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6화 (186/276)

186화

제4장. 르베이나 (6)

루드바하의 등장에 연회장에는 또 다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 긴장감을 더 고조시키는 사람이 있었다.

“도대체 폐하와 저 여자의 관계 때문에 왜 르베나가, 아니 왕녀님께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언제나처럼 르베나의 옆에 서서 금안을 번뜩이는 그,아를의 말에 루드바하의 심장이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곧 그의 벽안이 르베나를 스쳐 루안 공녀를 향했다. 붉은 와인을 뒤집어쓰고 덜덜 떠는 모습이 가련할 만도 하건만 루드바하는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루안 공녀. 일전에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 그 입에 다시는 그대와 내 이름을 함께 올리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할 거라고.”

딱딱하게 굳은 루드바하의 얼굴과 냉기 어린 목소리에 루안 공녀의 낯빛이 두려움에 잠식되어 갔다. 동시에 흔히 볼 수 없는 그의 차가운 모습에 수많은 귀족들, 심지어 르베나까지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 상황에서 편안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폐하, 저희 딸아이와 르베나 왕녀 전하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하필 이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드바하의 시린 벽안이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룩센 공작의 눈과 귀엔 이게 오해라고 들리나.”

딱딱하게 굳은 루드바하의 말에 루안 공녀의 아버지, 룩센 공작이 선명한 금발과 진한 보라색 눈에 어울리는 깔끔하고 중후한 미소를 그리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글쎄요, 제게 들린 건 유파시드께서 루안을 겁박하신 것이고 제게 보인 것은 르베나 왕녀님께서 루안에게 와인을 퍼붓는 거였는데… 오해가 아니면 뭐라 해야 할까요.”

룩센 공작의 눈이 레드 와인으로 범벅이 된 루안 공녀의 얼굴을 향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고명딸을 걱정하는 아비의 모습이었으나 루안 공녀는 똑똑히 보았다. 저를 향하는 룩센 공작의 눈에 차가운 냉담이 빠르게 스쳐 가는 걸. 곧 룩센 공작이 루안 공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루안, 말해 보거라. 네가 어떤 행동을 했기에 르베나 왕녀님과 유파시드께서 저리 노여워하시는지.”

룩센 공작의 물음에 안 그래도 하얀 루안 공녀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질려 갔다.

어떤 행동을 했냐고? 타국의 왕녀에게 실수인 척 샴페인을 붓고 그녀가 남자에게 가벼운 여인인 듯 무례한 말을 했으며 감히 왕실의 핏줄에게 사생아를 운운했다. 그것도 모자라 왕녀의 호위 기사이자 디오니스 공작가의 차남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그뿐이랴, 감히 유파시드가 제 남자라 허언까지 쏟아냈다. 분명 세츠인 아버지께서 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제게 말을 해보라 하는 건지. 순간 머릿속마저 새하얗게 질린 루안 공녀를 메마른 눈으로 한번 본 룩센 공작이 이번엔 르베나를 보며 물었다.

“제 딸이 많이 당황한 모양이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르베나 왕녀님께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련하고 차분한 룩센 공작의 자안을 한번 바라본 르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그 잠깐의 시간, 아를이 그녀의 앞을 막고 루드바하의 서릿발 같은 안광이 룩센 공작을 향했지만 르베나는 이 모두를 가볍게 저지했다.

찬찬히 입을 여는 르베나의 눈이 바르르 떠는 루안 공녀의 손끝을 스치듯 지나쳤다.

“제가 하는 말에 얼마만큼의 신뢰를 보여 주실지부터 말씀해 보시죠, 룩센 공작.”

르베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에 룩센 공작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자질을 가졌군.’

자질구레 루안 공녀의 흠을 이야기하면 어린 공녀의 치기에 아량을 베풀지 못하는 왕녀의 그릇을 사람들은 속으로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 왕녀는 마치 이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 주제를 피하며 공녀의 아비인 자신의 공정함에 대해 얘기한다. 그녀의 질문에 벌써 룩센공작이 나선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귀족들의 시선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정치가답게 한차례 가볍게 웃으며 르베나에게 답했다.

