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제4장. 르베이나 (3)
넓은 공개홀.
젠의 상징인 흰색과 금색을 섞어 천장을 이은 화려한 휘장. 그 위로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찬란한 샹들리에. 넓은 연회장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큰 분수대. 오색의 찬란한 빛을 내며 분수대를 따라 흐른 물이 식혀주는 늦여름의 더위. 뒤쪽에 나열된 화려한 테이블과 그 위로 놓인 수많은 과일과 핑거푸드, 곳곳을 물들인 각종 샴페인과 와인들의 다채로운 색채. 수많은 재료로 수놓인 케이크와 빵, 그리고 음악단의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이 모든 것이 연회장의 모두에게 기분 좋은 청량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어떤 분이실까? 소문만큼 진짜 예쁠까?”
하지만 이 모든 화려함과 볼거리에도 모두의 입은 오늘의 주인공 젠의 황제와 그가 처음으로 대동하는 파트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소문만으로도 대단한 존재인 그녀가 루드바하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꽤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임과 동시에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명. 누구나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한 루안 공녀의 관심도 그녀, 르베나에게 가 있었다.
“제까짓 게 예뻐 봐야 얼마나 예쁘겠어. 투박한 기사 주제에.”
이곳에 존재하는 어느 여성보다 아름답지만, 또 그것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난 그녀, 루안 공녀는 등장도 전에 모두의 관심을 받는 르베나에 대해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제 앞에서 차가운 벽안을 시리게 빛내는 루드바하를 떠올리던 루안 공녀가 아무도 모르게 제 입안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황제 폐하와 르베나 드 디오니스 왕녀 전하의 입장입니다!”
그때 들린 시종의 소리만 아니었다면 오늘도 루안 공녀의 입안은 성치 못했을 것이다. 곧 천사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루안 공녀의 눈이 모두와 같은 곳을 향했다. 동시에 세상의 모든 정적이 문으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저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못 박힌 루안 공녀의 작고 하얀 손이 뜻 모를 충격으로 떨려왔다.
“오늘도 유파시드께선 빛이 나네요.”
“그뿐인가요! 세상에 유파시드의 흰 제복이 폐하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루드바하의 그림같은 외모를 익히 아는 젠의 귀족들마저 입을 벌리게 할 만큼 오늘의 그는 평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좀 더 여성들의 은근한 감정을 건드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유파시드 옆의 분이 혹시……?”
“맙소사… 기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저 모습은 도대체……!”
새틴으로 된 오프 숄더 시스 라인의 흰 드레스는 깔끔하고 장식이 없는 만큼
뛰어난 미모와 몸매의 주인이 아니라면 감히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탐스러운 검은 머리의 옆 부분을 세심하게 땋아 올린 업스타일에 머리의 왼쪽과 뒤쪽을 이은 아주 작은 진주들과 진한 붉은색의 다이아들은 마치 석양이 지는 하늘에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세상에, 저만 한 다이아 목걸이를 하고도 외모가 시들지 않다니!!”
지체 높은 귀족부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다이아 목걸이에는 수백 개의 작은 다이아가 르베나의 긴 목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지만, 그 빛조차 감히 르베나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루드바하와 르베나를 보며 어느새 연회장의 모두는 잠시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이건 마치…….”
어느 귀족의 작은 말소리에 다른 이가 뒤를 이었다.
“…하늘이 내려준 연인이라고밖에…….”
작게 감탄했음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는 같은 생각에 심한 내적 동의를 내비쳤다.
그리고 그들 중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쓴 그녀, 루안 공녀마저 압도적인 외모의 그들, 특히 르베나에게서 제 눈을 쉬이 떼지 못하였다.
* * *
모두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텐데도 동요 하나 없는, 아니 없어 보이는 루드바하를 슬쩍 본 르베나의 눈이 제 손에 걸쳐진 그의 팔로 향했다.
부들부들.
‘단단한 근육으로 만들어진 거 같은데, 팔이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그의 떨림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르베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어느새 중앙의 단상에 성큼 가까워졌다. 그러자 루드바하는 조심히, 그리고 지나치게 정중히 르베나를 제 옆자리에 모셔놓고는 단상 앞으로 가 섰다. 단상 앞으로 가서도 고작 다섯 발자국 옆에 떨어져 있는 르베나를 한번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제 생일을 위해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오늘만큼은 여기 있는 저와 디오니스의 르베나 왕녀를 믿고 마음 편히 즐겨 주시길.”
말을 하던 루드바하의 시선이 자신의 옆쪽에 서 있는 르베나에게 다시 머물렀다.
원래대로라면 단상 위 황제의 자리에서 축사를 읊었을 루드바하가 혼자 있을 르베나를 배려하여 단상 아래, 그녀와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서 축사를 하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또한 아주 잠깐 르베나를 향한 그의 시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지도.
