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제4장. 르베이나 (4)
“르베나 님, 그레이풀로 만든 푸딩이에요!”
사나가 테이블을 둘러보다 발견한 그레이풀 푸딩을 보고는 얼른 집어 르베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레이풀. 요정과일로 만든 푸딩. 그리고 르베나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
하지만 르베나는 그레이풀 푸딩을 입에 단 한 스푼도 넣지 못했다.
‘심장이 안 좋은가?’
첫 춤을 끝낸 루드바하가 급한 용건이 있다며 다가온 유안과 함께 사라지고 난 후 르베나의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에서는 아마도 엄청난 혈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고 동시에 생경한 느낌의 마력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다. 그건 뭔가 견딜 수 없게 뜨거우면서도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음식에 독을 탔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르베나는 아직 젠에 와서 이렇다 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그러니 제외.
‘요즘 무리를 했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젠으로의 일정을 앞둔 르베나를 위해 제노스 왕은 많은 일을 메이슨 공작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니 이것도 제외.
결국 르베나는 꾸준히 몸에 마력을 돌리며 잘못된 곳이 없나를 점검할 뿐이었다.
“제럴드 드 하트. 하트가의 백작 제럴드가 존귀하신 디오니스의 왕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곧이어 들려온 익숙한 인사에 르베나의 시선이 기계적으로 제 앞으로 향했다. 루드바하와의 첫 춤을 끝낸 후 수없이 다가오는 젊은 귀족들과 왕가 방계들의 접촉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제럴드 백작.”
사교계에 참석한 왕녀답게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의 음성이 르베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제럴드 백작의 심장은 격한 박동으로 인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도 아름다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미치겠군.’
루드바하가 마음을 준 여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탐이 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답고 유능했다.
그리고 여성의 마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했으니 제럴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이 아름답고 멋진 여성을 제 옆에 두고 싶다는 욕심에 휩싸였다. 물론 감히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자신뿐이 아니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우신… 욱!!”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잇던 제럴드 백작이 순간 제 심장을 붙잡더니 놀란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누군가 눈 깜짝할 새 다가와 그를 부축하며 연회장 밖으로 데려갔다. 인사말만 건낸 채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그의 자리를 보며 사나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벌써 몇 명째인지 모르겠어요, 르베나 님께 와서 인사하는 분마다 고통스러워하며
나가시니…….”
창백한 얼굴로 사라지는 제럴드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나의 말을 들으며 르베나는 생각했다.
‘역시 독인가.’
“자칸 바흐란 왕자의 검기, 마를한의 왕 레턴의 신력, 디오니스의 유일한 공작가 아를 경의 검기. 그리고… 젠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왕인 루드바하의 신력.”
동서남북에서 뻗어 나오는 흉포하고 사나운 힘을 느낀 아사드가 차가운 샴페인을 한 모금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게 내 아들뿐만이 아니었어…….”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음식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르베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 제럴드 백작을 데리고 나간 건 누구의 기사일까. 불쌍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나하나 사라지는 젊은 귀족과 왕가의 방계들을 기리는 것도 잊지 않으며 말이다.
“아무래도 독은 아닌 거 같은데.”
“네?”
아까부터 혼자 조용히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한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되묻자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사나가 준 그레이풀 푸딩을 드디어 한 스푼 떴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 중에서 딱히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니 독은 분명 아니다. 르베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티스푼 위에서 탄력 있게 몽글대는 푸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젠의 주방장은 디저트에 꽤 감각이 있는 모양이네.’
순간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들어올리자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탱글탱글 몸을 비꼬는 푸딩이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르베나가 그것을 제 입술 앞으로 가져갈 찰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루안 드 룩센. 젠의 룩센 공작가의 딸 루안이 존귀하신 디오니스의 왕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젠 제국의 유일한 공녀, 루안이었다.
프린세스풍의 옅은 보라색 쉬폰 드레스를 입고 옅고 결 좋은 금발은 웨이브를 줘 흐트렸다.
옅은 보라색의 눈에 어울리는 옅은 핑크색 토파즈로 장식한 헤어장식이 인사를 건넨 루안의
화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한껏 돋보이게 해주었다.
“반가워요, 루안 공녀”
다가온 영애에게 오늘만큼은 기사로써가 아닌 왕국의 왕녀이자 루드바하의 파트너로써 인사를 건넨 르베나의 말에 루안이 잠시 움찔했다.
‘뭐야 목소리까지. 짜증나.’
순하고 고운 미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루안을 보며 짐짓 사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르베나가 작게 눈짓하며 말했다.
“사나, 목이라도 축이고 있어.”
자리를 비켜달라는 르베나의 완곡한 제안에 사나는 루안 공녀를 한번 바라보았다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런 자리에서 르베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영애가 거의 없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파티를 조금이라도 맘 편히 즐기기 바라는 르베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사나는 르베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기로 했다.
한편 루안 공녀는 제국의 공녀인 저를 배려해 주위를 물렸다고 생각되는 르베나의 태도가 썩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레이풀을 좋아하시나 봐요”
르베나의 손에 든 푸딩을 본 루안이 제 손에 들린 핑크빛 샴페인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르베나는 그에 선뜻 대답했다.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예요.”