“디오니스의 왕녀 전하이시자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그리고 최강의 베이라라는 칭호를 가진 분께 어울릴 만한 신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문의 인장을 걸고 르베나 왕녀님의 말을 모두 전적으로 신뢰하지요.”

룩센 공작의 말에 이번에는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눈이 그를 향했다. 얼핏 듣기에는 충분한 존중으로 들리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내뱉든 그것은 아랫사람을 감싸지 못한 르베나 왕녀의 실책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유파시드의 생일 연회에 괜한 소란을 만든 책임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눈치챈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려 하였다. 하지만 르베나는 재차 그를 자연스레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루안 공녀가 저지른 모든 무례와 잘못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피곤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의 잘못을 한 가지 꼽아야 한다면.”

르베나의 눈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루안 공녀를 향했다.

“감히 제국의 황제인 유파시드의 생일날, 공작 가문의 부녀가 이토록 큰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점이겠죠.”

말을 끝낸 르베나가 이번에는 룩센 공작을 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모두의 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느긋함과 오만함이 엿보였다.

“…하.”

순간 저도 모르게 작게 헛웃음을 터뜨린 룩센 공작의 눈이 옆에서 토끼처럼 떨고 있는 제 딸아이를 향했다가는 자신을 시린 눈으로 지켜보는 유파시드에게 향했다.

루안 공녀가 제게 어떤 일을 했는지 줄줄이 말하는 우둔한 이가 유파시드의 마음을 훔쳤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었을 텐데. 그가 간과한 한 가지는 르베나 왕녀가 뼛속까지 진짜 왕족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디오니스의 왕녀이고 아벨디온의 단장이며 최강의 베이라라는 자가 제 입으로 제 살을 깎아 먹는 어린아이 같은 고자질을 비웃어 줄 이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다.

‘루안이 내뱉은 하찮은 말을 다시 되풀이하기보다 왕녀라는 신분과 유파시드의 파트너라는 입장을 백분 활용해 루안뿐만 아니라 나의 고개조차 꺾어 버리겠다?’

검만 잡은 기사라고 치부하기에 그녀는 이미 훌륭한 사교계의 레이디이며 왕녀였다.

유파시드의 옆에 서게 하고 싶었던 제 딸아이의 자리를 오늘로 깨끗이 비워 내야 할 만큼.

룩센 공작은 곧바로 르베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선 놀랍게도 일말의 분노나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왕녀 전하의 말씀대로 일의 과정을 떠나 유파시드 님의 생일 연회에 소란을 얹은 점.

루안을 대신해 깊이 사과 드립니다. 또한 저희 딸아이로 인해 젠에서의 기억이 나쁘게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왕녀 전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고개를 숙인 룩센 공작을 보며 르베나 역시 그에 대한 평가를 정정하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는 르베나 안의 그가 딸을 내세워 권세를 차지하려는 하수였다면 지금은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노련한 고수로 말이다.

루드바하도 꽤 힘든 자를 밑에 두었다 생각하며 사과를 받아들이는 의미로 르베나가 고개를 까딱하자 루안 또한 제 아비를 보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르베나에게 못된 말을 뱉던 영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렇게 룩센 공작가의 사과로 일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루드바하가 모두 들으라는 듯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루안 공녀, 그리고 룩센 공작.”

건조한 루드바하의 음성에 잠시 흠칫한 룩센 공작이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루안 공녀를 내 사람으로 엮어 말하지 마라. 허락 없이는 내 이름을 올리지도 마라. 그리고 여기에 그 누구도 감히 내 옆에 누구를 세울 생각 따위 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이 나 유파시드의 뜻이며 더불어 룩센 공작가에 내리는 마지막, 당부다.”