다시 시선을 돌린 루드바하가 제 손에 들린 샴페인을 위로 약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젠과 4개 왕국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루드바하의 선창을 따라하며 위로 들어올린 샴페인을 마셨다. 언제나 ‘젠을 위하여!’라고 외치던 루드바하의 말에 이제는 4개의 왕국이 포함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걸 얘기할 틈도 없이 귀부인들은 부채를 펼쳐 놀란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세상에!!”
누군가의 감탄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제국의 황제 유파시드가 르베나 왕녀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르베나, 부디 첫 춤은 저와 함께.”
옅은 미소는 언제나와 같은데 묘하게 떨리는 그의 음성은 낯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결코 제국의 황제를 그녀의 앞에 오래 무릎 꿇리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요.”
르베나의 승낙과 동시에 루드바하가 능숙한 에스코트로 르베나를 연회장의 가운데로 이끌었다. 동시에 악단에서 부드러운 곡조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저마다 루드바하 주위로 자신의 파트너와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음악과 함께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되자 그들의 주위를 도는 사람들의 시선이 적나라했다. 누군가는 짙은 호기심을 가지고 또 누군가는 강한 시기를 드러내며. 하지만 르베나는 지금 그런 것들에 조금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얇디얇은 드레스 위로 닿아있는 단단한 팔의 감촉이 낯설었고 자신의 머리 위를 스치는 누군가의 숨결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데뷔탕트에서는 왕녀로 즉위하여 바로 제노스를 비롯한 가신들과 춤을 추었다.
‘그때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편안하고 조금은 즐겁던 그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자신의 맨살을 스치는 루드바하 몸의 감촉이. 짙은 우드향 속 숨겨진 부드러운 향기가 제 몸에 배어드는 순간이. 긴 춤곡의 어느 한순간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의 시선이. 조금 불편하면서도 생경했던 것이다.
그리고 르베나가 이 모든 생경한 감각들에 아주 조금 익숙해져 갈 무력 드디어 춤곡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그 순간 옆에서 스텝을 밟던 젊은 남자 귀족의 몸이 실수로 르베나 쪽으로 기울어졌다. 스윽- 자연스럽지만 강한 힘으로 르베나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루드바하가 이윽고 당황한 남자의 눈을 마주보았다.
“히끅!”
순간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서둘러 스텝을 밟으며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루드바하가 제 품 안에 안겨있는 르베나를 조심스레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르베……!”
하지만 루드바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품 가득 안겨있는 르베나의 전신이 너무도 생생히 느껴져서. 르베나의 얕은 호흡이 제복을 뚫고 들어와 제 맨살에 닿는 것만 같아서.
더불어 언젠가 우는 그녀를 제 품 가득 안았을 때 났던 은은한 향이 그때보다 더 짙어져서. 무엇보다.
“…괜찮아요.”
성급히 르베나가 제 품에서 멀어지며 만들어 낸 공간이 시릴 만큼 차갑고, 못 견디게 싫어서. 그리고 딱 그 만큼 붉게 물든 르베나의 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하아.”
한숨 같은 인내를 모두 끌어모았다. 그리고 루드바하는 이 상황에서조차 당황한 그녀를 위해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자기 끌어당겨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닿는 건 못 견디게 싫어서.”
그러면서도 이젠 숨기는 게 불가능해진 제 마음의 일부도 슬쩍 보여 주었다. 이제 그만 그녀와의 못견딜 이 거리를 좁히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쿵쾅쿵쾅.
갑작스레 맞닿은 루드바하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맞닿은 그의 손목. 그곳에서 엄청난 박동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의 말은 진짜 사실인가 보다. 방금 자신을 갑자기 끌어당긴 것이 미안해서 이토록 그의 심장이 요동치나 보다. 르베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닿는 것이 싫어서……!
순간 생각을 이어가던 르베나의 눈이 깜짝 놀라 더없이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 가득 그녀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그, 루드바하의 진득한 벽안이 가득 찼다.
화르륵, 온몸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감각과 동시에 제 살에 닿아있는 그의 몸이 못 견디게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귓가를 울리는 심장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더 이상 구별할 수가 없었다.
* * *
“어머 유파시드 님께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네요.”
“방금 보셨어요? 루바나 자작님이 실수로 르베나 님과 부딪히려고 할 때, 유파시드 님이 르베나 님을… 호호!”
소란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귀족 영애들의 수다를 들으며 루안 공녀의 자안도 첫 춤을 추고 있는 그들에게로 향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외모, 그런 르베나 왕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루드바하의 눈빛. 그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너무 따뜻해서. 또 너무 애달파서 루안 공녀의 눈시울이 그만 붉게 물들어 버렸다.
“어차피 저딴 것도 다… 한순간이야.”
하지만 이내 루안 공녀의 눈시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옅은 핑크색의 샴페인 잔이 작은 그녀의 말소리에 응답하듯 파르르 진동했다.