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5화 (185/276)

185화

제4장. 르베이나 (5)

“마지막 경고야, 루안 공녀. 여기서 더는 날뛰지 마. 디오니스의 왕녀로서 제국의 공녀에게 베푸는 마지막 아량이니.”

순간 르베나의 온화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냉기 어린 경고가 루안 공녀에게로 가 꽂혔다. 동시에 예쁜 자안을 자못 날카롭게 빛내는 루안 공녀를 보며 르베나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천한 베이라 따위의 말은 뱉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대의 황제, 유파시드께서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익히 알 테니. 더불어 베이라이자 디오니스의 왕녀인 내가 파트너로 초대된 날에는 더더욱.”

루드의 생일날 자신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던 르베나는 그렇게 조용히 마지막 경고를 날리며 공녀로부터 돌아섰다. 왜인지 모를 불쾌하고 신경 쓰이는 심장의 뜨끔거림은 애써 무시하며.

제게서 돌려진 그녀의 등이 여전히 너무 꼿꼿해서, 자신의 시선마저 사로잡은 그녀의 자태가 너무 고아해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그 시선이 너무 오만해서. 루안 공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멍청하게 굴었구나, 루안.”

흠칫.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놀란 루안의 눈이 제 뒤에 선 한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의 짙은 보랏빛 눈이 멀어져가는 그녀, 르베나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존재를 느낀 루안 공녀의 눈도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루안. 세츠도 아닌 몸으로 감히 우리 룩센 공작가에 태어났으면 황후라도 되어야지. 오늘 내로 유파시드께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면 곧바로 마르망 백작과의 결혼 날짜를 잡을 것이니 그렇게 알 거라.”

그녀의 아버지 룩센 공작이 루안 공녀에게 간단히 용건을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는 단지 루안 공녀로부터 세 발자국 멀어졌을 뿐이건만 어느새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멋들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내 루안 공녀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세츠들의 성지, 젠에서 가장 명망 있는 루드바하의 가문과 유일하게 견주어지는 룩센 공작가. 그곳의 외동딸로 태어난 루안 공녀에게는 신력이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뿐인 그녀를 아버지는 세츠도 아닌 핏줄이라며 탐탁지 않아 했고, 그녀가 미모를 발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오로지 황후가 되라는 요구만 반복해 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룩센 공작은 급격하게 확장 중인 사업을 위해 마르망 백작과의 혼인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흔 살의 나이로도 보기 힘든 늙수구레한 외모에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 언제나 루안 공녀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끔찍한 뱀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마르망 백작.

‘그런 작자에게 나를 팔아넘긴다니……!’

루안 공녀가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을 꼬옥 움켜쥐며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내어 쉬며 고개를 돌린 그 순간, 한 사람의 시선과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새파란 눈에 새파란 머리. 루안 공녀는 이 순간 치밀어 오르는 수치를 참으며 이를 악물고 서늘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름다운 이국의 왕녀, 르베나를 힘껏 노려보았다.

* * *

“오랜만입니다, 왕녀 전하.”

루안 공녀에게서 떨어져 사나에게 향하던 르베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전했다.

약간은 능청스러운 미성의 목소리. 곧 그가 누군지 짐작한 르베나가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회의는 끝난 건가, 레턴.”

르베나의 말에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레턴이 말했다.

“저를 도대체 언제 전하라고 불러 주실 건가요.”

레턴의 말에 그를 한번 스윽 본 르베나가 말했다.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되면.”

그러자 르베나의 말에 레턴이 억지스럽게 우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제가 르베나 님 앞에서 죽기라도 해야 가능한 일이겠네요. 그리고 회의는 잠깐 쉬는 중이에요. 르베나 전하의 파트너인 루드바하 님께선 자칸에서 온 대신과 이야기 중이시고요. 아, 혹시 궁금하실까 봐.”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친절히 말하는 레턴을 보며 르베나는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어느 이국의 속담을 떠올렸다.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르베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이 왕녀님.”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린 레턴의 말을 듣지 못한 르베나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레턴이 가만히 르베나를 바라보다가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늘… 왕녀님이 너무 예뻐서요. 나쁜 마음이 들어버릴 정도로.”

레턴의 실없는 농담에 그냥 피식 웃어버린 르베나와 그런 르베나를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는 레턴의 공기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턴을 부르는 베느젤의 음성에 레턴이 아쉬운 인사를 전하며 르베나를 떠났다. 그리고 저 멀리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듯한 사나와 후벤 그리고 계속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 아를이 르베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 얼굴을 온통 굳힌 아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보여 르베나가 조금 서둘러 일행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또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가 르베나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참 아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그것도 남자들 위주로”

르베나의 붉은 눈이 무감각하게 귀찮은 작은 인영을 향했다. 언제 운 것인지 눈가가 붉게 물든 루안 공녀를 바라보던 르베나가 어느새 그녀와 루안을 보고 다가오려는 아를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루안 공녀. 제국의 공녀는 지위가 아닙니다. 뭣도 모르고 나서는 짓 따위는 그만 하세요. 난 생각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않습니다.”

루안 공녀의 옅은 보라색 눈을 보며 명확히 의사를 전한 르베나의 눈에 루안 공녀는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도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녀를 훔쳐 보며 군침을 흘릴 마르망 백작이 더 싫었다.

그래서였을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 저도 모르게 먼저 나가버린 것은.

“사생아 주제에.”