르베나의 대답에 루안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놀랍네요. 거의 다 망해가는 디오니스에도 그레이풀을 구할 능력이 있다니. 아, 순수한 감탄이니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루안 공녀를 한 번 본 르베나는 그저 작은 미소로 답하며 손에 든 푸딩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탱글거리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푸딩은 그레이풀의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을 잘 담아내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루안 쪽이었다. 자신의 말에 의외로 침착한 르베나의 태도 때문이었다.
루안이 슬며시 푸딩에 집중하는 르베나를 보고는 다시 한번 예쁜 미소를 만들어내며 말했다.“아, 그리고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저에 대한 소문은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루드바하 님과의 소문은… 소문, 일 뿐이니.”
걱정하듯 그리고 약간은 미안한 듯 전해오는 루안 공녀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이윽고 아쉬운 듯 푸딩을 떠났다. 그러자 약간은 과장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루안이 말했다.
“아, 혹시 모르셨나요? 저와 루드바하 님이 약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어머,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괜한 말을 괜히 하진 않았겠지.’
정말로 당황한 듯 보이는 루안 공녀를 보며 르베나가 짧게 생각했다.
소문. 게다가 루드바하가 다른 여자랑 얽힌 소문이라니.
“좋아합니다, 르베나.”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닿는 게 못 견디게 싫어서.”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던 그의 말들을 잠시 떠올린 르베나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제 감정을 지워냈다. 그리고는 사나가 떠나기 전 놓아두었던 또 다른 핑거푸드를 집어 입에 가져다댔다. 표정변화도 없이 게다가 너무도 깔끔한 동작으로 음식을 먹는 르베나의 모습에 루안의 심사가 뒤틀린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하, 제국의 황제와 파트너로 참석한 파티에서 나 정도의 미모를 가진 영애가 폐하랑 소문이 얽혔다면 응당 궁금할텐데? 애써 참는 모습이라니. 웃기고 있네!’
저만큼 가증스러운 여자가 따로 없겠다고 루안은 생각했다.
‘언제까지 고고한 척을 하나 보겠어! 오늘 저 고상한 가면을 꼭 루드바하 님 앞에서 벗겨야지!! 그분의 옆자리는 일단 내 거야!’
이에 다시 한번 마음을 먹은 루안이 르베나가 잠시 멀리 있는 사나에게 눈길을 준 사이
제 손에 들린 샴페인을 야무지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불렀다.
“아, 르베나 왕녀님.”
멀리 시선을 두던 그녀의 얼굴이 저를 향하는 순간 루안 공녀는 자신의 샴페인 잔을 르베나 쪽으로 흔드는 척 그녀의 흰 드레스에 흩뿌렸다.
뚝, 뚜둑.
르베나의 흰 새틴 드레스에 핑크색의 끈적한 샴페인이 점점이 번져 갔다.
“어머, 죄송해요!! 이를 어쩐담!!”
그리고는 르베나에게 연신 사과를 하는 루안의 입가에는 남모를 작은 미소가 걸렸다.
르베나의 무감각한 두 눈이 애써 제 미소를 가리는 루안 공녀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줄도 모르고.
“…충분히 즐기고 있나요, 루안 공녀.”
순간 르베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소름 끼치게 다정했다. 동시에 루안 공녀는 이 순간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더없이 달콤한 르베나의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미소에 루안 공녀가 고장 난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르베나가 제 드레스를 한번 흘끗 보고는 말했다.
“나와 내 왕국을 모욕하는 것. 또 내 심기를 어지럽히고 곤란해하는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
르베나의 말에 루안 공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걸 잘 즐기고 있나 물은 거예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정도는 알고 왔어야죠.”
쿵쿵.
르베나의 얼굴에 걸린 매혹적인 미소가 저를 향하는 순간 루안 공녀는 발끝이 아스라이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도 제국의 공녀. 이 정도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팔푼이가 아니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지… 저는 다만 젠이 낯설 왕녀님을 위해 말동무를 해 드리려던 것뿐이에요. 물론 샴페인을 쏟은 건 정말 죄송……!”
“그러니 여기까지만 해요. 아끼는 드레스가 지저분해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이걸 본 누군가가 슬퍼하는 건 보기 싫으니.”
루안의 말을 깔끔하게 잘라낸 르베나가 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실 내에선 루드바하를 제외한 누구도 마법을 쓸 수 없기에 당장은 못 하겠지만 기회를 봐서 얼른 마법을 쓰면 지워질 자국.
딱 거기까지가 애송이처럼 달려드는 철부지 공녀의 질투심을 받아주는 한계점이었다.
자신의 말에 멍해져 있는 루안 공녀를 한 번 본 르베나가 슬슬 저에게 몰려드는 시선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니, 돌렸을 것이다. 제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천한 베이라 주제에… 감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르베나의 눈이 제 뒤에서 예쁜 가면을 벗어낸 한 영애를 향했다. 아주 예쁘지만 동시에 아주 가소로운 한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