히 쉬라고 곁을 지켜 주려고요. 그러면… 언젠가 저 나무도 저를 알아줄까요, 르베나?”

루드바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바라지 않았다. 르베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제 손을 조심스레 잡아 온 그의 뜨거움이, 잔 떨림이 그냥 그렇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두 사람의 사이로 불어온 신력의 자락. 그것에 흔들린 나무에서 붉은 꽃잎이 대답처럼 흩날렸기 때문일지도.

* * *

길게 이어지던 걸음을 멈춘 남자가 털썩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자잘하게 튀어오는 물방울이 귀찮을 만도 한데 제 얼굴과 머리에 닿는 물방울의 차가움조차 그는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심하다.”

작게 읊조린 남자의 얼굴에서 깊은 어둠 속 밝은 금안이 반짝였다.

“…하아.”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 아를이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별빛이 하얗게 빛나는 깊은 밤. 너는 지금 그와 함께 뭘 할까, 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아를의 머릿속에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루드바하 때문에 르베나가 사생아 소리를 들은 게 너무 화가 났는데 이제 그 분노는 루드바하와 함께 나간 르베나를 붙잡지 못한 제게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서 뭐하냐?”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를은 얼마나 더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한 아를은 들려온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역시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아를의 옆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했다. 쏴아아--- 시원한 분수대로 떨어지는 물소리 너머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간이 여느 연인들의 작은 웃음 소리가 중앙정원 곳곳에서 들려 왔다.

“지금 뭐하고 있을까, 르베나는.”

옆에서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아를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르베나 왕녀님이라고 불러.”

자신의 물음조차 무시해놓고 그녀를 부르는 호칭에 이다지도 민감한 아를이 우스웠다.

“이런 거에 발끈하는 네가 좀 웃기긴 한데 나도 네가 르베나를 르베나라고 부르는 게 싫어서 이해는 가.”

그의 말에 아를의 금안이 그를 못마땅하게 향했다. 하지만 그는 아를을 바라보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하루 종일 오늘의 내가 전보다는 괜찮나를 생각하며 르베나한테 말 한번 제대로 못 붙이는 내가, 유파시드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나는 르베나를 못 잡은 내가 더 싫어.”

순간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싶은 그, 바흐란의 말에 아를이 피식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사이로 끼어든 다른 인기척에 아를은 그에 맞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바흐란 왕자님 여기 계셨군요. 지금 자칸의 복구 문제로 추가 회의가 편성되었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갑자기 들려온 유안의 부름에 바흐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지금 빼앗긴 내 여자의 빈 자리를 슬퍼하고 싶단 말이야.”

바흐란의 말에 유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살짝 구겼고 아를은 다시 한번 살기를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바흐란이 아를을 보고 한번 웃더니 유안을 따라 이윽고 모습을 감췄다.

“…하아.”

다시 혼자가 된 밤. 아를은 괘씸한 바흐란의 막말을 공기 중에 던져 버리며 다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르베나가 웃으며 루드바하의 손에 제 손을 올린 그때 아를은 저도 모르게 르베나를 붙잡아 버렸다.

“밤바람이 서늘해, 르베나.”

최강이 베이라한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늘어놓는 그를 르베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드바하에게서 손을 떼 아를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진심을 다해 걱정스레 물어오는 르베나의 앞에서 아를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네가 오늘 그의 파트너인 게 싫어서. 오늘 그와 춘 춤이 싫어서. 그 사람 때문에 험한 말을 듣는 것도 싫어서.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그에게 웃어주는 것도 싫어서. 무엇보다 네 옆에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는 건 더 싫어서.

아를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백 마디를 참아 냈다. 왜냐하면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한 마디면 르베나는 언제든 루드바하의 청을 거절하고 그의 곁에 남아 그를 걱정할 거라는걸. 그런 르베나가 예뻐서. 너무 좋아서. 결국 자신은 그런 르베나를 잡지도 놓지도 못한다는 걸.

“무슨 소리야. 내 표정 항상 그런 거 잊었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진짜… 밤바람이 서늘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결국 아를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 놓으며 르베나한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거짓으로 짓기 시작한 미소가 걱정으로 저를 향하는 르베나의 눈을 보자 어느새 진심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자 아를의 얼굴을 걱정으로 바라보던 르베나의 얼굴도 어느새 미소로 바뀌었다.

“다행이야, 정말 괜찮아서.”

그 말을 한 르베나는 다시 옆으로 다가온 루드바하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

어째서 너는 내 미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위를 구분하는 거야. 왜 너는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나를 걱정하고 나를 봐주는 거야. 그러면서도 왜… 자꾸 그의 옆으로 가려고 하는 거야.

“그런 주제에 왜… 오늘도 예쁜 거야.”

하지만 루드바하와 함께 사라지는 르베나를 향한 아를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조금 전을 떠올린 아를은 다시 고개를 젖혀 먼 것 같으면서도 선명해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를은 깊은 밤 자신에게 튀던 분수대의 작은 물방울이 뒤로 젖혀진 제 머리를 온통 적실 때까지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제 마음이 그녀에게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흠뻑 적셔진 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다시 분수대에 똑똑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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