루드바하의 시린 벽안을 본 룩센 공작이 다시 한번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파시드의 말씀을 피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룩센 공작의 욕심이 가끔 과한걸 알면서도 그를 계속 기용해야 하는 이유. 그는 진짜 포기해야 할 때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심을 확인한 루드바하는 그 옆에서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공녀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리고, 르베나 왕녀와 아를 경에게 진심으로 사과해라, 루안 공녀.”

그의 부름에 흠칫한 루안의 눈가는 누가 봐도 안쓰러울 만큼 붉었지만 루드바하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확실한 답을 얻은 루안 공녀가 이내 제 손끝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제 부족함으로 빚어진 모든 언행을 용서해 주세요. 모두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르베나 왕녀 전하, 그리고… 아를 드 메이슨 경.”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룩센 공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루안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그대의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루안 공녀.”

“나 역시 그대의 사과를 받아들이죠.”

하지만 르베나와 아를의 말에 겨우 고개를 든 루안 공녀의 눈에는 어느새 그런 기색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이에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루드바하의 눈이 핑크 샴페인으로 더럽혀진 르베나의 드레스로 향했다. 더불어 르베나의 옆에서 조금 침울해진 사나의 얼굴에도. 곧 그가 가볍게 손을 휘저어 그 모든 샴페인을 공기 중으로 흡입해 올렸다.

르베나의 드레스에 있던 샴페인들이 시간을 돌린 것처럼 방울방울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에 사람들은 조금 전의 일도 잊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르베나.”

사람들의 탄성도 잠시, 루드바하가 양해는 구하는 순간 공중에 방울방울 떠다니던 핑크색 샴페인들이 순식간에 르베나의 드레스와 루드바하의 제복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곧 같은 모양의 꽃무늬가 동시에 새겨지는 광경이 모두의 앞에 그려졌다.

“맙소사 너무나 아름답네요”

“초봄에 핀다는 루아나 꽃 아닌가요?”

“그것도 두 분이 같은 모양이라니요.”

여기저기서 놀라 수군대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르베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루드바하가 그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왼손을 허리 뒤로 두르고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르베나,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 주실 수 있습니까?”

웃는 루드바하의 얼굴에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고장난 듯 그를 향했다.

“…르베나.”

하지만 르베나가 머뭇거리는 그 잠깐의 사이를 못 참고 그녀를 부르는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또 온몸으로 잘게 뜰썩이는 그의 신력 자락들이 너무 애절해서. 무엇보다 그녀와 사나를 배려한 그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르베나는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녀의 체온을 느낀 루드바하의 얼굴에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르베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가에도 그와 같은 미소가 어려 버렸다.

* * *

“유파시드께서 단단히 빠지신 게 틀림없네요.”

“하지만 폐하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요?”

저마다 흩어져 루드바하와 르베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사이 루안 공녀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채 제 앞에 선 룩센 공작을 보았다. 룩센 공작은 잠시 사람들처럼 함께 사라지는 루드바하와 르베나의 뒷모습을 보고는 제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칫. 제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루안 공녀를 보며 작게 혀를 찬 그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

“…잘못했어요.”

점점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전한 루안 공녀의 말은 그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공작이 멀어지며 전해진 그의 신력이 자신의 몸에 물들어있던 레드와인을 깨끗이 지워 낸 순간. 툭. 투둑. 이제껏 잘 참았던 눈물샘이 터지고야 말았다.

술 냄새가 가신 레드와인의 달콤 쌉싸름한 향이 너무 강해서일까. 아니면 제게서 멀어지는 룩센 공작의 등이 오늘만큼은 조금 쳐진 듯 보여서일까.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너무 무거워 루안 공녀는 눈물을 그칠 생각도, 자리를 피할 생각도 차마 하지 못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그런 그녀에게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리고 그때 그녀의 앞을 가리는 누군가의 등이 흐린 눈물 사이로 비쳤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순간 그의 향이 너무 익숙해서, 그의 등이 너무 익숙해서. 루안 공녀는 그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의 신력이 그와 자신을 감싸고 하나둘 그녀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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