루안 공녀를 지나쳐 다시 일행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던 르베나의 걸음이 순간 멈춰졌다.

그리고 그 순간,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들려오는 아를의 싸늘한 말이 루안 공녀에게 향했고,

“왕녀님……!”

떨리는 사나의 목소리가 르베나에게 향했다.

르베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혼자인 그녀에게 다가오던 사나와 아를 그리고 후벤이 루안 공녀의 말을 듣고 만 것이다. 그리고 소문으로 루드바하의 약혼자라 무성했던 루안 공녀와 루드바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알려진 디오니스의 왕녀, 르베나가 함께 있는 그림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귀족들도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지금 감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죠!! 부단장 주제… 컥!! 쿨럭!!! 케켁… 쿨럭쿨럭.”

그런 시선들 속 저를 향한 아를의 무례한 말에 루안 공녀가 발끈한 순간이었다.

촤악. 루안 공녀의 얼굴을 향해 붉은 와인이 쏟아진 것은. 갑작스러운 와인의 습격에 놀란 루안 공녀가 사레에 걸린 듯 켁켁대자 모든 귀족들이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 속을 서늘하게 벼려진 르베나의 음성이 뚫고 들어왔다.

“내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그만하지, 루안 공녀. 그대가 함부로 낮춰 말하는 이는 일개 기사단의 부단장이 아니라 왕국의 왕녀인 나를 호위하는 기사이고 디오니스 공자다. 그러니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짓은 그만해.”

르베나의 말에 켁켁거리던 루안의 눈이 수치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가뜩이나 와인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에는 이윽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귀족들은 저마다 이들을 보며 수근거렸고 젠의 영애들은 와인을 뒤집어쓴 루안 공녀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 순간 루안 공녀의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덩어리가 솟구쳐올랐다. 이러면 안 된다고 온몸의 신경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말렸지만 멈출수가 없었다. 귀족들의 틈에 껴 자신을 바라보는 마르망 백작을 본 순간, 그 틈에 얼핏 스친 파란 머리를 본 순간. 모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기에.

“당신이 끼지만 않았어도 나는 루드바하 님과 혼인했을 거야……!”

“누가 공녀의 입에 내 이름을 함부로 올리라 허락했지.”

하지만 공녀는 제 입속에 담겨있어야 할 그 덩어리를 내뱉는 순간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말았다.

분노에 찬 말을,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그 말을 쏟아낸 그 순간.

얼음장보다 차갑고 깊은 밤보다 낮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놀란 루안 공녀의 옅은 보랏빛 눈이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그의 눈을 마주했다.

“폐, 폐하……!”

주위의 모든 공기가 순식간에 식을 정도의 한기가 그, 루드바하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 * *

“이번에 보내 주신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전하께서 유파시드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자칸의 빠른 회복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칸에서 온 대신의 말에 루드바하가 기분 좋게 답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종종 다른 곳을 향했다. 입으로는 자칸의 상황을 걱정했지만 그의 온 신경은 루안 공녀와 함께 있는 르베나에게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루안 공녀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르베나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어쩌지, 아직 고백을 받아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바람둥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왜 그때 그런 소문을 일찍 처리하지 못했지.

태어나 이렇게까지 초조하고 불안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루드바하의 온 신경이 한곳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르베나가 루안 공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딴 곳으로 가버리는 순간 그의 모든 신경은 조금 느슨해졌고 묘한 안도가 돌았으며 다시 자칸의 대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루안 공녀에게서 멀어지는 르베나의 신력이 지극히 차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후 또다시 고질병처럼 르베나의 위치를 확인하던 루드바하가 순간 상황도 있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폐하?”

간간이 다른 곳을 스치듯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말을 끊거나 성의없는 대답을 한적 없던 루드바하의 고개가 순간 완전히 다른곳으로 돌려져 있는 것을 본 자칸의 대신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루드바하의 얼굴은 대신에게 다시 돌려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갑자기 회의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회의 중이던 모든 이가 놀라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사생아 주제에.”

사실 루드바하는 회의 내내 약간의 신력을 귀에 모으고 르베나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훔쳐 들으려던 것은 절대 아니고 단지 루안 공녀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나, 걱정이 되어 루안 공녀와의 대화에만 살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려온 루안 공녀의 말. 그 말에 순간 루드바하의 머릿속이 하얘졌고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많은 상처를 받으며 걸어온 그녀에게 적어도 그의 나라, 젠에서는 어떠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안 공녀의 말을 듣고 순간 요동치는 르베나의 마력을 느낀 그의 심장은 이미 그의 이성와는 달리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선 곳에서 루드바하는 듣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말을 듣고야 말았다.

“당신이 끼지만 않았어도 나는 루드바하 님과 혼인했어……!”

순간 그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르베나 앞에서 제 이름과 혼인이란 단어를 함께 올리다니……! 참지 못한 분노는 시린 음성을 타고 전해졌다.

“누가 공녀의 입에 내 이름을 함부로 올리라 허락했지.”

떨리는 보랏빛 눈으로 처연하게 저를 바라보는 루안 공녀. 하지만 공녀보다 조금 더 앞에서 약간은 굳은 듯 서 있는 르베나가, 또 그런 르베나의 옆을 지키는 아를의 존재가 그의 벽안에 못 견디게 큰 그림으로 자리해왔다.

동시에 차가운 분노가 뜨거운 용암처럼 그의 전신에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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